옛 NL 이론가 “文 정부 이념적 감수성 과해”
집권 세력에 환멸 느낀 ‘구좌파’, 개혁보수로 결집
‘분배·평등’ 노선보다 ‘경제혁신 역량 제고’에 무게
“보수진영 지지율 회복하니 ‘산토끼’ 관심 커져”
개혁보수 최대 아킬레스건은 ‘친박’
“황교안·안철수 한 정당 내 경쟁이 최고 시나리오”
“내년 총선 자칫 ‘박근혜 선거’ 될 수도”
“개혁보수가 한국당 내 ‘메기’ 역할 해야”
4월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형집행정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그런 그는 한때 NL(민족해방 계열)을 대표하는 이론가였다. 민 소장은 서울대 국사학과 84학번이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 참여했다. 1995~2005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을 지냈다. 통일연대에서도 일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다. 민주노동당에서도 활동했다. 어느 각도로 보나 좌파다.
‘NL 출신 수학 강사’는 지금 개혁보수의 울타리로 넘어왔다. ‘범(汎)개혁보수-중도’ 진영이 함께 쓴 ‘평등의 역습’에 필자로 참여했다. NL 이론가이던 그가 ‘친이 직계’로 꼽히는 이동관 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과 함께 책을 썼다. 민 소장은 “범386은 당장 생존 문제보다 역사전쟁처럼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의도적으로 부추긴다”면서 운을 뗐다.
“현 정부가 남북교류를 대하는 태도도 실리에 기초하지 않고 너무 이데올로기적이다. 미국과 중국의 역량 차이를 냉정하게 보지 않는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386들은 청년 시절 갖게 된 이념적 감수성이 (지금도) 아주 강한 것 같다.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자연환경을 보면 편안하게 느끼잖나. 저희 때 386들은 ‘북한’ ‘고구려’ 하면 느끼는 편안함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이를 청산해야 하는데, 마음의 고향처럼 이 생각을 그대로 현실에 투영한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도 서울대 출신 386 운동권이었다. 김 소장은 한때 진보진영 정치인들의 과외교사로 불렸다. 그는 “문재인 정권은 대부분의 사회문제가 자본·대기업·원전마피아 등 소수 음험한 세력의 탐욕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본다. 세상 모든 부조리가 탐욕스러운 놈들 때문이니 분노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평화·민주·공화 같은 ‘문명적 가치’보다는 ‘혈연적·민족적 가치’를 더욱 중요시한다”고 말했다.(180쪽 참조) 지금은 스스로가 “보수와 친화성이 굉장히 높다”고 한다.
좌파의 역주행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 ‘플랫폼 자유와 공화’ 공동의장도 개혁보수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주 의장은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결성을 주도하는 등 1980년대 좌파진영에 또렷한 족적을 남겼다. 개혁보수 전략가이자 ‘플랫폼 자유와 공화’ 산파인 박형준 전 국회 사무총장 역시 고려대 재학 시절 온건 PD(민중민주 계열)로 활동했다. 개혁보수 진영과 친화성이 높은 김용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민중당 출신이다.문재인 정부의 주류는 누가 뭐래도 386이다. 인적 네트워크로 치면 집권세력과 더 가까울 법한 ‘전향 운동권’ 여럿이 ‘범(汎)개혁보수-중도’의 바구니 안에 있다. 이 현상을 두고 박 전 총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분들이 진보 쪽에서 활동하다가 환멸을 느낀 거다. 소위 진보좌파의 문제의식이나 생각이 굉장히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것이다. 보수도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저들(진보좌파)은 더 국정운영 능력이 없고 생각도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전향 운동권’이 경제를 보는 눈은 대동소이하다. 먹고살다 보니 관념이 아닌 실재에 밀착하게 돼서다. 박 전 총장은 “경험적 현실로서 세상을 보면 정책이나 대안을 바라보는 시각이 비슷하다. 경제 활성화를 위해 기업 혁신 역량을 제고하고, 사회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높일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대호 소장은 “대기업 노조·공기업·공무원은 ‘지대(地代·rent) 수취자’(기득권을 바탕으로 평생 동안 수혜를 본다는 뜻)”(181쪽 참조)라고 일갈했다. 민경우 소장은 “애플 아이폰, 크리스퍼 유전자, 인공지능(AI)의 등장을 쭉 지켜보면서 과학기술 혁신 역량이 미국에 있다고 생각했다. 또 민주노동당에 있을 때 ‘정규직 과보호’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는데 (논의가) 잘 안 되는 걸 보면서 문제의식이 파생했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이들은 좌파가 역주행하고 있다고 본다.
최근 회자되는 개혁보수의 골자는 이렇다. ‘산업혁신을 통한 경제활성화’ ‘기업가 정신에 대한 제고’ ‘기술혁명을 통한 신성장동력 확보’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대북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접근 비판’ ‘시장을 중시하되 이를 보완할 공동체 가치 중시’ ‘복지에 대한 전향적 태도’ ‘국제주의’.
