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항상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중용과 평형을 찾아내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원융회통(圓融會通)을 이루는 것,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 나와 만년의 아버지는 무언으로 통했다. 세상이 소란하고 앞이 안 보일수록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허전하게 만든다.
내장산에 칩거하면서 집필에 몰두하시던 1991년 당시 아버지 故 고형곤 박사.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여읜 자식의 서운함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요즘도 늘상 아버지가 떠오른다. 시국이 어수선할 때, 어떤 것이 옳은 길인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면 더 그렇다. 아버지라면 이럴 때 어떻게 판단하셨을까. 그만큼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나를 일깨워주셨다. 때로는 비판하고 때로는 조언을 주시며 항상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최고의 자문역이자 의논상대였다.
아버지는 전북 임피(지금의 군산시 근교)의 농촌에서 태어나 서당을 다니시다가 뒤늦게 신교육을 받았다. 만학도였음에도 5년 만에 임피보통학교와 이리농림학교를 끝내고 경성제대(京城帝大) 철학과에 입학한 걸 보면 상당히 총명하셨던 모양이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아버지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어렵사리 대학을 마쳤다. 문재(文才)도 있으셨던지 ‘머슴 문성이’라는 단편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 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옆집의 작은 악당, 경이·건이’
동아일보에서는 이광수 선생 밑에서 편집부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아버지는 고하 송진우(古下 宋鎭禹) 사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셨다는데, 어릴적 와우산 아래 작은 집에서 도포 입은 송진우 사장을 본 기억이 있다. 돌아가시기 전에도 아버지는 고하 선생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노구를 이끌고 추모의 정을 표하러 가시곤 했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아버지는 철학 선생님이었다. 내가 태어날 무렵부터 아버지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셨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연세대 부근에 머물러 있다. 한때는 서강 와우산 아래에서 살았고 한때는 신촌 안산 아래에서 살았다. 내가 신촌의 창천초등학교를 다닌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우리 형제는 장난이 심했던 것 같다. 와우산 집 옆에는 아버지와 연전(延專) 동료인 이양하 교수가 살았는데, 당시 네 살, 두 살배기였던 나와 우리 가형(家兄)이 아버지와 무척이나 절친했던 이 친절한 옆집 아저씨를 꽤나 들볶았던 모양이다. 훗날 중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이양하 교수의 수필에 나오는 ‘옆집의 작은 악당, 경이·건이’가 바로 우리 형제 얘기다.
당시 아버지는 내게 무척 자상한 가정교사였다. “이게 뭐예요, 저게 뭐예요?” 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짜증 한번 내는 일 없이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때때로 “이게 뭘까, 너 아니?” 하고 오히려 질문을 유도하기하셨다. 오죽하면 학교에서 선생님께 질문한다는 것이, 손을 들고는 “아버지이~!” 하고 운을 떼는 바람에 반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을까.
이 시절 또 하나 생각나는 게 닭장이다. 당시 대학교수 봉급이라는 게 한참 자라는 아이들을 둔 가장으로는 영 넉넉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업으로 집에서 닭을 길렀던 것 같다. 연전 사택 주변에 레그혼(Leghorn) 100여마리를 키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집 주변이 닭 우는 소리로 꽤나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대학총장이 못마땅한 기색을 보였다지만, 교수들에게 충분한 대우를 해주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저 눈감아준 듯하다. 나는 청소당번이었는데, 횃대 밑에 들어가 닭똥을 치워놓으면 그것을 받아 비료로 파는 사람이 가져가곤 했다.
양계장 청소당번
덕분에 노란 달걀 프라이가 떨어지지 않던 내 도시락은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버지도 이 부산물을 꽤 즐기셨던 것 같다. 주말이면 집이나 인근 산에서 친구분들과 막걸리 파티를 가지곤 했으니 말이다. 잔심부름을 맡았던 나는 아버지의 술안주로 닭이 빠지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분들이 나눈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어린 내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은 그릇이 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이 무렵 아버지는 내 이름을, 당초 지으신 ‘건강할 건(健)’에서 ‘세울 건(建)’으로 바꾸셨다. ‘높이 세운다’는 이름만큼이나 내게 거신 아버지의 기대도 컸던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이래라 저래라 강요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저 스스로 노력하도록 동기를 제공해주시고 다른 사람을 통해 간접적으로 칭찬해서 나를 북돋아주실 뿐이었다.
