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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

망주봉에서 전설의 고려왕릉을 찾다

王氣 서린 권력의 섬 선유도

  •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망주봉에서 전설의 고려왕릉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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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900년 전 서긍이 묘사한 두 봉우리는 현재 망주봉의 모습 그대로다. 서긍이 배에서 내렸던 곳은 필자가 서 있는 선유3구 선착장 부근이었을 것이다. 함께 유람선을 타고 온 선유도 관광객들은 두 개의 암봉(巖峰)이 절벽처럼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진안 마이산의 쌍봉(雙峰)을 빼어다놓은 듯이 닮았다고들 말했다. 또 이곳에서 만난 마을 주민 윤연수 씨는 “서울 수방사에서 군복무를 하면서 망주봉의 두 봉우리가 서울의 인왕산과 북악산을 너무나 닮아 놀라웠고 덕분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유도의 망주봉이 조선 건국의 창업 염원이 담긴 마이산이나 조선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 일대에 비유돼 표현된다는 것은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사람은 알게 모르게 산 기운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망주봉에는 천년 도읍을 건설할 왕을 기다린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김중규 계장은 군산의 역사와 전설을 채록한 ‘군산역사이야기’에서 “선유도 망주봉은 천년 도읍을 이루기 위해 왕이 되실 분이 북쪽에서 선유도로 온다는 말에 젊은 부부가 나란히 서서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기다리다 지쳐 굳어져서 만들어졌다”는 전설을 수록했다. 즉, 망주봉은 위대한 지도자를 기다리던 당시 민중의 소망이 깃든 곳이라는 뜻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선유도 일대가 뭍으로 변한 뒤 망주봉을 중심으로 천년왕국의 궁궐이 들어선다는 ‘정감록’의 예언이 이곳 사람들에겐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새 궁궐의 서문(西門)은 관리도 쇠코바우가 되고, 북문(北門)은 방축도 구녕바위가, 동문(東門)은 선유도 북쪽 나매기(남악리)의 금도치굴이, 남문(南門)은 신시도의 구녕바위가 된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풍수적으로 살펴봐도 망주봉을 중심으로 이 일대는 원형으로 거대한 에너지장(場)이 펼쳐져 있다. 망주봉 아래에서 불거져 나오는 지기(地氣)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기(天氣)와 교합하고, 거기에 바다 쪽에서 온 수정(水精)의 기운이 가세해 엄청난 토션 필드(Torsion Field·에너지가 원형으로 회전하는 형상)를 형성하는 국세다. 특히 천기의 경우 오행으로 금(金)의 기운이 굳세 강한 권력의지를 북돋우는 기상이다. 그 기운이 너무 강해 일반인이 거주하기엔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풍수적 기운으로 치자면 능히 한 나라를 통치할 만하다.

고려 오룡묘와 숭산행궁



필자 일행은 망주봉을 바라보면서 서긍이 발길을 옮겨가며 묘사한 대로 움직여보았다. 바닷가의 군산정 및 10여 채의 관아(현재 망실됨)가 있었던 곳으로 유추되는 지점을 지나 서쪽의 가까운 산기슭에 오르니 진짜로 오룡묘(五龍廟·군산시 향토문화유산 제19호)가 존재한다. 서긍의 ‘고려도경’은 오룡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군산도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에 있다. 옛날에는 몇 걸음 뒤로 작은 집이 있었다. 지금은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이 있다. 정면으로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서긍이 방문할 당시엔 오룡묘가 한 채만 남아 있다고 했는데, 현재의 오룡묘는 두 채의 당집이 앞뒤로 서 있는 형태다. 오룡묘를 소개하는 입간판엔 “이곳에는 두 채의 작은 당집이 지붕을 맞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섬 주민들은 앞의 당집을 오룡묘 혹은 아랫당이라고 부르고 뒤쪽의 당집을 윗당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섯 용(신)의 존재를 이곳 사람들은 최씨부인, 명두아씨, 수문장, 성주, 오구유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앞의 토속신은 해안가 무속신앙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름이지만 ‘오구유왕’만은 전혀 낯선 존재다.

서긍은 또한 서남쪽 작은 수풀에 숭산신을 모신 사당인 ‘별묘’가 있다고 했다. 하필이면 고려 수도 개경의 주산인 숭산(송악산)의 이름을 그대로 따오고 숭산의 산신(山神)을 이곳으로 모신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고려 왕실에서 이 망주봉 일대를 숭산에 비유할 정도로 매우 신성하게 여겼고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이는 숭산행궁의 존재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얼마 전 군산대박물관은 행궁 유적으로 추정되는 터에서 다량의 최고급 청자류 및 기와류 등을 수습하기도 했다. 서긍의 묘사대로 이곳이 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이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임금의 행차엔 반대파들의 암살 위험을 무릅써야 하며 나들이에 엄청난 규모의 거금 또한 들게 마련이다. 하물며 육지가 아닌 해로로 배를 타는 것은 침몰 사고와 같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도 감수해야 한다. 이 모든 위험요소를 감안하면서까지 고려의 왕들은 이곳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런데 숭산행궁은 일반적으로 왕들이 피서나 휴양차 들렀던 곳이라 보기엔 그 규모가 협소해 보였다. 오히려 이곳에 묻힌 선대 왕족에게 제사를 올리던 제실(祭室)의 성격이 더 짙어 보였다. 필자 일행은 이곳에서 다량의 청자편과 다기류를 찾아내기도 했다. 제사를 수행하는 데 사용했던 그릇들로 추정된다.

숭산행궁이 왕이 머물며 제사를 올리던 제실이라고 할 경우 이곳에 숭산신을 모시는 사당의 존재 이유 또한 분명해진다. 선유도 망주봉은 한 나라의 국운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한 권력의 에너지장이 펼쳐져 있고, 그것이 고려의 힘이 돼줄 것이라 믿었던 왕실은 이곳에 숭산의 산신까지 ‘모셔와’ 지키게 할 정도로 중요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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