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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사건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열광과 좌절의 유산

  • 한정숙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cliohan@snu.ac.kr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열광과 좌절의 유산

  • ‘1917년 혁명이 일어났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라고만 기억할 것인가.
  • 러시아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궁극까지 밀고 가서 이를 완성하고자 했다.
  • ‘계급 철폐’와 ‘무산대중의 해방’이라는 러시아 혁명의 이념은 다른 사회에 파급됐고, 지역마다 유효 기간은 달랐지만 서구적 근대화가 아닌 대안적 근대화라는 선택지를 제공했다. 러시아 혁명은 단순한 연대기상의 한 점에 머물지 않는 세계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열광과 좌절의 유산
"가족들을 먹여 살려라.” “전제정을 타도하라.”

1914년 한여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이어지던 1917년 초봄,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여성들의 시위가 제정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오늘날 양력으로는 3월 8일이었고 러시아력으로는 2월 23일이었다. 전날인 2월 22일에 러시아 최대의 무기 공장인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에 다음 날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행진이 더해지자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는 곧 시위대의 물결로 덮였다. 전제정 타도와 전쟁 종식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져갔다.

차르(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가 전선 시찰차 수도를 비운 상황이었다. 수도방위대의 병사들뿐 아니라 근위연대의 병사들까지 시위를 진압하라는 상관의 명령을 거부했고, 차르의 대신들이 시위대에 의해 구금되면서 정부 기능이 마비됐다.

누구도 차르 정부를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 군용열차를 타고 전선을 향해 가고 있던 니콜라이 2세는 3월 2일(양력 3월 15일) 기차 안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제위를 동생에게 물려주려 했다. 동생 미하일 대공은 제헌회의의 민주적 합의가 있어야 제위를 받을 수 있겠노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형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이다.

1613년 창건된 로마노프 왕조가 자살하다시피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의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성됐고 또 하나의 권력 축인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가 결성돼 명령 제1호를 발표했다. 임시정부가 상층부의 권력기구였다면 ‘노병(勞兵) 소비에트’는 풀뿌리 민중의 권력기구였다. 이 두 기구가 병존하는 이원적 권력체제가 수립됐고 러시아의 2월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2월 혁명, 차르 체제가 붕괴하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열광과 좌절의 유산

10월 혁명 때 러시아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겨울궁 전’(로마노프 왕조의 정궁)을 습격하는 군중.[한정숙 교수]

1917년은 혁명의 해였다. 2월 혁명은 나라 안팎으로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으나 정치 활동의 자유를 허용한 것 외에 실질적 변화는 가져오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당시 최대의 현안인 전쟁과 토지 문제 해결에 무력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성과 없는 전쟁을 계속했는데, 연합국의 압박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차르 정부 최대의 채권국이었던 프랑스는 러시아가 대독전선에서 벗어나는 것을 강력하게 막고 있었다. 또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층이 토지의 전면적 재분배를 원했음에도 임시정부는 이 문제의 해결을 추후에 선거로 구성될 제헌회의에 맡겨두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길 것을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요구가 강력해지자 제국군대 장성 출신인 코르닐로프가 군부 쿠데타를 시도했다.

혁명 자체가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2월 혁명 여덟 달 후 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러시아력 10월 25, 26일(양력 11월 7, 8일)에 일어난 10월 혁명이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이를 통해 집권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됐다. 볼셰비키는 10월 26일에 열린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노동자·농민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을 선포했고, 평화에 관한 포고령으로 무병합·무배상의 즉각적 전쟁 종식을 선언했다. 토지에 관한 포고령으로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농민이 이를 이용하게 하는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인류 최초의 총력전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교전국 중 그 어느 나라도 상대 병력의 궤멸 없이는 전쟁을 끝내지 않으려 하던 상황에서 볼셰비키 정부만이 이 전쟁 자체에 반대했다. 이어 볼셰비키 정부는 민족들의 권리, 8시간 노동제, 교육부 창설, 은행 국유화 등에 관한 무수한 포고령을 내놓고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중 어떤 것은 시민혁명 단계에 속하는 것이었고 어떤 것은 사회주의적 성격을 지녔다.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집권했기에 시민민주주의 단계의 개혁과 사회주의 단계의 개혁을 함께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 정부가 전쟁 종식을 위해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자 격분한 연합국이 간섭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에 러시아 내 반볼셰비키 세력이 일으킨 내전이 맞물리면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8년 여름부터 2년 이상에 걸친 내전을 겪었다. 여기서 승리한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2년 말 소련을 성립시켰다.

