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호

경북 문화·관광 르네상스

“한 획, 한 획 역사의 자부심을 得한다”

500년 만에 부활하는 삼국유사 목판

  • 이권효 | 동아일보 대구·경북취재본부장 boriam@donga.com

    입력2016-10-25 10: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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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판 복각은 한민족 얼 새기는 역사 계승
    • 일연스님 삼국유사 완성한 곳에 도감소(都監所) 설치
    • 각수 7명 하루 100자씩…총 8만9300자 새겨야
    고조선(왕검조선), 단군신화, 홍익인간, 연오랑 세오녀, 만파식적…. 이런 말을 듣는 한국인은 거의 반사적으로 ‘삼국유사’와 함께 저자 일연스님을 떠올린다. 삼국유사만큼 한국인에게 친근한 역사서도 드물다. 삼국유사 맨 뒤에는 다음과 같은 발문(跋文)이 있다.

    “우리 동방의 삼국에는 본사(本史)와 유사(遺史) 두 책이 있지만 달리 간행된 적이 없고 단지 본부(本府, 경주)에만 남아 있는데, 세월이 흐르며 자획이 닳아 없어져 한 줄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이 몇 글자뿐이다. (…) 이 나라에 살면서 역사를 알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다시 간행하기 위해 널리 완본을 구하려 했으나 얻지 못했다. 지금 다시 간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지난 일을 후학들이 알 수 없게 될까 걱정스럽다. (…) 이런 사정을 알아 영원히 전할 것을 후세의 학자들에게 바란다.”

    1512년(조선 중종 7년) 겨울에 경주부윤(경주의 행정책임자) 이계복(李繼福)이 쓴 내용이다. 삼국유사가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인쇄본을 구해 판각한 과정을 설명했다. ‘임신본 삼국유사’(조선 중기본)로 불리는 이 목판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세계유산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대장경(해인사 팔만대장경)에 이어 지난해 10월에는 한국국학진흥원(경북 안동시)의 장판각에 보관 중인 조선시대 목판 6만4000여 장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국학진흥원이 전국에 흩어진 목판을 10년 넘게 수집한 뒤 완벽하게 보관한 덕분이다.





    목판을 새기는 이유

    목판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옛날식 인쇄 방법이다. 그런데도 세계유산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얼’과 ‘정신’ 같은 인문적 가치 때문이리라. 목판 인쇄는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한 소통의 가교 노릇을 오래도록 해왔다. 많은 비용을 들여 복잡한 과정을 거치는 제작 방식도 목판의 가치를 높인다.

    경상북도가 임신본 삼국유사 목판이 사라진 지 500년 만에 이를 다시 새기는 이유도 이계복의 심정과 다르지 않다. 단절된 삼국유사 목판을 다시 제작하는 1차적 목적과 함께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통해 보여주려 한 역사적 주체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2차 목적이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문화유산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기대도 담겼다.

    경북도는 2014년 5월 삼국유사 목판사업 계획을 세웠다. 임신본을 마지막으로 목판이 사라진 점, 경북 경주가 목판 제작의 중심지였던 점,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완성한 곳이 경북 군위군에 있는 인각사라는 점 등을 고려하면 목판 복각(復刻)에 대한 책임이 경북에 있다는 역사의식의 발로다. 지난해 11월 경북도와 군위군, 한국국학진흥원은 군위읍 사라온이야기마을 안에 복각사업을 위한 ‘삼국유사 목판 도감소(都監所)’를 열었다.

    도감소에선 전국에서 선발한 각수(刻手) 7명이 판각 작업을 한다. 목판(가로 62㎝, 세로 28㎝, 두께 4㎝)의 한 면에는 20줄을 새긴다. 1줄에 21자를 새기므로 전체 글자는 420자. 뒷면에도 새겨 목판 1장 양면에 840자를 새기게 된다. 전문 각수가 하루 10시간가량 작업해도 100자 정도를 새길 수 있다. 안준영 각수(58·경남 함양 이산책판박물관장)는 “각수의 손끝에서 인쇄를 위한 목판이 비로소 만들어지기에 글자 하나하나에 몰입한다”고 말했다.

