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호

벼랑 끝 崔·朴 게이트

“공직자 지휘·감독 잘못하거나 부정·비리 예방 못해도 탄핵”

〈단독입수〉김기춘이 직접 쓴 ‘대통령 탄핵소추의 의미’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7-02-21 18:2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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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년 전 쓴 ‘사돈 남 말’
    • “내 편, 네 편 가르면 안 돼”
    • “탄핵심판은 유죄 추정 원칙”
    • “직무 태만도 탄핵 사유”
    김기춘(78)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검사, 검찰총장, 장관, 국회의원을 거치면서 56년간 권력의 길목, 중심에서 살아왔다. ‘왕(王)실장’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며 박근혜 정부에서도 권세를 누렸다. 4·19가 나던 1960년 21세 나이로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72년 유신헌법 제정 과정에 참여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눈에 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를 ‘똘똘이’라고 칭했다.

    그의 삶에 찾아온 첫 위기는 1992년 대선 직전 불거진 ‘초원 복국집 사건’. 부산 지역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조장하면서 김영삼 후보 지원을 모의한 게 정주영 후보 측 도청으로 드러났다. ‘법 기술자’로서의 면모가 그를 구했다. 불법 도청에 수사 초점이 맞춰졌다. 헌법재판소가 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대통령선거법 36조가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처벌받지 않았다.

    인생사 새옹지마(人生事 塞翁之馬). 삶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양지가 음지, 음지가 양지 된다. 김 전 실장이 2월 7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비서실장께서는 정말 드물게 사심이 없는 분”(2015년 1월 신년기자회견)이라고 추어올린 그가 오욕(汚辱)의 시절을 맞은 것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권력과 영화는 지속되지 못한다.



    ‘Mr. 법질서’의 탄핵觀

    국정농단 사태가 불거진 후 그에게 ‘법의 지배자’ ‘법꾸라지’(법률과 미꾸라지를 합성한 신조어로 법률 지식을 이용해 미꾸라지처럼 처벌을 피한다는 뜻)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도 인정하는 별명은 ‘미스터 법질서’다. “법을 지켜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서 붙은 별명. Mr. 법질서는 대통령 탄핵에 어떤 자세를 가졌을까. ‘신동아’가 ‘대통령 탄핵소추의 의미’라는 제목이 붙은 그의 저술을 입수했다.  



    김 전 실장 저술은 2008년 ‘서울법대 제16회 동창회’가 1958년 입학한 동창들의 글을 모아 엮은 ‘낙산의 둥지 떠나 반백년’이라는 제목의 시중에 판매하지 않은 문집에 실려 있다. 부제는 ‘서울법대 58학번들의 이야기’다. 동창들이 삶에서 가장 인상 깊은 순간을 글로 옮긴 것이다. 786쪽으로 이뤄진 문집 중 김 전 실장이 쓴 ‘대통령 탄핵소추의 의미’는 8쪽(116~123쪽) 분량이다.

    그는 이 글에서 “검사, 검사장, 검찰총장, 법무장관, 국회의원 등을 거치면서 경험하고 느낀 바가 많지만 대통령 탄핵소추위원으로 헌정 사상 최초로 아마도 최후로 탄핵 심판에 관여한 일이 법률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가장 인상에 남는다”고 적었다.

    그는 2004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소추 때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당연직 탄핵소추위원을 맡았다. 하지만 ‘아마도 최후로’라는 예측은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소추되면서 들어맞지 않았다.

    그는 2004년 탄핵심판에서 자신이 한 변론을 인용하면서 탄핵소추의 의미를 짚었다. “대통령 탄핵은 국회가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강조하면서 “제헌 국회 속기록을 보면 헌법의 기초자들은 대통령의 실정법 위반뿐 아니라 ‘지휘감독 관계’에 있는 공직자에 대한 지휘·감독을 소홀히 한 것과 국정을 불성실하게 수행하는 경우 모두 헌법 위반으로 탄핵 사유가 된다고 설명한다”고 적었다.



