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는 내우외환 탓에 중국의 혼란이라는, 세계제국이 될 호기(好機)를 놓친다. 519년 안장왕 즉위 후 내전에 돌입하자 돌궐, 신라, 백제가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탁발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는 선무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다. 선무제는 한화(漢化)의 군주 효문제와 고구려 출신 문소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 북위는 고환(高歡)이 세운 동쪽의 북제(北齊)와 우문태(宇文泰)가 세운 서쪽의 북주(北周)로 분열했다. 국력은 북제(550~577)가 북주(557~581)를 압도했으나 북제는 지도층의 끊임없는 권력 조작 놀음과 잦은 황권 교체로 정치가 늘 불안정했다. 북주는 참요를 퍼뜨려 북제의 혼란을 부추겼다. 북주의 장군 위효관(韋孝寬)이 북제 군부의 중핵 곡률광(斛律光)을 제거하고자 북제 수도 업성(鄴城)에 첩자를 심어 퍼뜨린 참요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백승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명월은 업성을 비추네(百升飛上天 明月照鄴城).’
곡(斛)은 곡식을 계량하는 단위다. 100승(百升)이 1곡(斛)이므로 ‘백승’은 곧 곡률광을 뜻한다. 또한 ‘명월(明月)’이 곡률광의 자(字)였으니, 곡률광이 북제 황제 고위를 대체하리라는 암시를 참요에 담은 것이다. 무능과 음학(淫虐)의 군주 고위는 결국 이 참요에 의해 쓰러졌다. 고위는 576년 곡률광 일족을 살해했다. 자신의 팔다리를 스스로 자른 것이다. 곡률광을 죽인 다음 해인 577년 고위는 북주 무제 우문옹이 보낸 군대에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신라의 군사제도 당(幢)
오르도스(河套)를 포함한 내몽골 거주 부족이 남하해 중원으로 이주하고, 그 빈자리를 몽골고원에 거주하는 부족이 채우는 현상은 흉노→선비→유연→돌궐→위구르→키르기스→몽골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된다.4세기 말 탁발선비가 국가의 중심을 화북(華北)으로 옮기자 몽골고원은 권력의 진공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등장한 국가가 혼혈선비족의 유연(柔然)이다. 유연은 유연족을 중심으로 흉노 발야계족, 고차 부복라족과 돌궐 아사나족 등이 결합된 다(多)종족 연합국가였다. 유연은 4월 축제 전통을 가진 탁발선비와는 달리 10월 제천 행사를 거행했다. 영토는 동으로는 랴오허, 서로는 중앙아시아 이르티슈 강에 이르렀다. 유연의 지배층은 투르크-몽골계로 보이나 구성원 대다수는 인도-유럽계 토하르인(Tocharian)으로 추정된다.
유연의 최고지도자는 투르크 계통이 사용한 ‘선우’가 아니라 몽골 계통의 ‘한(汗)’ 칭호를 썼다. 유연의 군사 체제는 100명을 1당(幢)으로 편성하는 당(幢) 제도였다. 10당을 1군(軍)으로 편성하고 군에는 장(將)을 뒀다. 유연의 십진법적 군사편제는 몽골제국까지 계승된다. 신라도 군사제도로 당(幢), 관직으로 각간(角干)을 뒀다. 신라는 진흥왕(534~576) 시기 대당(大幢)을 편성했으며, 삼국통일 이후에는 고구려인 백제인 말갈인 등을 포함한 9서당(誓幢)을 운영했다.
북위는 초기엔 유연에 방어적 정책을 구사하다가 본거지를 공략하는 등 공격적 정책으로 전환했다. 북위가 끊임없이 유연 원정에 나선 이유는 물자 공급을 차단해 유연이 강대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북위의 대(對)유연 정책은 강남의 왕조들 및 고구려에 대한 정책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돌궐, 유연을 무너뜨리다
북위는 유연 서쪽의 오손(烏孫), 고차(高車)와 동맹을 맺었다. 고구려 동북쪽의 물길(勿吉)과도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유연은 이렇듯 동서로 포위된 상황에서도 북위에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유연에 대한 북위의 공격적 정책은 실패로 끝났다. 강남의 왕조들과 동쪽의 고구려가 북위를 노리던 터라 유연 토벌에만 전력을 다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유연을 멸망시킨 것은 북위가 아니라 돌궐(突厥)이었다. 돌궐은 철기 제작에 능한 부족이었다. 돌궐은 유연에 속했으면서도 독자성을 유지하다가 유연을 무너뜨렸다.
