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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판사 정재민의 리·걸·에·세·이

여기, 사람이 있어요

  • 글·사진 정재민 | 판사, 소설가

여기, 사람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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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한 인사

여기, 사람이 있어요

1 법대 위 필통 2 법대 끝 대법전 3 옆에서 본 법대

법대 가운데까지 걸어가서 앞을 향해 돌아선 후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법정에 나온 사람들이 안녕할 리 있겠는가. 입가에 미소를 띠지도 않는다. 물론 눈웃음을 치거나 손을 흔들지도 않는다. 장례식에 조문 온 사람같이 엄숙한 표정을 유지한다.

이런 식의 인사가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다. 친근감 없이 인사한다는 것이 분노 없이 화내는 것처럼 이상했다. 그럼 판사가 친근하게 인사하면 되지 않으냐, 인상 쓰고 앉아 있는 것보다 친절할수록 좋지 않으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적어도 형사법정에서는 판사가 친절한 것이 어색할 때가 많다. 가령 판사가 친절하게 강간 사건을 재판한다고 가정해보자. 피고인이 들어오면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하고 한껏 미소를 머금고 말한다. 어서 오십시오, 피고인.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간죄 저지른 거 인정하십니까. 네, 인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피해자에게 사과를 드리고 용서를 구하면 더 멋진 분이 되지 않을까요. 아, 싫으시다고요? 미안합니다. 괜한 오지랖이었군요. 그럼 징역 10년에 처합니다. 지금부터 법정구속하겠습니다. (감옥으로) 안녕히 가십시오. (감옥에서) 잘 지내시고요. 다음에 또 뵙길 바랄게요….

인사를 마치면 검은 의자에 앉는다. 자동안마 기능이나 호신용 전기충격 기능 따위는 물론 없다. 다만 발밑에 지압판이 있는 경우는 있다. 에어컨이 없던 시절 한여름에 선배들은 두꺼운 법복이 주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찬물이 담긴 대야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고 한다.

검은색 서류 홀더를 펼치고 메모지 뭉치를 끄집어낸다. 오른편에 놓인 필통에서 연필을 꺼낸다. 플라스틱 필통에는 연필 네댓 자루가 키 순서로 가지런히 들어 있다. 연필심은 막 이발을 마친 머리칼처럼 단정하게 깎여 있다. 꽁무니에는 동그란 지우개가 매달린 연필들은 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를 글쓰기로 유혹해왔다.



필통에 든 파란색 골무도 왼손 엄지손가락에 끼운다. 골무는 연필과 함께 판사의 양대 장비다. 골무는 지문이 있는 쪽에 수십 개의 돌기가 도돌도돌 붙어 있어서 기록지를 촤악, 촤악, 촤악 흥이 나도록 빠르게 넘기면서도 딱 한 장씩만 넘어가도록 제어해준다.

법대는 독서대처럼 판사 쪽을 향해 조금 경사져 있다. 그 위에 노트북, 모니터, 마이크, 대법전 등이 놓여 있다. 노트북을 자주 사용하는 판사도 많지만 나는 급히 판례를 찾을 때를 제외하면 열지 않는다. 논리적 필연성은 없지만 왠지 온라인 접속이 오프라인으로 직접 대면하는 것을 산만하게 만드는 느낌이 들어서다. 대신 증인신문을 할 때에는 노트북 오른쪽 옆에 비스듬히 세워진 모니터를 자주 본다. 속기사가 타이핑을 하는 화면이 그대로 뜨기 때문이다.



탕, 탕, 탕

한복 단추만한 마이크는 기린의 목처럼 쭉 뻗은 받침목 끝에 매달려 있다. 받침대 위 스위치를 누르면 검정 마이크의 테두리를 따라 빨간불이 켜진다. 나는 목소리가 낮고 쉽게 잠기는 편이라 마이크 성능에 예민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까지 들리는 마이크라면 옥타브 폭이 넓은 가수가 된 것처럼 목소리만으로도 현장을 장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대법전은 법대 양편 가장자리에 놓여 있다.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대법전은 머그잔 높이보다 두껍고 무게는 덤벨 정도 되는 하드커버 책이다.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먼 가장자리에 있어 사용할 때에는 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어 들고 와야 하는 만큼 (그러면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란다) 잘 쓰지 않는다. 사실상 장식용인 셈이다.

드라마 속 판사들은 판결을 선고하고 난 뒤에 반드시 망치질을 한다. 탕, 탕, 탕.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세 번씩 친다. 그러나 진짜 법정에는 망치가 없다. 진짜 검사에게 권총이 없는 것과 같다.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면 망치를 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법적 효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결문의 주문과 낭독한 주문이 불일치할 때에는 판결문이 아니라 실제 낭독한 대로 효력이 생긴다. 가령 판결문에 “피고인을 징역 10년에 처한다”고 써서 보냈다고 해도 법정에서 판사가 실수로 “피고인을 징역 10개월에 처한다”고 말하면 실제 형기가 징역 10개월이 되는 것이다. 사건이 워낙 많다보니 간혹 이런 실수가 생길 때도 있다. 피고인으로서는 횡재한 셈이지만 일주일 이상 좋아하기 어렵다. 검사가 반드시 항소기간 일주일 내에 항소하기 때문이다.



여기, 사람이 있어요
정 재 민
● 서울대 법대 졸업,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舊유고유엔국제형사 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제10회 세계문학상, 제1회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신동아 2017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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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재민 | 판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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