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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adership in Sports 18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베이징의 기적 일군 ‘화수분 야구’ 창시자

  • 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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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할대 타자가 세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뒤 마지막 타석에 들어섰다.
  • 어떤 감독은 이때 이 타자를 버리고 안타를 칠 확률이 높은 다른 선수로 교체한다. 그러나 다른 감독은 “3할대 타자가 연속 삼진을 당했으니 이제는 확률적으로라도 안타를 칠 때가 됐다”며 그 선수를 믿고 기다린다.
  • 두 감독 중 누가 더 훌륭한 지도자일까. 정답은 없다.
  • 확실한 것은 NC다이노스 김경문(54) 감독이 후자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수를 믿는 감독이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김경문 NC다이노스 감독
김경문 감독이 지휘한 한국 야구대표팀은 베이징에서 9경기 전승 신화를 써내며 올림픽 구기 종목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땄다. 이 성과로 ‘국민 감독’의 반열에 오른 그는 올림픽 경기에서 극도로 부진했던 4번 타자 이승엽을 끝까지 신뢰하고 기다리며 중용해 일본과 치른 준결승,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열매를 맺어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비록 8년간 지휘봉을 잡은 프로 소속팀 두산베어스에서는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여줬다. 팀 전력이 약세여서 하위권에 머물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평을 깨고 매년 팀을 상위권에 올려놓았고, 소극적인 번트보다 도루 등 공격적인 야구를 표방하며 두산베어스에 ‘젊고 역동적인 팀’이라는 확실한 팀 컬러도 입혔다. 특히 될성부른 신고선수(연습생), 무명선수 등을 눈여겨보고 이들을 중용해 현재 한국 프로야구의 간판스타들로 바꿔놓은 그의 지도력은 김 감독에게 왜 ‘화수분 야구의 창시자’라는 별명이 붙었는지를 잘 알려준다.

‘안전한 1점’보다 ‘위험한 모험’을 택하고, ‘믿음’과 ‘고집’ 사이에서 날카로운 균형을 유지하는 김 감독은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2011년 8월 신생 야구단 NC다이노스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기 때문. 2011년 창원을 연고지로 창단한 NC 다이노스는 팀 마스코트인 ‘공룡’처럼 지역에서 야구 붐을 일으키고 있다. 신생팀이지만 프로야구 2군 리그인 퓨처스리그에서도 맹활약했고, 2013년에는 프로야구 1군 무대 진입까지 확정되면서 기존 8개 야구단에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있다.

김 감독은 “1군 리그 참여 첫해에 곧바로 4강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야심만만한 목표를 제시했다. 새로운 팀에서 젊은 선수들과 새로운 도전에 나선 그의 리더십을 탐구해보자.

소년 포수의 아찔한 경험

김경문 감독은 1958년 11월 인천에서 태어났다. 8형제 중 막내였던 그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가 자주 이사를 다닌 까닭에 어릴 때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자랐다. 소년 김경문은 11세에 대구의 야구 명문 옥산초등학교에서 야구와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의 포지션은 내야수였다. 그러나 주전 포수의 부상으로 갑자기 포수 마스크를 쓰면서 어린 소년의 인생 항로는 결정적으로 달라졌다.

아마추어 야구에 입문하는 어린 학생들은 주로 투수와 유격수를 선호한다. 가장 눈에 띄는 포지션인 데다 실력이 우수한 선수가 맡는 포지션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지션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기피하는 자리가 있으니 바로 야구단에서 어머니 역할을 하는 포수다. 무거운 포수장비를 착용하고 앉아서 땀만 흘려야 하는 데다, 아마 야구에서는 크게 빛이 날 기회도 적어 많은 선수가 포수가 되길 꺼린다.

하지만 포수는 상당히 매력적인 자리다. 포수는 선수 중 유일하게 그라운드 전체를 바라보면서 경기를 한다. 투수, 타자, 주자, 야수, 벤치, 심판 등 동시에 여러 곳을 살펴야 하므로 시야가 넓고 분석력이 뛰어나다. 포수를 흔히 ‘그라운드의 야전사령관’으로 부르는 이유다.

지도자로 성공할 가능성도 높다. 현재 한국 프로야구 전·현직 감독은 대부분 투수 아니면 포수 출신이다. 그중 김경문 감독, 이만수 SK와이번스 감독, 조범현 전 KIA타이거즈 감독은 저마다 상당한 성과를 내며 야구계의 포수 출신 감독 선호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소년 김경문은 포수로서는 작은 체격이었지만 정교한 타격을 자랑했다. 그는 공주고 3학년 때인 1977년 제11회 대통령배대회에서 타격상과 최다안타상을 거머쥐며 공주고 야구부 창단 후 첫 우승을 이끌었다. 이어 태극마크를 달고 한일 고교친선대회 대표팀에 발탁됐다.

김 감독은 고교 시절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서는 아찔한 경험도 했다. 그해 5월 청룡기 충남지역 예선에서 지역 라이벌인 대전고의 한 선수가 고의로 배트를 크게 휘둘러 포수로 앉아 있던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포수가 마스크만 썼을 뿐, 지금처럼 헬멧을 착용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김경문은 그 자리에서 뇌진탕으로 쓰러져 5일간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 사고 이후 포수는 반드시 헬멧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고려대에 진학한 그는 1980년 한미 대학친선대회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러나 허리에 심각한 부상을 당하면서 디스크 수술을 해야 했다. 허리를 이용하는 스윙을 하지 못하면서 수비형 포수로 자리를 잡았다.

1982년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김 감독은 OB베어스(현 두산베어스)의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당시 김 감독은 조범현 전 KIA 감독과 번갈아 포수 마스크를 쓰며 OB베어스의 원년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불사조’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투수 박철순과 마운드에서 뜨거운 포옹을 하며 뒷모습만 보였던 포수가 바로 김경문 감독이다. 1982년 한국시리즈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두 사람의 포옹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에게 회자되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 원년 우승팀의 주전 포수라는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 감독은 이후 프로에서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잦은 부상과 포수치고도 낮은 타격 성적이 그를 괴롭혔다. 1989년까지 OB베어스의 포수로 활약했지만 주전 포수로 등장하는 빈도가 점점 낮아지면서 벤치를 지키는 신세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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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민│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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