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틀 동안 초콜릿 바 180개 강제로 먹여
- 성기 만질 때마다 총기번호 복창
- 윤 일병 사망 사건 가해자 軍교도소에서 똑같은 짓
- 독립적 군인권보호관 도입 필요
인권위는 조사관을 A부대로 급파해 기초조사에 착수했다. 군부대에서는 이미 헌병대 수사가 끝나고 군 검찰이 관여하고 있었다. 군부대 관계자는 “특정 병사의 일회성 행위”라며 “절차대로 조치하겠다”고 답변했다. 당시 A부대는 병영악습 재발방지를 위해 ‘100일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인권위는 피해자 어머니에게 기초조사 결과를 설명했다. 어머니는 “군부대 조사를 신뢰할 수 없다”며 인권위가 직접 아들을 만나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인권위 조사관이 직접 아들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아들은 군인 신분으로 장기간 수사를 받아 심신이 지친 상태였다. 인권위는 어머니의 요청에 따라 아들을 설득했고 심리상담 전문가와 함께 4시간 가까이 심층 면접을 진행했다.
L의 피해 진술은 충격적이었다. 부대 내에서 상습적인 폭행과 가혹행위가 벌어졌다는 주장이었다. 또 간부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해병대 특유의 기수문화 때문에 제지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피해자는 인터뷰 도중 “휴가를 나와 병원에 갔더니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의심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들었다”며 괴로워했다.
‘해병대 DNA’의 허상
L에 따르면 선임병 S가 군기 담당이었다. S는 L에게 “내 목표는 네 몸무게를 90㎏까지 찌우는 것”이라며 구토할 때까지 수시로 음식을 먹였다. 날마다 L을 체중계에 올리고 혹시 체중이 줄기라도 하면 주먹을 날렸다. L은 폭행을 피하기 위해 야간 소등 이후에도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 3주 만에 몸무게가 75㎏에서 84㎏까지 늘었다.S는 L의 성기도 수시로 만졌다. 고참이 성기를 건드릴 때마다 L은 총기번호를 복창했다. S는 L에게 다른 병사의 성기를 만지라고 강요한 적도 있다. L이 머뭇거리면 욕설과 폭행이 뒤따랐다. 또 다른 선임병 K도 L의 젖꼭지를 수시로 꼬집어 가슴 부위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L은 A부대에 오래전부터 기수별 인계사항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국방부가 “이제 사라졌다”고 누누이 강조한 소위 계급별 행동제한이었다. ‘이병은 개인 흡연 금지, 일병 3호봉부터 PX 출입, 일병 5호봉부터 기능성 티셔츠 착용’ 등이 그것이다. 선임병은 이런 내용과 주간 식단표 등을 외우게 하고 틀리면 욕설을 퍼부었다. L도 선임병이 시킨 대로 후임병에게 인계사항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폭언을 했다가 5일간 영창에 수용됐다.
인권위는 A부대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피해자 진술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전수조사를 진행했다. A부대 관계자들은 한목소리로 “악기발휘는 S와 L, 둘 사이의 특수한 케이스”라고 말했다. 그러나 S는 물론이고 병사 다수가 A부대 내의 병영악습을 줄줄이 털어놓았다.
‘아주 특별한’ 사건?
무엇보다 S의 진술이 놀라웠다. 자신이 선임에게 당한 것에 비하면 L에게는 아주 약하게 했다는 주장이었다. S는 이미 전역한 사람들이 근무할 때부터 악기발휘는 부대의 전통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도 후임에게 “해병대 왔으면 악기발휘 한번쯤 해보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다는 것이다.실제로 S는 L보다 훨씬 심하게 당했다. 하루 네 번이나 PX에 가서 선임이 사주는 대로 먹었다. 2015년 추석 때는 대통령 특식으로 나온 초콜릿 바를 이틀 동안 180개까지 먹었다. 선임과 오목을 두거나 가위바위보 게임을 해서 선임이 이기면 3~4개씩 먹고 자신이 이기면 그냥 넘어갔다. 그때의 충격으로 초콜릿만 봐도 구토할 지경이라고 했다.
S의 체중은 전입 때 61㎏이었으나 수개월 만에 81㎏까지 늘었다. 살이 갑자기 쪄서 운동장에서 뛰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어느 날 S가 “무릎이 아파서 풋살 경기를 하기 힘들다”고 말하자 선임병은 심한 욕설을 했다. S도 화가 치밀어 “무릎 수술하고 그냥 제대하겠다”고 대들자 선임병은 화장실로 끌고 가 “꼰티냐, XX년”이라고 위협하며 뺨을 때렸다.
성추행 피해도 S가 심했다. 저녁 7시면 선임이 옷을 다 벗고 내무반 바닥에 엎드렸다. S는 선임의 엉덩이에 앉아 온몸에 로션을 발랐다. 선임은 수시로 S의 군복에 손을 넣어 신체 부위를 만지기도 했다. 선임이 샤워장으로 가면 S는 무조건 따라가야 해서 하루 5번까지 선임 곁에서 몸을 씻었다. 가끔 S의 엉덩이에 성기를 대고 유사 성행위를 하는 선임도 있었다. S는 선임의 요구로 용돈을 털어 담배까지 사서 바쳤다.
S는 더 이상 견딜 수 없겠다 싶어 어머니에게 전화로 피해 사실을 알렸다. 놀란 어머니가 헌병대에 신고하겠다고 했으나 S는 “해병대는 절대 찌르는 것이 아니다”라며 말렸다. S는 “내부 고발자로 몰려 ‘왕따’가 되는 게 두려웠다”고 뒤늦게 고백했다.