두 개의 보수
2016년 2월 18일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를 쳐다보고 있다. [뉴스1]
정책시장에는 개혁보수의 수요가 또렷하게 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논문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의 보수 정치: 몰락 혹은 분화?’(‘한국정당학회보’, 제16권 제2호)를 통해 내놓은 연구 결과는 한국에 ‘두 개 이상의 보수’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논문에 따르면 지난 대선 당시 홍준표 후보와 안철수 후보, 유승민 후보 지지자 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홍 후보 지지자의 71.3%는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꼽았다. 안 후보와 유 후보 지지자 사이에서 같은 질문에 ‘박정희’를 택한 비중은 각각 29.3%, 15.6%에 그쳤다. 외려 안 후보와 유 후보 지지자 중 각각 39.6%와 51.6%가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노무현’을 택했다. 세대격차도 도드라졌다. 홍 후보 지지자의 평균연령이 60.3세였는 데 반해 안 후보, 유 후보 지자자의 평균연령은 52.3세 42.9세였다.
‘성장이냐 복지냐’를 묻는 문항에 대한 응답 비율에서도 범보수 후보 간 격차가 컸다. 홍 후보 지지자의 경우 77.6%가 성장을 중시했다. 반면 안 후보와 유 후보 지지자 사이에서 복지가 아닌 성장을 택한 비율은 각각 60.8%, 51.3%였다. 비교적 복지에 전향적 태도를 보였다는 뜻이다. 다만 대북정책을 두고는 상대적으로 격차가 작았다. 홍 후보 지지자의 80.6%는 ‘대립’을 택했고, 유 후보 지지자의 70.9%가 같은 답을 했다. 안 후보 지지자의 56.8%도 ‘대립’을 선택했다.
김병민 경희대 행정학과 겸임교수는 “2030 세대에서 합리적 보수에 대한 갈망이 존재한다”면서 “박근혜 정부가 무너지고 보수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정통 보수 가치를 중시하는 목소리가 커져 시장과 자유에 대한 담론이 널리 회자됐다. 지지율을 30%대까지 회복하고 나니 ‘산토끼’를 불러 모으기 위해 복지에 대한 담론에도 융통성 있게 접근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보수 안에서) 분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고차방정식
6월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에서 열린 ‘평등의 역습’ 북콘서트 행사에 참석한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오른쪽에서 네 번째)와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오른쪽에서 세 번째). [박해윤 기자]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개혁보수가 한국 정치에서 일정한 포션(potion)과 영향력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 풍토상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는 “영·호남으로 갈린 구도에서 지역 기반 없는 정당은 살아남을 수 없고, 이 세력을 이끌 탁월한 역량을 갖춘 중도 성향 지도자도 없다”고 덧붙였다.
1996년 신한국당 공채로 정치권에 입문한 장 소장은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대선후보 공보팀장을 맡았다. 이후 김무성 당대표 보좌관을 거쳐 바른정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보수진영 현장 밑바닥을 샅샅이 경험한 것. 그는 “독자적으로 개혁보수 기치를 걸고 당선될 만한 지역이 없다. 정의당이야 계층계급 기반이 명확하기 때문에 5석이든 4석이든 총선에서 독자 생존이 가능하지만, 보수에서는 어렵다”고 밝혔다.
이러니 개혁보수 진영 안팎에서는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이 현실적 선택지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유력한 그림은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통합이다. 한국당 비박계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황교안 대표가 청년이나 중도 확장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안철수·유승민과 손을 잡는 게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고차방정식이다. 장 소장은 “안 전 의원이 한국당에 들어가 황 대표와 건강한 경쟁을 펼치는 것이 (보수진영 입장에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라면서도 “안 전 의원도 대통령이 목표라면 충분히 선택할 ‘스텝’이지만 친박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한국당 주류가 안철수·유승민 두 사람이 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 의지를 갖고 있는지가 관건”이라고 분석했다.
고로 개혁보수 운동의 최대 아킬레스건은 ‘친박’이다. 이 와중에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세력이 우리공화당이다. 우리공화당의 영향력에 대한 전망은 엇갈린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가 7월 8일부터 12일까지 YTN 의뢰로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2503명을 조사한 결과, 우리공화당 지지율은 1.8%로 집계됐다. 보수층에 한정하면 지지율은 3.2%로 나타났다.(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3.2%’가 가진 의미는 간단치 않다. 장 소장은 “20대 총선 때 3% 이내로 당락이 갈린 전국 선거 지역구가 36곳”이라면서 “0.02%로 당락이 갈린 곳도 있다. 우리공화당에서 후보를 내 2~3%만 받아도 한국당 입장에서는 악몽 같은 총선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박형준 전 총장은 “보수 유권자들은 대안 세력이 있다고 하면 그리로 표를 몰아주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나 과거 감정에 휩싸여 보수의 분열을 가져오는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면서 우리공화당의 돌풍 가능성을 낮게 점쳤다. 하지만 장 소장은 “내년 총선은 자칫 박근혜 선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심(朴心·박근혜 전 대통령의 생각)의 향배가 대구·경북(TK) 선거 판도를 뒤흔들 거라는 전망이다. 그의 말이다.