아버지가 서울대로 옮기시고 나서 3년 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들어간 해에 6·25가 터졌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제일 먼저 칸트 전집 10여권과 나의 중학교 1학년 교과서들을 챙기셨다. 한 톨의 양식이 아쉬웠을 전쟁통에 그런 행동을 하는 아버지가 어머니 보시기에는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짐을 짊어지고 고깃배로 밤섬까지 건넌 뒤 걸어서 아버지의 고향으로 가 전쟁기간을 보냈다.
환도(還都)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전쟁을 겪고 난 뒤라 어머니는 아들이 의사가 되어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들어갔다.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나의 결정을 지지하셨다. 워낙 자식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 성품인 데다 아무래도 이과보다는 문과에 대해 호감을 가지셨던 것도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와 사제간이 되었다. 당시 철학개론은 모든 문리대 학생에게 필수과목이었는데, 주요과목의 개론은 주임교수가 직접 담당 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기동창인 송복 교수 말에 따르면 논어에서도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라 하여 자식은 서로 바꾸어 가르치는 법이라고 했다지만, 내게도 영 거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피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수 놀리고 흉보는 것이 낙이었을 젊은 시절의 내 동기들은 꽤나 불편해했을 것이고 아버지 역시 이러한 불편함을 감수하셨을 것이다. 출석을 직접 부르지 않고 서면으로 하던 시기여서 수업시간에 이름을 불리는 일만은 면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은 ‘B’에 그쳤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후광
대학 2학년 때던가, 홍릉 숲에서 여학생과 난생 처음 데이트란 것을 하다가 산책 나오신 아버지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사실, 내 딴에는 먼저 아버지를 발견하고 재빨리 피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나를 봤다는 말씀을 안 하셔서 오랫동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아버지의 신춘수필을 보니 홍릉 숲에서 나를 발견하셨던 이야기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아버지의 이 수필은 “우리 건이한테 완전히 점령당한” 이 홍릉 숲은 당신도 “언젠가 여인(麗人)과 함께 거닐고 싶었던 숲”이었다는 술회로 끝난다. 아버지의 숲을 본의 아니게 점령(?)해버려 뒤늦게나마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나의 문리대 시절, 아버지의 후광(?)은 계속됐다.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아버지의 제자들이 적극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학생회장이 된 뒤에는 선거 공약대로, 필화사건으로 폐간된 문리대 교지를 ‘새 세대’로 이름을 바꾸어 복간했는데, 이때도 문리대 학장으로 계시던, 어린 시절 ‘옆집 아저씨’ 이양하 교수가 많이 도와주셨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당시 필화사건을 빚은 이념연구 서클 ‘신진회(新進會)’ 멤버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이른바 ‘꼴통’ 보수로 호칭되고 있으니 세상은 참 모를 일이다.
내가 대학을 마칠 무렵 4·19가 터졌다. 전북대학교 총장으로 자리를 옮기셨던 아버지는 이때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하셨다. 그 몇 해 전 미국 예일대에 1년동안 교환교수로 가 계신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우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사는 나라를 보시면서 지식인에게는 학문보다도 행동이 요구되는 때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고등고시를 통해 공무원의 길을 가겠다는 내 생각을 지지하신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내가 고시에 합격해 내무부 지방국의 수습행정사무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딘 1962년, 아버지는 군정반대의 선봉에 나섰다가 옥고를 치르셨다. 그 다음해에는 총선거에서 통합야당인 민정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셨다. 국회에서는 윤보선 야당 대통령후보 아래에서 당의 정책위원장과 사무총장의 요직을 맡았다. 군사정권을 상대로 가시밭을 걷는 듯한 야당 정치활동의 선봉장이 되셨던 셈이다.
나는 아버지가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한 후 그 여파를 톡톡히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규정에 따르면 고시 합격자들은 1년반 후 자동적으로 수습 딱지를 떼고 보직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내 고시 동기들은 때가 되자 모두 중앙부처의 계장이나 지방의 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나만은 예외였다.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나에게만 보직이 주어지지 않았다.
보직 없는 공무원 생활은 기약 없는 셋방살이와도 같다. 권한과 책임이 주어지지 않으니 일해도 일하는 것 같지 않고 놀아도 노는 것 같지 않은 것이 보직 없는 공무원이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버지가 강성 야당 정치인이라는 것말고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행정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마땅하건만 나라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정견을 바꾸시라고 할 수는 없고, 고민 끝에 장관을 면담하고 사표를 내기로 했다. 그러나 무보직의 평사무관이 장관을 면담하기가 쉽지 않은 터라 면담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이 알려졌는지 드디어 보직발령을 받았다. 고시 합격 후 3년반 만의 일이었다(아직도 이 기록은 깨어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 상공부 상역국장이던 형님은 강제퇴직을 당했다. 나 대신 당하신 것 같아 무척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2004년 5월30일 생신을 맞아 가족들과 찍은 사진.