311년 ‘영가의 난’ 이후 남흉노에 중원(화북)을 빼앗긴 한족 일부는 창장 하류 양주(揚州)와 중류 형주(荊州) 방면으로 남하했다. 남하한 인구는 당시 화북 전체 인구의 약 8분의 1로 90만여 명에 달했다.
낭야 왕씨와 진군 사씨 등 교인(僑人·타향에서 임시로 머무는 사람)들이 주씨(朱氏), 육씨(陸氏), 고씨(顧氏) 등 강남 토착호족과 함께 사마씨를 지원해 동진(東晉)을 세웠다. 이들은 동진을 계승한 송-제-양-진 시대에도 중심 세력으로 남았다.
이 같은 강남의 역대 왕조들은 황무지 개간에 몰두했다. 한족의 황무지 개간으로 인해 쫓겨난 산월(山越), 파(巴), 요(獠) 등 원주민은 끊임없이 난을 일으켰으며, 일부는 한족에 동화됐다. 강남 마지막 왕조 진(陳)의 건국은 토호와 장군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의 원류는 강남의 원주민이다. ‘귀거래사’의 시인 도연명의 증조부로 동진에서 군사령관 격인 태위(太尉)를 지낸 도간(陶侃) 역시 원주민인 무릉만 출신.
사마씨의 동진(東晉)은 전진(前秦) 부견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한문명(漢文明)을 유지·발전시키는 구실을 한 다음 유유(劉裕·363~422)가 세운 송(宋)에 역사의 자리를 넘겨줬다. 동진 북부군(北府軍) 출신 유유는 410년 모용선비족 모용덕이 산둥의 광고를 중심으로 세운 남연(南燕), 413년 한족 초종이 사천에 세운 촉(蜀), 417년 강족 요장이 장안을 중심으로 세운 후진(後秦)을 멸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바탕으로 420년 동진을 찬탈했다.
선비족의 북방, 한족의 남방
송은 서한(西漢) 재상 소하의 자손으로 알려진 소도성의 제(齊)에, 제는 동족 소연(蕭衍)의 양(梁)에 멸망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송, 제, 양 왕조에는 송나라 문제와 양나라 무제 등 영명한 황제도 있기는 했지만, 도를 넘은 음란(淫亂)과 골육상쟁 등 문제를 일으킨 지도자가 많았다.양나라 무제는 초반 치세가 대단히 좋았으나 후반기로 가면서 퇴락했다. 빈부격차가 지나치게 커지면서 황족과 귀족에게 적개심을 품은 백성이 늘어갔다. 북제의 전신인 동위(東魏) 실권자 고징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고징이 보낸 모용소종(慕容紹宗)에게 패한 끝에 양나라로 망명한 후경이 무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수도 건강 부근에서만 10여만 명이 동조할 정도였다.
소씨(蕭氏) 황족이 서로를 견제하는 틈을 타 건강성을 함락한 후경은 무제를 유폐했다. 후경은 한(漢)을 세웠으나 광둥에서 봉기한 진패선에게 멸망당했다. 진패선은 557년 자신이 옹립한 경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진(陳)을 세웠다.
大혼란의 끝이 보이다
화북을 통일한 탁발선비는 지배 민족인 선비족과 피지배 민족인 한족 간 갈등을 해소해야 했다. 북연(北燕) 출신 풍태후(馮太后)의 지원을 받아 즉위한 효문제 탁발굉은 정치체제의 안정을 위해 선비족의 한화(漢化)를 추진했다.
효문제는 493년 풍태후의 간섭도 피할 겸 수도를 산시성 북부 평성(다퉁)에서 뤄양으로 옮겼다. 그는 조정에서 선비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호·한 모든 가문의 격을 정하는 성족상정(姓族詳定) 조치를 취했다. 황족의 성 ‘탁발’도 한족 식(式)인 ‘원(元)’으로 바꾸었다.
