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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에 길을 묻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사정(司正)의 칼잡이 ‘혹리(酷吏)’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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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여곡절 끝에 국회 임명동의를 통과한 국무총리가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며 비리와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웠다. 대대적인 사정(司正)을 통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집권 3년차 국정 운영 동력이 떨어지고 대통령의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이를 만회하려는 청와대의 의중과 그간 구길 대로 구긴 검찰의 이미지 제고 필요성이 맞아떨어진 듯도 하다. ‘사기(史記)’에는 비리·부정부패와의 전쟁에 나선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나온다.
끓는 물 식힐 게 아니라 타오르는 불을 꺼라

‘사기’에서 가장 존경받는 혹리로 꼽힌 급암의 초상화.

사마천은 역사적으로 비리와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데 앞장선 인물들을 ‘혹리(酷吏)’라는 다소 부정적인 단어로 표현했다. 글자 그대로 ‘가혹한 관리’란 뜻이다. ‘사기(史記)’ 122권 ‘혹리열전(酷吏列傳)’ 편은 이런 가혹한 관리들의 행태들을 모아놓은 독특하고 흥미로운 내용이다.

혹리란 오늘날 검찰의 검사장과 검사들에 해당한다. 이들은 주로 권세가와 토호, 상인들을 대상으로 가차 없이 법을 집행했다. 어떤 혹리들은 최고권력자의 의중을 헤아려 그에 맞도록 법을 집행했고, 상인과 결탁한 몇몇 부패한 혹리는 법을 빙자해 도리어 법을 어지럽히기도 했다.

혹리의 모범으로 꼽히는 인물은 급암과 정당시다. 이들은 혹리열전에는 소개돼 있지 않다. ‘사기’ 120권 ‘급정열전’에 수록됐는데, 바로 앞편이 좋은 관리들을 다룬 ‘순리열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은 혹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인물들로 짐작할 수 있다.

‘사직 떠받칠 신하’

급암은 강직과 직언의 대명사였다. 사마천은 그의 인품을 이렇게 묘사했다.

급암은 성품이 거만하고 예의를 갖추지 않아 면전에서 반박을 잘 했고, 다른 사람의 과오를 용서할 줄도 몰랐다. 자기와 부합되는 자는 잘 대우했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아예 보기조차 싫어했다. 이 때문에 부하 관리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학문을 좋아하고 의협심이 있어 지조를 지키고 평소 행동도 결백했다. 직언하기를 좋아해 여러 번 무제와 대신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무제는 이런 급암의 강직함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를 ‘사직을 떠받칠 신하’라며 공경의 마음을 잃지 않았다. 평소 자유분방해 복장을 풀어헤친 채 신하들을 만나던 무제가 급암이 나타나면 장막 뒤로 가서 의관을 정제한 뒤 만날 정도였다고 하니 급암의 존재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만하다.

정당시 역시 강직, 청렴하기로는 급암에 버금갔으나 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다음은 정당시에 대한 사마천의 설명이다.

정당시는 청렴하며 집안을 챙기지 않았다. 녹봉이나 하사품을 받으면 여러 손님들에게 나눠줬다. 그러나 그가 선물하는 것은 대나무 그릇의 음식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조회 때마다 틈나는 대로 무제에게 천하의 훌륭한 사람에 대해 칭찬했다. 그가 지식인 등 부하 관리를 추천할 때에는 늘 진지하고 흥미 있게 그 사람을 칭찬했고, 언제나 자기보다 훌륭한 점을 들었다. 관리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부하 관리와 이야기할 때에도 혹시 마음이 상할까 걱정했다. 좋은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무제에게 전하면서도 늦지 않았나 두려워했다. 산동의 모든 선비들과 여러 손님들은 이 때문에 한결같이 정당시를 칭찬했다.

사마천은 두 사람을 같은 열전에 함께 소개한 다음 이렇게 평가했다.

급암과 정당시는 구경(九卿)의 지위에 올랐어도 청렴하고 사생활이 결백했다. 두 사람이 중도에 파면되자 집이 가난해서 빈객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군 하나를 통치했으나 죽은 후에 남긴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사마천은 혹리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급암과 정당시 열전을 통해 가장 모범적인 관리 이미지를 전했다. 뒤이어 사마천이 ‘혹리열전’에서 소개한 혹리는 20여 명에 달한다. 모두 서한시대 인물들이다. 사마천은 초기에 강직하고 직언을 잘하던 반듯한 혹리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사마천 당대인 한 무제 때 이르러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집행하는 것은 물론 각종 악법을 만들어내서 백성을 못살게 구는 못된 혹리들로 변질돼가는 과정을 보여줬다. 이들의 행태에 오늘날 우리의 검찰과 사법부를 비춰보면 적지 않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표 참조).

사마천이 맨 처음 소개한 혹리는 서한 왕조 4대 황제 경제(景帝) 때의 질도(都)라는 인물이다. 질도의 별명은 ‘보라매’란 뜻의 ‘창응(蒼鷹)’이다. 그만큼 사나웠고, 황제 앞에서도 바른소리 하기로 유명했다. 급암과 같은 직언 스타일이었다. 특히 권력을 믿고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권세가들에게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제남군의 호족 간씨 일가를 몰살한 적도 있다. 급암이나 정당시의 스타일을 유지하던 질도가 지킨 또 하나의 원칙은 ‘청탁 거절’이었다. 개인의 사사로운 편지는 뜯지도 않고 반송했다. 예물을 보내오면 곧바로 되돌려 보냈다. 청관(淸官)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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