“만약 박 전 대통령이 3월 1일쯤 사면되면 4월 총선까지 ‘박 전 대통령이 누구 만났나’ ‘박 전 대통령이 뭐라고 말했나’가 TK 유권자 사이에 초미의 관심사가 될 것이다. 자택 정치하는 거다. 가령 박 전 대통령이 조원진 대표는 만나줬는데 황교안 대표는 안 만나준다면? 조 대표에게 ‘대구에서 선전하시고 꼭 당선되시라’고 메시지를 던진다면? TK 선거 지형이 어마어마하게 흔들릴 것이다. TK에는 연령대가 높은 ‘은퇴 친박 정치인’이 많은데, 이들은 조직도 갖추고 있다. 즉 지역구에 출마할 사람은 많다.”
박심(朴心)의 향배
한국당 내 인적청산도 변수다. 이와 관련해 신상진 자유한국당 신정치혁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현역 의원 ‘물갈이’는 어떻게 진행되나”라는 ‘신동아’ 질문에 “탄핵 사태에 책임 있는 의원들을 평가한 뒤 ‘물갈이’가 이뤄져야 하지만, 특정인에게 ‘책임져라’든지, ‘그 사람은 안 된다’는 식이라면 분란만 생긴다”면서도 “(‘물갈이’ 폭이) 50%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사실 혁신 ‘룰’을 어제 황 대표에게 보고해 아직 공표할 타이밍이 아니어서 말하기 조심스럽다. 7월 중 마무리될 거 같다”고 말했다.(148~149쪽 참조)실제 ‘물갈이’가 이뤄지면 한국당에서 우리공화당으로의 이적 행렬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수 있다. TK가 현역 의원에 대한 교체 여론이 높은 지역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신 위원장은 “영남권은 정당 지지도보다 후보 지지도가 낮은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업체 조원씨앤아이가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매일신문’ 의뢰로 대구경북 만 19세 이상 남녀 2008명(대구 1005명, 경북 1003명)을 조사한 결과 내년 총선에서 현역 의원을 지지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구에서는 ‘지지한다’는 응답이 41.5%,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0.0%였다. 경북에서는 같은 질문에 ‘지지한다’ 41.6%, ‘지지하지 않는다’ 42.1%로 집계됐다(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시나리오를 정리하면 이렇다. (1) ‘물갈이’를 하면 한국당 텃밭인 TK나 서울 강남 3구를 중심으로 우리공화당으로 이탈하는 현역 의원이 생길 것이다. 만약 우리공화당이 지역구마다 후보를 내면 특히 수도권에서는 여당이 어부지리를 취할 공산이 크다. (2) ‘물갈이’를 하지 않으면 당 밖 신진인사나 개혁인사를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그러면 안철수·유승민 세력을 비롯해 개혁보수 진영이 진입할 공간이 급속히 줄어든다.
비박으로 분류되는 수도권 지역구의 한 재선 의원은 “한국당 지도부가 (비박 및 신진 보수에) 전향적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여러 곳에서 제3지대 신당 움직임이 가시화할 수 있고, 이들이 한국당과 총선 전 지분 협상을 하려 할 것이다. 황 대표가 이를 조정할 만한 정치력이 있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황 대표가 개혁보수와 우리공화당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딜레마에 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보수의 퇴행
박 전 대통령의 석방과 명예회복을 앞세운 우리공화당의 움직임이 ‘보수의 퇴행’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 원로 이문열 작가는 “어떻게 박 전 대통령을 감옥에서 꺼내는 게 지금 한국 보수의 당면과제나 우선해야 할 가치가 될 수 있나. 언필칭 개혁을 말하려면 이 참담한 몰락을 이끈 과거를 끊어야 한다는 정도는 합의를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면서 “보수의 회복이 정신 못 차린 왕당파의 반동이고 왕정복고이고 앙시앙레짐(구체제)의 부활이라도 된단 말인가”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157쪽 참조).이 작가가 꺼낸 미국 공화당 사례는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 골자는 이
렇다. 공화당 지지 세력에도 백인우월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등이 분포해있다. 공화당은 이들을 부인하지 않되 간판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막는다.(158쪽 참조) 한국 개혁보수 역시 ‘친박과 당의 울타리는 공유하되, 야금야금 존재감을 키워 주류로 크는 길’을 모색해볼 수 있다.
앞선 재선 의원은 “(정치 현실을 감안해) 전략적으로 (친박을 포함한) 옛 보수우파와 통합하되, 젊은 층 감성에 소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나가는 게 대안”이라고 말했다. 보수진영에서 잔뼈가 굵은 장성철 소장도 “개혁보수가 한국당이라는 내부에서 개혁을 외치는 메기 역할을 하면 보수정당이 건강해질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