    각수들은 글자를 ‘파거나 새긴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얻는다(得)’고 말한다. 가로 세로 1㎝ 크기인 글자를 인쇄본의 글씨대로 새기려면 조각칼을 쥔 손과 마음이 조금도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 획수가 복잡한 한자가 많아 더욱 그렇다. 이런 작업을 삼국유사 8만9300여 자를 마칠 때까지 거듭하는 고된 과정이다. 그래서 각수들은 “판각은 수행(修行)의 자세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 초·중기본, 교감본 판각

    목판 작업은 △조선중기본(이계복의 목판인쇄본으로 서울대 규장각본) △조선초기본(1394년 태조 3년에 간행된 인쇄본) △교감본(경상북도본) 등 3가지 판본 순서로 제작된다. 중기본은 지난해 8월부터 판각을 시작해 올해 2월 목판 112장으로 완성했다. 이 목판은 국학진흥원 장판각에 보관 중이다. 초기본은 10월 말까지 판각을 마치고 연말에 인쇄본을 만들 계획이다. 교감본은 내년 상반기쯤 판각을 마무리한다.

    전해오는 삼국유사 목판이 없는 상황에서 인쇄본을 활용해 새로운 목판을 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초기본과 중기본의 내용이 다르거나 오탈자가 많기 때문이다. 방대한 내용을 담는 과정에서 일연스님이 착오를 일으킨 경우, 판각 과정에서 글자를 잘못 새긴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 인쇄본 중 어느 본이 원형인가’라는 근본적 문제가 생긴다. 경북도는 초기본과 중기본의 다른 부분, 오탈자, 기록을 잘못 인용한 경우 등을 대조해 바로잡는 ‘교감본(校勘本)’ 제작을 추진했다. 교감본 목판은 새로운 삼국유사 목판본이 된다.

    일연스님은 국내와 중국, 일본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인용해 삼국유사에 반영했다. 인용 방식은 자료의 원문 그대로 한 경우도 있지만, 줄여서 인용하거나 같은 뜻을 가진 다른 글자로 대체한 경우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에 착오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사례를 인쇄본을 비교해 교감하는 작업은 지금까지 없었다.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삼국유사목판사업자문위원장)는 “교감본은 우리 학계가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다.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원전에 대한 철저한 교감을 통해 이뤄지는 판각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교감본 판각을 이해하려면 인쇄본 상황을 아는 게 도움이 된다. 이계복의 임신본은 조선초기본(1394년)을 바탕으로 판각해 간행됐다. 초기본으로 현재 전해오는 인쇄본은 석남본, 학산본(국보), 니산본(보물), 범어사본(보물), 파른본(보물, 파른 손보기 전 연세대 교수가 소장하다 연세대에 기증한 인쇄본)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국유사 5권 전체 내용을 담은 인쇄본은 없고 모두 일부만 남았다. 중기본(임신본)으로는 서울대 규장각본(국보)과 고려대본(보물)이 있다. 초기본과 중기본 중 삼국유사 전체 내용이 있는 인쇄본은 규장각본이다.



    미추왕(味鄒王), 말추왕(末鄒王)

    판본을 비교해 바로잡는 교감이 필요한 이유는 초기본과 중기본의 내용이 다른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같은 내용이면서 글자는 다르게 인쇄된 몇 가지를 보자. 未-末, 大-太, 十-丁, 弟-第, 氏-民, 文-父, 吏-史, 于-干, 右-后, 又-文, 天-大, 母-毋, 素-索, 王-壬, 本-令, 知-私, 令-今, 占-古, 治-冶, 工-土, 來-求, 痛-痕, 士-七, 興-與, 何-阿, 代-伐, 卒-率, 無-爲, 員-貝, 犬-大, 厚-原, 租-祖, 陽-湯, 木-水, 方-刀, 千-十, 刑-形….

    특히 ‘미(未)’와 ‘말(末)’이 다른 경우는 눈에 띄게 많다. 신라 13대 왕인 ‘미추왕(味鄒王)’을 ‘말추왕(末鄒王)’으로 새긴 인쇄본도 있다. 이계복은 발문에서 판각을 여러 고을에 나눠 진행했다고 했는데 이런 사정도 오탈자 발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교감본은 삼국유사의 새로운 목판이지만 일각에서는 일연스님의 의도와 원래 내용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문제와 관련해 11월 5일 한국고대사학회 주최로 서울에서 토론회가 열린다. 경북도와 국학진흥원은 교감본 판각을 계획대로 추진한다는 입장. 삼국유사 목판도감소 도도감(판각 및 간행책임자) 김용만 박사는 “조선시대 인쇄본을 원본으로 간주하고 한 자도 고치면 안 된다는 주장은 경직된 태도”라며 “명확하게 오류로 확인된 부분은 학자 다수의 의견을 바탕으로 바로잡아 교감본을 제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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