세계를 뒤흔든 10월

우리가 한때 북방의 최강자로 여긴 사회주의 종주국은 러시아 혁명의 결과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의 한 중심축이 됐으나 1991년 말, 해체됐다. 일반적으로 소련의 해체는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이자 냉전의 해체를 의미하는 사건으로 여겨진다. 실로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기였던 20세기는 러시아 혁명으로 문을 열고 (20세기 초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의 리허설이라 불리는 1905년 혁명이 일어났다.) 이 혁명으로 성립한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 혁명은 100년에 가까운 전사(前史)를 가진다. 구체제의 두 기둥인 전제정과 농노제를 철폐하려는 시도는 일찍이 1825년의 데카브리스트(12월 봉기자) 봉기로 나타났지만 이는 손쉽게 진압됐고 그 후 러시아 인텔리겐차(지식인)는 기나긴 혁명운동의 역사 속으로 들어섰다. 혁명운동사에서 가장 큰 세력은 인민주의자들이었는데, 그들은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로’를 내세우는 농민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1870년대 말부터 차르 정부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테러 전술을 감행했다. 이들의 활동은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러시아 혁명 운동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마르크스 자신도 이들의 활동에 감명을 받아 이들의 사기를 꺾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했을 정도다.

혁명사상의 융합자 레닌

한편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대변자로서, 테러에 반대하고 파업과 대중의 정치의식 고양을 중시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 가운데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거친 다음에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2단계 혁명론을 폈다. 반면 볼셰비키 지도자인 레닌은 2월 혁명 이후, 트로츠키가 구상한 연속혁명론(영구혁명론)을 받아들여 사회주의로 바로 이행할 수도 있다는 의미의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이어 8월에는 인민주의자들의 농민사회주의적 강령을 수용한 다음, 9월에 발표한 ‘국가와 혁명’에서는 직접행동에 의한 권력 장악론을 더해 10월 혁명을 이끌었다.

이때의 레닌주의는 서구에서 발아한 사상인 마르크스주의와 러시아의 독자적 사회주의인 인민주의를 결합한 것이며, 농민층이 대다수였던 러시아 상황에 맞춰 마르크스주의를 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의 수립은 용이하지 않았다. 레닌은 내전 종식 후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을 채택해 혼합경제를 실험했으나, 레닌 사후 볼셰비키 당내 권력투쟁을 거쳐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내쫓고 집권한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을 종식하고 농업집단화를 강행했다. 이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강제노동수용소를 설립하고 대숙청을 강행했다. 그런 한편 스탈린 집권기에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의 공업화가 이루어졌고 농업국 러시아는 공업국 소련으로 변신했다.

스탈린 체제는 그의 경쟁자였던 트로츠키에 의해 ‘혁명의 배반’으로 불렸고 그 체제의 성격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됐다. 한나 아렌트 이래 전체주의론에서는 스탈린 체제와 히틀러 체제를 동류로 취급한다. 그러나 스탈린 체제에 관한 연구에서는 기능주의적 해석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스탈린, 괴물인가 혁명의 상속자인가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열광과 좌절의 유산

이오시프 스탈린. [동아일보 DB]

일단 스탈린 체제는 생산력주의를 극대화하고 이를 위해 사회 전체를 동원한 체제였다. 차르 정부나 자유주의 정부라면 노동계급의 반발 때문에 강행할 수 없었을 강도 높은 공업화 정책이 노동자 국가를 표방한 소련에서는 노동자의 자발성(이것이 위로부터 유도된 자발성이라 할지라도)을 바탕으로 삼아 실행에 옮겨졌다. 경제사학자 거셴크론은 러시아에선 마르크스주의가 산업화를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스탈린 시대의 공업화에 부합하는 해석이라고 할 만하다.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는 노동력이 부족한 시베리아나 변방지역에서 공업, 토목건설 분야에 초저임 노동력을 확보해주는 수단이기도 했다.

러시아가 산업화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기에 누가 집권을 했건 공업화 정책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은 방향이 아니라 속도와 방법이 문제였다. 스탈린은 과속 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농업집단화를 강행했고 이것이 수많은 파행과 인적, 물적 희생을 낳았다. 속도와 방법의 극단성에는 민주주의에 무지한 스탈린의 개인적 성격이 분명히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스탈린은 히틀러 같은 괴물과는 분명 차원이 다른 인물이지만 혁명의 정신을 왜곡시킨 주인공이었다. 그나마 농업집단화까지는 정책의 문제로 볼 수 있지만 1936~38년의 대숙청은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의 병리적인 성격 탓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러시아 사학계에서 큰 물결을 이룬 수정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스탈린의 대숙청은 소련 사회에서 당·관료·군부, 즉 새로운 집권세력의 세대교체를 위한 작업이었다. 그에 따라 옛 혁명가 대신 혁명 이후에 교육받은 신세대가 전면에 부상하는 메커니즘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역사적 사건의 객관적 기능을 설명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인간적 고통과 희생을 경시한다. 또한 스탈린 시대의 미시사 연구에서는 소련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생존방식을 스스로 확보해갔음을 중시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 스탈린 시기를 거치며 일어난 엄청난 변화는 ‘복수(複數)의 근대화 경로’론을 펴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주의적 근대화’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즉 비서구적 근대화 경로를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 혁명 초기에는 여성·가족 정책을 비롯한 일부 사회정책은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었고,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혁신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소련의 해체는 이런 방식으로 근대화한 사회를 공산당 권력이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하게 된 시점에 이르러 일어난 것이라고 하겠다.