권위주의 시대의 정치상황에서 야당 정치가인 아버지와 행정가인 아들의 입지는 운명적으로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6대 국회의원 4년 임기를 마친 후 정치인의 뜻을 접으시고 다시 철학자의 자리로 돌아오셨다. 반면 나는 본격적으로 전문행정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나의 공직생활이 당신의 뜻을 펼치는 또 다른 방편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내가 공직에 나아갈 때마다 친인척들에게는 청탁 금지령을 내리고, 항상 기성 정책의 건전한 비판자, 민심의 전달자 역할을 자임하시며 내가 관료적인 타성에 젖지 않도록 엄한 감독의 눈길을 보내셨다. 또 내가 공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 무언의 파트너십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직생활을 시작할 때 아버지는 내게 ‘공직삼계(公職三戒)’를 내려주셨다. 다름 아닌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지 마라’ ‘남의 돈 받지 마라’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는 세 가지가 그것이다.
누구 사람이라고 낙인 찍히지 말라는 것은 줄 서지 말고 실력으로 헤쳐가라는 뜻이었다. 이미 강성 야당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정부에 들어간 이상 이 첫 번째 계명은 공직자로서 생존하기 위해 당연히 지켜야 할 수칙이 아닐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가 정치를 그만두신 다음에도 맡은 일에 몸과 마음을 전력투구한다는 자세는 내게 ‘제2의 천성’이 되었다. 그 때부터 나는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니 ‘감천(感天)’까지는 못 가도 ‘감민(感民)’까지는 가야 국민의 공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성감민(至誠感民)’이라는 말까지 만들어 좌우명으로 삼았다. 나는 공직생활을 통해 인사(人事)운동을 하거나 어느 정파에 줄을 대거나 한 일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至誠’이면 ‘感民’
두 번째 계명인 ‘돈 받지 말라’, 즉 청렴의 의무는 공직자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덕목이다. 그러나 당연한 것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도지사로 부임하게 되자 아버지는 친지, 가족들을 불러 모아 청탁금지의 엄명을 내리시는 한편, 오히려 이들의 협조를 받아 매달 일정액의 판공비를 내게 보내주셨다.
돈도 물론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나로서는 여기에 담긴 아버지의 당부를 항상 새롭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신군부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국보위에 반대해 서슴없이 사표를 내던질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청렴을 유지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청렴하려면 눈앞의 이익에 의연해야 한다. 이건 보통사람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주문이다. 그래서 나는 몸담은 조직의 부하들에게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지자이렴(知者利廉)’을 자주 얘기해주곤 했다. ‘지자(知者)는 청렴(淸廉)을 이(利)롭게 여긴다, 청렴(淸廉)은 천하(天下)의 큰 장사이다, 큰 것을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는 얘기다.
수서사건으로 권좌에 있던 여러 사람이 줄줄이 수감되었지만 나와 함께 특혜를 거부한 서울시 공무원들은 하나도 연루되지 않았다. 바로 ‘지자이렴’의 산 증인들이다.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다음에는 더욱 보람 있는 일을 소신 있게 하기 위해서 청렴의 계율을 지켰다. 나는 이렇게 형성된 ‘미스터 클린’의 브랜드를 끝까지 지켜갈 것이다.
‘공직삼계’ 중 이렇게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율은 잘 지켰지만 ‘술 잘 먹는다고 소문내지 마라’는 세 번째 계율만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술을 먹더라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말아라’는 계율이라면 어느 정도 준수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술의 양과 관련된 문제라면 글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DNA 탓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와 술자리를 같이했던 사람들이 소문을 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사실 내게 술을 가르쳐주신 분도 아버지다. 그래서 술주정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제삿날마다 음복을 시켰고 대학생이 되자 저녁 밥상에서 한잔의 반주를 권하곤 하셨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호출에 따라 명동의 ‘뽕 쏘아’라는 ‘빠(Bar)’로 찾아갔더니 동료교수들이며 마담과 둘러앉아 대작하고 계시다가 내게 합석하라고 하시고는 ‘마티니’란 것을 시켜주셨다. 처음 마셔본 칵테일이었다.