효문제의 한화 정책은 탁발선비가 비극의 운명을 맞는 것으로 끝났다. 뤄양으로 수도를 옮긴 지 2년 만인 495년 선비족 귀족 목태의 반란이 일어났다. 524년에는 북위 최초의 근거지인 내몽골 성락(후오하오터)에 위치한 옥야진(沃野鎭) 소속 병사 파락한발릉의 주동으로 이른바 ‘육진의 난’이 일어났다. 육진은 내몽골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옥야진, 무천진(武川鎭), 회삭진(懷朔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회황진(懷荒鎭)을 말한다.
육진의 진민(鎭民)은 원래 ①직업으로는 군인 ②사회적으로는 귀족 ③종족적으로는 선비라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진민은 낙양 천도 30년이 지난 후 북위 조정으로부터 버림받아 천민화됐다. 병참 중심선이 북부 내몽골 전선에서 남부 화이허(淮河) 전선으로 전환되면서 이들에 대한 처우가 나날이 나빠졌다.
진민의 반란이 육진 전체로 확산돼 북위 전역이 혼란에 빠졌다. 한족을 어떻게 통치할지를 두고 일어난 내부 갈등은 탁발선비가 세운 제국(북위)의 분열이라는 역류를 부르며, 화북을 혼란으로 몰고 갔으나 이 혼란은 새 공동체인 호한체제(胡漢體制)로의 전환 과정이었으며, 1월호에 소개한 ‘영가의 난’과 같은 아수라장은 아니었다.
고구려의 실기
육진 반란군은 산시의 이주흉노(爾朱匈奴) 수장 이주영(爾朱榮)이 이끄는 북위 관군과 북위군을 지원한 유연군에 패배했다. 519~559년 40년 동안 화북에서는 북위 황실 금군의 난(519), 육진의 난(524), 막절염생의 난(527), 갈영의 난과 하음학살(528), 동·서위 분열(535), 북주·북제 간 전쟁 등 극도의 혼란이 되풀이됐다.
중국의 혼란이라는 호기(好機)에 고구려가 랴오시와 허베이(유주와 기주) 지역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은 고구려 또한 안장왕-안원왕-양원왕 시대(519~559)의 혼란기였기 때문이다. 이 시기 고구려가 화북 정세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의 결과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이다.
회삭진 출신으로 한때 하륙혼(賀六渾)으로 불린 고환(496~547)은 처음에는 이주영을 받들었으나 곧 허베이의 중심 업성에서 자립하고, 관둥(허베이, 산둥 지방을 의미)의 한족 호족들과 연합하는 데 성공했다. 하음학살(이주영이 북위의 실력자 호태후와 한족 대신 등을 황하에 수장시킨 사건) 이후 한족 호족 모두 이주씨에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고환은 531년 군사기지 진양으로부터 추격해 온 이주조의 군대를 업성 근교에서 격파한 후 업성에 승상부를 설치했으며, 효무제를 원수(元脩)로 추대했다. 고환과 사이가 나빠진 원수는 535년 장안의 우문태에게 도망쳤다. 고환은 원수를 추격했으나 잡지 못하자 원선견(효정제)을 옹립했다. 이로써 동위(535~550)가 성립됐다. 우문태는 원수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독살하고, 원보거를 옹립해 서위(535~556)를 세웠다. 동·서위는 각기 북제와 북주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쾌도난마(快刀亂麻)의 주인공인 고양이 동위를 빼앗아 세운 북제는 선비족과 한족, 돌궐족 등이 뒤섞인 나라였다. 곡률씨(斛律氏)는 북제 군부에 크나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곡률광의 아버지 대장군 곡률금(斛律金)이 한어(漢語)로 번역한 돌궐 노래 ‘칙륵가(勅勒歌)’를 소개한다.