A부대 사건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S와 L은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신했다. 졸병 때는 피해자였으나 선임이 되면서 어느 순간 가해자로 둔갑했다. 기수문화가 강한 해병대 조직에서 폭력의 대물림은 후임병을 통제하는 손쉬운 수단이었다. 일부 간부는 “가급적 병들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 게 해병대 관행”이라고 말했다. 폭력의 악순환이 여기서 비롯한다.
인권위는 A부대 후속조치에도 주목했다. A부대는 줄곧 “예상 못한 돌발사고”라고 주장했다. 간부들은 해병대의 물을 흐리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발생했다면서 군 기강 해이를 질타하며 ‘해병대 DNA’ 회복을 위해 총검술, 제식훈련, 구보 등을 1주일간 실시했다. 여기엔 가해자는 물론 피해자도 열외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병사들은 “왜 연병장을 뛰었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했다. 부대는 한발 더 나아가 병영악습 척결을 위한 100일 작전을 추진했으나 병사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 부대는 100일 작전 도중 또 다른 비위사건이 터지자 ‘작전 실패’로 보고하고 2차 100일 작전에 돌입했으나 병사들은 이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A부대는 가해자를 다른 소속대로 격리한 뒤 피해자 L을 같은 부대로 인사 발령했다. 이와 관련 A부대 간부는 “L이 요청한 전보”라고 해명했으나, L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설사 L이 원했더라도 피해자와 가해자 분리의 원칙을 벗어난 인사조치였다.
사라지지 않은 병영악습
A부대 조사를 마무리할 무렵 B부대 병사들이 진정을 냈다. 이번에도 해병대였고 핵심은 악기발휘였다. 병사들은 부대 내에서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부를 찾아가 신고했으나 이틀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어 인권위 문을 두드렸다고 밝혔다. B부대 간부들은 “처음 겪는 특이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미 헌병대에서 수사했고 가해 병사가 전역해 사건 기록을 경찰에 이첩했다고 설명했다. 문제의 싹이 사라졌으므로 부대에서 더 이상 책임질 일이 없다는 얘기였다.그러나 악기발휘 가해자로 지목된 J씨는 인권위 조사관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도 신병 때 선임에게 비슷하게 당했으며 후임병들의 주장은 과장됐다는 것이다. 전역을 앞두고 후임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등 기수열외 피해를 당했는데도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피해자들은 J가 초코파이처럼 둥그런 빵이 특식으로 나올 때마다 햄버거 모양으로 서너 개씩 포개어 한 번에 12개 정도를 먹였다고 주장했다. 젓가락으로 김치를 주먹만큼 집어서 강제로 입에 넣거나 끓는 물을 부은 컵라면을 10초 안에 먹게 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B부대는 군부대 내에서 병영악습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헌병대였다. 그럼에도 중간 간부는 악기발휘 피해 신고를 직접 접수하고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상관은 이 문제와 관련 해당 간부를 경고 조치했으나 막상 경고장엔 ‘보고 지연’ 내용이 빠졌다. 문구로만 보면 무엇 때문에 경고를 받았는지 알 수 없는 형태다. B부대는 해마다 1, 2회 설문조사를 통해 병영악습을 확인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설문 항목에 악기발휘가 포함된 것은 2016년 한 번뿐이다. 이마저 단 한 사람도 피해 사실을 적지 않았다. 인권위 조사 결과 악기발휘는 2015년 하반기부터 수개월간 지속되고 있었음에도 B부대는 단 1건도 적발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악기발휘는 일부 해병부대만의 오도된 전통일까. B부대 사건조사가 끝날 무렵 이번엔 육군 모 사단에서 진정이 들어왔다. 군부대 조사 과정에서 군 간부가 병사에게 강제로 떡을 먹이고 아이스크림을 억지로 입에 넣고 에프킬러를 뿌리는 등의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제복 입은 시민’의 권리
인권위는 2015년 국군교도소에 대한 방문조사를 진행했다. 놀랍게도 윤 일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해자가 이번엔 교도소 수용자를 같은 방식으로 괴롭히고 있었다. 구석에 몰아놓고 때리거나 얼굴에 치약 물을 내뱉는 방식까지 윤 일병 사건의 판박이였다. 교도소 근무일지에 해당 거실의 문제 행동이 수차례 기록됐음에도 피해를 예방하지 못했다.
윤 일병 사망 사건 이후 국회는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 넘게 논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군부대 인권문제 해결을 위해 ‘독립적인 군 옴부즈만’이 필요하다는 여야 합의를 이끌어내고, 본회의에서 “군(軍)인권보호관을 인권위에 설치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결의안까지 통과시켰다. 2016년 시행된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이하 기본법) 제42조에 군인권보호관을 두도록 명시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그러나 국방부는 군인권보호관을 군 외부에 설치할 경우 지휘권이 흔들릴 수 있다고 강변한다. 2016년 10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제8차 국제 군 옴부즈만 기구 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정상환 인권위 상임위원은 한국의 군 인권 실태를 소개하고 군 옴부즈만 기구의 독립성을 강조한 연설문을 낭독했다. 회의에 참석한 30여 개국 대표들이 호응했음은 물론이다.
기본법 제10조는 군인도 일반 국민과 동일하게 헌법상 보장된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군인들이 ‘제복 입은 시민’의 권리를 찾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기본법 제38조는 군인에 대한 기본권 교육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A부대와 B부대 조사 과정에서 인권위 등 외부 권리구제기관에 대해 아는 병사는 거의 없었다. 인권 보장 없이 강한 전투력은 불가하다. 군대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게 시급히 변해야 할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