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시절 반 전 총장은 언론의 질문 공세를 잘 빠져나간다는 뜻에서 ‘기름장어’라고 불렸는데, 정치권의 검증 공세는 그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가짜 뉴스(Fake News)’라는 표현을 사용한 데서 보듯, 20일간의 뉴스를 되돌아보면 정치적 검증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있다.
귀국 직후부터 그를 둘러싼 부정적 뉴스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 눈에 띈다. 귀국 첫날인 1월 12일, 서민 행보로 공항철도를 이용하려는 시도는 발권기에 1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한꺼번에 넣으려는 모습이 포착되면서 일그러졌다. 또 편의점에서 프랑스산 생수를 고르다 보좌진이 국산 생수로 교체해주는 장면도 본의 아니게 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3부 요인급 의전을 요구했지만 인천공항공사 측으로부터 거절당했다는 소식도 전해져 첫날부터 톡톡히 스타일을 구겼다.
이후 본격적인 정치 행보에 나서면서 구설도 잦아졌다. 1월 13일 국립서울현충원을 방문했을 때는 방명록에 준비한 쪽지를 베껴 쓰는 장면이 ‘수첩 공주’를 연상시킨다는 힐난을 들었다. 이튿날 고향인 충북 음성에서 치른 두 차례 행사는 정치 초년생의 어설픈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사회복지시설인 꽃동네에선 병상 노인에게 미음을 떠먹여 드리며 정작 자신이 턱받이를 한 모습이 웃음거리가 됐고, 농촌 마을에선 혼자 방역복으로 무장한 채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방역 활동을 시연하는 모습이 작위적이란 평을 들었다.
이런 자잘한 매에 독이 잔뜩 올랐던지 1월 18일 대구를 찾았을 때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한일 위안부 합의를 환영한다는 발언을 기자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데 대해 “나쁜 놈들”이라는 욕을 내뱉고 만 것이다.
美 대선의 학습효과
여기까지는 없던 사실을 만든 게 아니므로 검증의 일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퇴주잔 논란’은 다르다. 인터넷에선 그가 선영 성묘 후 퇴주잔을 곧장 들이켜는 동영상이 떠돌았는데, 이는 원본 동영상과 대조할 때 음복 장면을 악의적으로 편집한 것이다. 더 심한 것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반 전 총장의 대선 도전이 유엔 협약 위반이라고 지적했다”는 가짜 뉴스다. 이는 지난해 말 다음 아고라에 처음 올라온 후 정청래 전 의원이 트위터에 퍼 나르면서 더 큰 논란을 불렀다. 여기서는 유력 대선주자의 출마를 봉쇄하려는 정치공작 혐의마저 보인다. 만일 이런 것들이 불출마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면, 이는 반 전 총장 개인뿐 아니라 그의 지지자들에게도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용인하는 서구 사회에서도 최근엔 가짜 뉴스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추세다. 독일에선 9월 총선을 앞두고 페이스북이 가짜 뉴스를 24시간 내에 처리하지 않으면 최고 5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이는 지난해 미국 대선으로 인한 학습효과로 보인다.
지난해 미국 유권자들이 대선 뉴스를 얻은 경로를 보면, 폭스뉴스(19%)와 CNN(13%) 같은 전통적 미디어에 이어 페이스북(8%)이 3위를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페이스북에서 유통되는 뉴스의 질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주류 언론의 기사가 1200만 번 유통됐는데, 투표 3개월 전부터는 730만 번으로 줄었다. 반대로 가짜 뉴스는 연초 300만 번에서 투표일 직전 870만 번으로 늘었다. 이 때문에 페이스북은 ‘페이크북’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영국 ‘가디언’은 미국 대선에서 가짜 뉴스가 민주당에 더 큰 타격을 가했다며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 이유를 거기서 찾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는 가짜 뉴스는 페이스북을 통해 무려 96만 건이나 전파됐고, 이를 포함한 상위 5건이 모두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에 불리한 뉴스였다. 1월 15~18일 폭스뉴스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84%가 가짜 뉴스가 나라를 망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가짜 뉴스의 선진국
한국은 몇 가지 이유로 가짜 뉴스의 선진국이다. 우선은 발달한 정보기술(IT)을 꼽을 수 있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 광우병 사태, 천안함 사건,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당대 첨단의 이기(利器)를 타고 퍼진 가짜 뉴스 사례는 수없이 많다. 현재는 가짜 뉴스를 손쉽게 제작하는 ‘데일리파닥’ ‘짤방제조기’ ‘짤방늬우스’ 같은 앱도 개발됐다. 가짜 뉴스가 사회에 미치는 심각성에 비해 생산자들은 놀이로 인식하는 경향이 눈에 띈다.정치적 후진성은 가짜 뉴스가 창궐하는 또 다른 이유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엔 정부가 공안사건과 관련한 가짜 뉴스의 생산자 노릇을 했다. 1997년 정권 교체 때까지 보수 정당은 ‘북풍(北風)’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다. 민주화 이후엔 쌍방이 가짜 뉴스를 선거 수단의 하나로 인식하는 문화가 정착됐다. 2002년 대선에선 야권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가 당락을 가르는 결정적 변수가 됐다. 의혹을 제기한 인물은 선거 후 허위사실 유포로 실형을 살았지만, 선거 결과를 되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 정치의 독특한 ‘빠(열정적 추종자)’와 ‘까(강력한 비토그룹)’ 문화 역시 가짜 뉴스가 자라는 토양이다. 가짜 뉴스는 트위터와 같은 개방형 네트워크에선 곧바로 소멸하지만 폐쇄적 네트워크에선 급속히 전파되는 특성을 보인다.
최근 탄핵 반대 진영에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세계경제에 끼칠 악영향을 우려해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반대한다고 CNN이 보도했다” “영국 BBC가 ‘한국 촛불집회는 선동당한 국민들이 만든 최악의 결과’라고 보도했다” “영국 일본 정치학자, 한국 비정상적 탄핵운동 비판” 등의 가짜 뉴스가 퍼졌다. 반면 탄핵 찬성 진영에선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누가 여성 대통령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돌려 한국을 보라’고 유세 중 말했다”는 가짜 뉴스가 퍼졌다.
옥스퍼드사전편찬위원회는 ‘2016년 올해의 단어’로 ‘탈(脫)진실(post-truth)’을 정했다. 어쩌면 단 한 번도 진실이 지배한 적이 없는 한국 정치야말로 가장 선진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재의 탄핵 정국도 쌍방이 믿고 싶은 뉴스만 선택한다는 점에서 헌법재판소의 심판 결과가 어느 쪽으로 나건 국가적 분열은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