勅勒川 陰山下 (돌궐강 음산 아래)
天似穹廬 籠蓋四野 (하늘은 마치 천막처럼 사방의 들판을 덮고)
天蒼蒼 野茫茫 (하늘은 짙푸르고 들판은 가없이 넓네)
風吹草低 見牛羊 (바람 불어 풀이 눕는데, 아아 멀리 소떼, 양떼가 보이네)
세계제국 唐의 뿌리
북위의 실력자 이주영은 산시(관중) 반란 진압을 위해 일족 이주천광을 파견했는데, 무천진 출신 하발악(賀拔岳)이 이주천광의 부장으로 산시에 부임했다. 북주를 세우는 우문태(505~556)를 비롯한 무천진 출신 장교들은 대부분 하발악을 따라 종군했다. 하발악이 고환의 사주를 받은 후막진열(侯莫陳悅)에게 암살당한 후 동료 장군들의 추대를 받은 우문태는 스스로 새 질서를 만들어내기로 결심했다.우문태는 위무제(魏武帝) 조조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그가 태동시킨 호한체제(胡漢體制)가 세계제국 당(唐)을 탄생시키고, 중국 문화의 동아시아화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서위의 실권을 장악한 우문태는 소작 등 한족 유학자를 등용해 행정제도를 일신했다. 우문태는 543년 동위군과의 뤄양 북망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동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선비족 병력을 보충하려면 한족 장정을 징집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8주국(柱國) 12대장군(大將軍) 아래에 의동부(儀同府)를 두어 한족 장정 징집을 담당하게 했다. 선비족 고급장교들이 한족 하급장교와 병사를 지휘하는 체제였다.
돌궐, 모술로 진출하다
우문태는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부제를 만들었다. 이 6부제는 한국과 베트남 등 동아시아 국가에 전파돼 1300년 넘게 지속됐다. 우문태는 선비족 성씨 회복 조치도 시행했다. 한족성(漢族姓)을 원래의 선비성(鮮卑姓)으로 환원한 것이다. 우문태는 이 같은 조치를 통해 관중의 사회 질서를 개편해 우문씨에 충성하는 귀족집단을 만들어냈다.
우문태는 군사 측면에서도 뛰어났다. 병력이 상대적으로 작은 군대를 갖고 동위의 공세를 잘 막아냈다. 강남의 양(梁)으로부터 파촉과 한수(漢水) 북부 상양(襄陽)을 빼앗았으며, 괴뢰국 후량(後梁)을 세우는 등 서위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우문태는 534년 북제와 유연의 침략을 방비하고자 돌궐의 수장 부민(土門) 가한과 제휴했으며 유연은 아나궤 가한과 그의 삼촌 바라문의 충돌로 크게 약화됐다. 550년경 서위-돌궐 연합군이 유연군을 격파했으며 아나궤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나라를 잃은 2만여 유연인은 6세기 중엽 아랄해와 카스피해를 거쳐 남러시아 평원으로 진출해 이란계, 투르크계 부족을 규합해 아바르(Avar)를 세웠다. 아바르는 코카서스로 진출했으며 게르만계와 슬라브계 부족을 통합해 다민족 연합국가로 재탄생했다. 아바르는 592년, 619년, 626년 3차례에 걸쳐 단독 또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다. 아바르의 전성기는 592년 바얀 가한이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후 남진해 콘스탄티노플 입구에 진입했을 때다.
564년 서위를 계승한 북주는 돌궐과 함께 동위를 계승한 북제를 공격해 군사 요충지 진양을 약탈했다. 부민의 아들 무한(木汗) 가한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연합해 타지키스탄 바다흐샨 고원의 에프탈(백훈)을 멸망시키는 등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했다. 무한 시대에 돌궐은 랴오허~아랄해를 영토로 하는 유라시아 최강국이 됐다. 572년 거행된 무한의 장례식에는 북주, 북제, 티베트, 비잔틴, 아바르, 거란, 고구려 등 동·서 여러 나라 사절이 조문했다. 무한의 뒤를 이은 타파르(他鉢) 가한이 북제와 북주를 ‘효성스러운 두 아들’이라고 칭할 만큼 돌궐은 전성기를 이어갔다.
닮은꼴 우문호, 시진핑
돌궐은 타파르 가한 이후 동족상잔 끝에 582년 톈산을 경계로 동·서로 분열했다. 서돌궐 일부는 서천(西遷)해 7세기 볼가 강 유역을 중심으로 유대교를 국교로 하는 하자르(Khazar)를 세웠다. 하자르는 사라센 제국의 북진을 저지해 기독교 세계를 지켜냈다. 652년 하자르군이 카스피 해 연안 다르반드 전투에서 사라센군을 격파했으며 722~737년에는 하자르 기병대가 다르반드 관문을 돌파해 사라센 영토로 쳐들어가 모술(이라크 북부)과 디야르바키르(터키 남동부)까지 진격했다.우문태의 조카 우문호는 우문태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지 2개월 후인 557년 서위 공제(恭帝)가 우문태의 아들이자 사촌동생인 우문각에게 선위하게 해 북주를 개국했다. 우문호는 16년간 집권하면서 1대 우문각, 2대 우문육 등의 황제를 세운 동시에 폐살(廢殺)한 제1의 권력자였다.