    탄핵 사유 폭넓게 해석

    박 대통령과 지휘감독 관계인 그는 문화계 인사를 내 편, 네 편으로 나눠 차별한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기소돼 있다. 박 대통령 변호인단은 “박 대통령이 블랙리스트 작성을 지시한 적이 없다”고 밝혔으나, 그의 논리대로라면 지휘·감독을 소홀히 한 것도 탄핵 사유인 것이다.

    그는 미국 탄핵 제도를 인용하면서 “탄핵 사유는 기소가 가능한 형사적 범죄일 필요는 없고 헌법이 부여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 부패 행위를 한 경우, 공중의 신뢰를 깨뜨리는 경우, 다른 헌법기관을 침해하는 일련의 행위를 한 경우 등 정치적 위반 행위도 탄핵 사유가 된다”고 적었다. 또한 “구체적 헌법이나 법률 조항 위반 행위뿐 아니라 직무를 태만히 하거나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경우에도 탄핵 사유가 된다 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국회가 헌재에 제출한 탄핵소추의결서는 박 대통령이 헌법 원리, 헌법 조항, 구체적 법률을 어겼다는 주장이 담겼고, 박 대통령 대리인단은 이를 반박하고 있으나 김 전 실장은 탄핵 사유를 폭넓게 해석한 것이다.

    1월 5일 대통령 대리인단 소속 이중환 변호사는 탄핵심판 2차 변론에서 “대통령 탄핵심판의 증거조사 절차와 증거채택 등은 철저하게 형사소송 법칙에 따라 진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탄핵심판 주심 강일원 재판관은 “이 재판은 탄핵심판이지 형사재판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대리인단이 엄격한 증거조사를 요구한 것은 탄핵심판 진행을 늦추려는 의도로 분석된다.

    탄핵심판의 절차, 진행에 대한 김 전 실장의 법 해석은 어떨까. 그는 ‘대통령 탄핵소추의 의미’에서 “형사재판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에는 공무원의 직권이 정지되지 않는 데 반해 탄핵심판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이 정지되는 유죄 내지 유책 추정의 원칙을 적용한다”고 썼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 대리인단과 법 해석이 다른 것이다.  



    대통령의 올바른 모습

    그는 이 저술에서 “국민과 헌법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고 썼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헌법을 수호해 줄 것” “권력분립주의에 따라 각 국가기관의 권능을 존중하면서 상호견제와 균형에 충실해 줄 것” “헌법과 법률을 수호하고 준수하는 법치의 상징과 모범이 돼 줄 것” “국민의 행복추구에 최선을 다할 것”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전 국민을 포용하고 통합하는 데 앞장서서 공정하게 국정을 수행할 것”

    박 대통령의 일탈이 탄핵 사안인지는 차치하더라도 대통령으로서 헌법 수호, 권력분립, 국가기관의 권능 존중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법치의 상징과 모범은 더더욱 아니다.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전 국민을 포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9년 전 김 전 실장의 글이 제  발등 찍기로 읽히는 것은 한국 정치의 대결적 지형과도 무관치 않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을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계층 간 갈등을 조장했다. 그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최측근들의 부정과 비리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루됐으며 감독하고 예방해야 할 직무도 유기했다”면서 “미국의 경우는 대통령이 중범죄를 저질러 탄핵 발의된 것이 아니고 부적절한 성적 접촉이나 거짓말 때문에 탄핵이 발의되고 대통령이 사임하기조차 했다”고 썼다.  

    그가 작성을 주도했다고 특별검사가 지목한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국민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른 것이다. 검찰, 특별검사 조사에서 박 대통령의 거짓말이 드러났다. 그와 최순실 씨를 비롯해 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 김종덕·조윤선 전 문화부장관 등이 구속기소됐다. 박 대통령은 이들의 부정과 비리를 예방·감독하지 못했으며 비리와 부정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연루된 혐의를 받는다.

    김 전 실장이 9년 전 저술한 ‘대통령 탄핵소추의 의미’는 사돈 남 말의 전형으로 읽히면서도 대통령의 올바른 모습을 생각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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