민족 문제와 국제질서 재편성의 계기

러시아는 혁명을 거치면서 옛 러시아제국의 영토를 거의 그대로 지배할 수 있게 됐다.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 등 유럽권 국가는 혁명 직후 독립했지만 러시아는 다른 동슬라브 민족들, 카프카즈 민족들, 중앙아시아의 민족과 타협해 함께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구성했다. 이들을 위해 1920년대에 채택된 소련의 민족정책이었던 토착화 정책은 비(非)러시아계 민족들의 근대적 민족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했다. 이 정책은 중국 공산당 정권의 소수민족 정책을 위한 모본이 됐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민족들 내부에서 민족의식이 강화되면서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소련으로부터의 이탈 움직임이 강화됐고 이것이 소련 해체를 재촉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미국 언론인 존 리드의 표현대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세계를 뒤흔든’ 혁명이었다. 열광과 증오라는 상반된 반응이 이 혁명을 둘러싸고 격돌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었기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지지자와 반대자를 낳았다. 세계 역사에서 진정으로 전 세계적 의미를 가지는 혁명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이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됐듯이 ‘계급 철폐’와 ‘무산대중의 해방’이라는 러시아 혁명의 이념 역시 다른 사회에 파급됐고 반대자들은 이를 막기 위해 부심했다.

러시아 혁명은 국제적으로 심층적인 중요성을 지녔다. 첫째 러시아 혁명으로 반드시 볼셰비키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세력뿐 아니라 민족 해방을 지향하는 세력 전반이 고무됐다.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자였으므로, 트로츠키에 비해 혁명의 전파나 이를 위한 대외적 무력 사용에 소극적이었고 소련 내에서 사회주의 유지를 중시했다. 그럼에도 코민테른을 통해 식민지·반(半)식민지 사회의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지원했고, 반(反)파시즘 세력의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다. 둘째, 서구적 근대화의 길을 따라갈 여건이 되지 못했던 사회의 일부 엘리트에게 소련식 근대화는 대안적 근대화의 길로 여겨졌고 환영받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그 모델을 모방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길을 따른 대표적 사례가 중국 공산당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해 다시 말하기 

러시아 혁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눈앞의 사건인 듯 현실감을 줬다. 그러나 소련이 해체되자 러시아 혁명 또한 의미를 잃은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사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됐다’고만 이야기하면 러시아 혁명과 그 후의 역사는 열광과 좌절의 단순한 서사로 여겨질 수도 있다. 혁명으로 집권한 세력이 70년 이상 계속 집권하다가 그대로 경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은 단일한 과정도 아니고 이를 보는 눈도 단일할 수 없다. 러시아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궁극까지 밀고 가서 이를 완성하고자 했다. 레닌이나 트로츠키는 프랑스 혁명을 늘 염두에 두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프랑스 혁명기 지도자들과 비교하곤 했다. 비록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세력은 점차 계몽과 이성, 인간 해방의 길이 아니라 경직된 관료독재국가의 길로 나아가기는 했지만 러시아 혁명은 단순한 연대기상의 한 점에 머무르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은 현실적 유산과 이념적 유산을 남겼다. 현실적 측면을 살펴보자. 앞에서도 말했듯, 러시아 혁명은 서구적 근대화가 아닌 대안적 근대화의 선택지를 제공한다고 여겨졌다. 유효 기간은 지역마다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들은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이미 이 선택지를 포기했다. 러시아 자체도 혁명 러시아가 추구했던 길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반면 아시아, 아프리카의 일부 국가는 지금도 이 노선을 고수한다. 현재 비서구적 근대화 노선을 대표하는 사회는 중국이다. 21세기에 들어와 러시아와 중국이 맺고 있는 긴밀한 관계는 서구적이지 않은 길을 거쳐 20세기를 지나온 사회들의 동질감에 바탕을 두고 있는 듯하다.

이념적인 면에서 러시아 혁명의 유산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인 만큼 당장 이를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분배의 형평성을 무시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심각한 도전에 부딪히는 지금, 러시아 혁명의 정신은 다시 상기될 수밖에 없다.

러시아 혁명 100주년,  열광과 좌절의 유산
한 정 숙

● 1957년 경북 문경 출생
● 서울대 학사·석사(서양사) 독일 튀빙겐대 박사(러시아사)
● 저서: ‘러시아는 우리에게 무엇인가’(공저), ‘독일통일과 여성’(공저) 등


입력 2017-02-28 13:24:00

한정숙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clioha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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