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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 18

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단종 유배지 강원 영월

  • 최학│우송대 한국어학과 교수 jegang5@yahoo.com

갇힌 땅에서 울리는 노랫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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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의 권력을 도모하기 위한 지금의 계책은 모두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시대나 힘은 현재에만 유효하며 사람의 욕심은 그 현재의 힘에 쏠리는 이치 때문에 그렇다.

중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1년 가까이 중국 난징(南京)에 머문 적이 있다. 그 시절 나는 난징의 교외에 있는 쯔진산 기슭을 자주 찾았다. 울창한 숲 속 이곳저곳에는 볼거리가 많았다. 큰절 영곡사가 있는가 하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능침이었던 명효릉이며, 삼국시대 손권의 무덤, 근대의 쑨원 묘가 모두 이곳에 있다.

유해도 그 옛날에 옮겨졌고 전각들도 많이 사라졌지만 주원장의 묘역은 장대 화려한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점에서 보듯 이 명효릉은 중국 황제의 전통 묘제 연구에도 큰 보기가 된다. 자극적인 역사의 냄새를 풍기는 명효릉 숲길을 걸을 때면 나는 더러 세종과 수양대군, 단종을 떠올리기도 했다.

평민에서 황제의 지위에 오른 주원장은 중국 역대 황제 중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인 이로 기록된다. 반대파에 대한 징치는 그보다 참혹할 수 없었다. 좌승상 호유용을 역모 죄로 엮어 처단하는 과정에서 1만3000여 명을 처형했고, 탁월한 장수였던 남옥을 제거하면서 1만5000여 명을 살육했다. 태자 주표는 아버지를 자주 만류하곤 했는데, 그 일로 아버지의 미움을 사 우울증으로 죽었다.

주원장은 주표의 아들 주윤문을 태손으로 봉하고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다. 당시 주윤문의 나이 16세. 어린 손자가 황위를 잇는 데 중신들이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주원장은 또 신하들을 가차없이 죽였다. 혹여 아들들이 태손인 조카를 해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지만 차마 그들마저 미리 죽일 수는 없는 일. 하여 아들들을 경계하는 ‘황명조훈’을 지어 내렸다. 여기에는 맏이의 법통을 지키라는 엄명과 함께 누구든 이를 어기면 때려죽여도 무방하다는 규정을 넣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지 못한 주원장은 자신이 죽더라도 아들들은 문상을 오지 말고 영지를 지키라는 교지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영락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 손쉽게 궁성을 차지했고, 어린 왕(혜제)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주윤문과 단종

영락제의 황위 찬탈과 세조가 단종에게서 왕위를 뺏은 시간의 거리는 50년을 겨우 넘는다. 몸 약한 아들(문종)을 두고 특히 세손(단종)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세종이 바다 건너 명나라에서 벌어진 저간의 사정을 모를 턱이 없었다. 여건이 흡사한데도 우리네 임금은 살육보다는 타이름과 당부를 택했다. 그러나 잔혹한 사전 대비책으로도 꺾을 수 없는 최고 권력을 향한 욕심과 의지는 당부와 달램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 유혈이 낭자한 왕위찬탈의 드라마가 벌어지는 건, 중화 땅이나 조선 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지상의 모든 권좌는 선혈을 덮은 융단 위에 차려지게 마련이다.

단종은 8세 때 세종에 의해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며 문종이 승하한 후 12세 어린 나이로 왕좌에 올랐다. 병약했던 문종은 임종 때에도 나이 어린 세자를 걱정해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단종을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일단의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해 그를 죽였고, 왕명으로 대신들을 소집한 뒤 대궐문 앞에서 모두 죽였다.

수양대군이 권력을 틀어쥐자 단종은 그를 영의정으로 삼아 군국의 중대사를 모두 처리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 단종은 더 이상 왕좌를 지킬 처지가 아님을 알고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수강궁으로 옮겨 살았다. 1456년 6월,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성삼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꾸민 계획은 실행 전에 발각되었다. 세조는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해 강원 영월에 유폐시켰다.

다시 청령포에서

영월 서강 너머의 물돌이 땅 청령포가 곧 단종의 유배지였다. 주천강과 평창강이 합류해 한 굽이를 도는 지점이다. 그 시대에 누가 이곳을 어린 임금의 유폐지로 추천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대의 지도를 놓고 봐도 이보다 적격의 처소는 없을 듯싶다. 뒤편으론 산이 가리고 3면으로 강줄기가 감아 도니 배를 이용치 않고는 접근할 방도가 없다. 갇힌 땅은 넓지도 좁지도 않으며 풍광이 좋다. 게다가 관아가 멀지 않으니 감시와 물품 조달이 쉽다. 내일 모레 사약이 내려오지만 않는다면 어린 왕으로서도 물고기 잡고 멱 감고 노는 가운데 못다 한 공부나 실컷 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그러나 단종은 이곳에서 두 달 가량밖에 머물지 못한다. 그해 여름 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하는 바람에 부득이 읍내의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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