우문호는 572년 무제 우문옹에게 제거당할 때까지 독고신, 을불귀, 보륙여충(수나라 문제 양견의 아버지) 등 숙장(宿將·늙고 공로가 많은 장수)을 살해하는 등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우문태가 구축한 집단지도체제로는 국가의 지속적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권력 집중을 시도하는 이유도 우문호의 전례와 비슷하다. 미국, 일본과의 대결에서 중국이 힘을 발휘하려면 권력집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이다.
우문호는 돌궐과 연합해 북제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우문옹은 이를 기회로 삼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우문호를 살해하고 친정을 시작했다. 576년 우문옹이 지휘하는 북주군이 요충지 진양으로 쳐들어갔다. 북제 황제 고위는 총비(寵妃) 풍소련을 옆에 끼고 독전했으나 진양은 함락됐다. 북주가 퍼뜨린 참요에 속아 곡률광 일족을 살해한 후과였다.
나제 동맹의 한강 진출
고위는 패배한 군대를 버려두고 타이항(太行)산맥을 넘어 업성으로 도주했으나 생포돼 처형당했다. 북제 유성(다링허 유역 소재) 성주 고보녕은 나라가 멸망했는데도 투항을 거부했다. 북주군이 고보녕의 군대를 공격했으나 랴오시(遼西) 배산 전투에서 고보녕을 지원한 온달의 고구려군에 패퇴했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은 당시 고구려에 복속된 지 얼마 안 된 유목부족 출신으로 파악된다.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유연이 돌궐에 밀려 약화하면서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랴오허-시라무렌 강 방면)에 긴장이 고조됐다. 고구려의 내정 혼란이 이어졌으며 돌궐의 동진으로 인해 고구려의 군사력이 서북방에 집중된 틈을 타 신라는 낙동강 우안의 가야를 공격하고 난 다음 백제와 함께 고구려 영토이던 한강 유역을 점령했다.
신라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가야 유민을 충주와 단양 등 남한강 유역으로 사민(徙民·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의 주거지를 강제로 옮기는 것)시켜 전투 및 보급 부대로 이용했다. 진흥왕은 김거칠부(金居柒夫)에게 군사를 줘 동해안을 따라 북진해 함경도 원산과 함흥, 흥남 일대 고구려의 10여 개 군을 빼앗았으며, 568년 개마고원으로 넘어가는 황초령과 마운령에 척경비(拓境碑)를 세웠다.
고구려는 519년 안장왕 즉위 이후 국내성, 평양성 세력 간 갈등이 격화돼 내전에 돌입했으며 돌궐과 신라, 백제는 고구려의 국경을 호시탐탐 노렸다. 531년 안장왕이 시해되고 그의 아우 안원왕이 즉위했다. 안원왕도 545년 벌어진 추군(麤君), 세군(細君) 세력 간 왕권쟁탈전 와중에 살해됐다. 왕권쟁탈전에서 승리한 추군 세력은 양원왕을 즉위시키고, 세군 세력 2000여 명을 처형했다. 양원왕 시대에도 고구려는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북제 문선제 고양은 552년 양원왕에게 사신을 보내 전쟁 때 고구려로 흘러들어간 유연계(柔然係) 주민을 송환하라고 압박했는데, 양원왕은 저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유연인 5000여 명을 돌려줬다. 고구려는 553년 신라, 백제 간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와 백제가 서로 싸우는 틈을 이용해 주력을 서부 국경에 집중하면서 돌궐의 침공에 대응했다. 관산성 전투 2년 전인 551년 양원왕은 장군 고흘(高紇)을 파견해 시라무렌 강 유역으로 침공한 돌궐군을 물리치고 1000여 명을 참수했으나 이후 돌궐은 더욱 강성해져 555년경 거란을 포함한 시라무렌 강 유역 유목 부족 모두를 합병했다.
백범흠
● 1962년 경북 예천 출생
●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정치학박사
● 駐중국대사관 총영사
● 現 駐프랑크푸르트총영사관 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