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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획정에서 남북정상회담까지⑥

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 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jookdang37@naver.com

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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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은 남한 사회를 좌우로 갈라놓았다. 애초 반탁을 천명했던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사주를 받고 찬탁으로 돌아선 후 남한 사회는 좌우익의 극렬한 충돌로 대혼란에 빠졌다. 중도 성향 좌우익 지도자들의 통합 노력은 물거품이 됐고, 좌와 우, 남한과 북한은 각자의 길로 들어섰다.
찬탁·반탁 좌우분열에 자주통일은 멀어지고

1946년 10월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대구폭동의 참혹한 현장.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그날이 오면’·심훈)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동포여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해방가’·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1945년 8월 민족의 염원인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국제 정치는 냉혹했다. 우리 민족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 대가는 기막힌 분단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뒷거래로 광복의 환희는 38선 분단의 비극으로 탈바꿈했다. 피와 땀의 독립투쟁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광복군의 국내 진주를 추진하던 백범이 일제의 항복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아픔을 느꼈다”고 통탄하며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 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은 조선공산당(조공)은 1925년 4월17일 서울 아서원에서 김재봉을 비롯한 당원 19명이 창립대회를 열었다. 김일성의 공산주의가 아닌 정통 공산당이 조직돼 활동했는데, 그 명분은, 임정 산파역이었던 동아일보 논설위원 조동호가 주장한 것처럼 ‘오직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의 수단과 방편으로 공산당식 전위적인 항일투쟁을 펼친다는 취지였다.

이 시기 일제는 치안유지법을 제정해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한편 공산당의 조직 활동도 억압했다. 그 탓에 조선공산당은 3년 뒤인 1928년에 해체됐다. 그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족계열 운동가와 힘을 합친다고 하면서도 1920년대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뒤로는 민족계의 활동을 방해하고 규탄했다.

조선공산당은 조만식의 민족실력 양성운동이나 김성수의 민립대학 설립운동도 방해함으로써 민족진영의 발목을 잡았다. 신간회나 근우회가 좌우합작투쟁을 전개했으나 주도권을 잡지 못한 좌익계의 책동으로 얼마 못 가 해산되기도 했다. 그후 두 차례 발생한 학생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박헌영, 찬탁으로 돌아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사(史) 중 중경 시기(1940~45)에도 좌우익 갈등은 있었다. 그러나 백범 주석 등 일부 국무위원의 노력으로 좌우합작의 연립내각이 성립됐다. 좌파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광복군으로 흡수·통합됐다. 김원봉은 임정의 군무부장을 지냈다.

광복 정국에서 선결 과제는 국내의 질서 확립과 민족 통일, 친일 잔재 청산 등이었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좌우익 인사들은 마땅히 힘을 합해 미소가 그은 38선을 철폐하고 통일을 앞당기는 데 진력해야 했다. 그러나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이 일제의 조기 항복 선언으로 무산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잃었고,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지한 우익과 좌익으로 분열됐다.

일제 강점기 내내 대립한 좌우익은 광복 정국에서 다시 분열함으로써 미소의 개입을 불러왔다. 아무리 미소가 강대국이라도 좌우익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요즘 북한 핵 폐기 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도 그 연장선에서 생각해볼 일이다.

미군정은 좌익이 더 많이 가담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좌파의 조선공산당은 물론 중경 임시정부도 인정하지 않았다. 민족주의 우파인 송진우 김성수 등은 임정을 지지하고 인공을 반대하면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해 미군정에 협조했다. 그에 따라 군정에 한민당 계열의 인물이 다수 참여했다. 해외인사 중 가장 먼저 귀국한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결성하고 통일국가 결성을 촉구했으며 환국한 김구는 한국독립당(한독당)을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중도 우파의 안재홍은 국민당을, 중도 좌파의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조직하고 좌우익 합작을 실현하려 했다.

한편 카이로회담을 비롯한 여러 국제회담에서 한국 문제가 논의됐으나 각국의 예민한 이해관계만 처리됐을 뿐 한국의 완전 독립을 위한 돌파구는 막힌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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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희 성신여대 명예교수·한국근현대사 jookdang3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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