와우산 아래에서 아버지가 친구, 제자들과 술자리 담론을 즐기는 것을 보고 자란 나 역시 직원들과 소줏자리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기 좋아한다. 사실, 공직생활 중 직원들의 진솔한 얘기는 사무실이 아니라 이런 소줏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게 마련이다.
세 번째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대신 나는 새로운 계율을 만들어 실천하기로 했다. 바로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의 ‘일일신(日日新)’이다. 세상은 변하고 이에 따라 행정의 환경도 변한다. 따라서 행정의 사고, 일하는 방식 모두 일상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온고(溫故)는 하되, 지신(知新) 역시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주신 세 번째 계율을 이렇게 대체한 데 대해서 생전에 아버지는 이렇다할 말씀이 없으셨지만, 묵시적으로는 동의하신 것 같다. 아버지 스스로가 항상 새로운 공부거리와 취미를 찾으셨으니 말이다.
깨알같은 글씨의 ‘家信’
아버지는 내 공직생활의 3계(三戒)를 내려주시는 데 그치지 않고 충실한 모니터와 정책조언자의 역할을 도맡아 해주셨다. 바둑은 두는 사람보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수를 더 잘 볼 수 있다는 것이 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아버지의 이런 도움 덕택에 내가 어느 공직에 있든 그 부처의 공보관실은 꽤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공보관실에서도 빠뜨린 기사를 아버지께선 꼬박꼬박 스크랩해서 당신의 의견과 함께 내게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원고지 뒷면을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운 ‘가신(家信)’은 주의 깊게 정독했다. 좋은 정책제안이 많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빈곤의 세습을 막으려면 영세서민의 자녀들에게 기능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는 지적에 시립기능훈련원을 개설해 운영하기도 했고, 장애인 대책을 하도 강조하셔서 수화를 배우기도 했다.
아버지는 또한 내게 최고의 자문역이셨다. 아버지가 정치를 떠나실 때 나는 앞으로 공직생활을 해나가면서 나의 진로를 포함해서 중요한 일은 모두 아버지에게 상의 올리고 자문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1980년 공직을 그만둔 이후 지금까지 24년의 세월 동안 일곱 번, 모두 합쳐 10년 남짓 공직에 있었다. 관(官)과 민(民) 사이를 일곱 번이나 왕래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러한 약속은 잘 지켜져왔다. 다만, 19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에 찬성할 수 없어 사표를 낼 때에는 시간 여유가 없어 사전에 아버지께 상의드리지 못했지만 직후에 보고를 드리고 추인을 받았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있던 10여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정부 주변의 단체장이나 대기업의 임원 자리를 맡은 적이 없다. 지금도 국제투명성위원회(TI)의 자문위원과 환경포럼의 대표 이외에는 다른 일을 맡지 않고 있다. 이러한 처신에 대해서는 부자간에 견해가 일치해 특별히 의논할 일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공직에 나아갈 때에는 달랐다. 내 진로에 관하여 부자간에 의견이 항상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뜨거운 격론도 벌였고 두어 번은 내내 견해가 상반되기도 했다.
그중 한 가지가 서울시립대 총장과 관련한 일이다. 1990년 말, 서울시립대 교수들이 수서 특혜사건에 저항하다 시장직을 떠난 나를 총장으로 영입하기로 하고 선거를 거쳐 총장 후보자로 뽑은 뒤 교육부에 상신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수서 특혜와 관련한 압력을 거부한 데 대한 청와대의 불쾌감을 인지한 교육부는 청와대 상신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청와대에서는 수석비서관들을 보내 후보 사퇴를 종용했다.
청와대의 압력과 아버지의 반대
처음에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아버지 역시 청와대의 압력에 굴하지 말라며 격려해주셨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고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청와대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권부와 대립각을 세운 총장으로서는 교수들이 바라는 대로 학교중흥을 이룰 수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아버지는 청와대의 압력에 굴하는 일이라며 그러한 내 판단에 반대하셨다. 그러나 결국 나는 서울시립대 총장직을 맡지 않았다.
평생을 현실 속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을 지키며 공직자의 길을 걸어온 나와 달리, 아버지는 높은 정신세계 속에서 유유자적한 분이셨다. 한때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하고, 한국철학회를 창립해 초대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현실에 참여하기도 하셨으나 마음은 내내 철학의 세계에 머물렀던 듯싶다. 실존철학을 한국 철학계에 처음 심어주셨고 아울러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에 심취해 이 둘을 사상적으로 잇고자 하셨다. 학술원상을 받으신 저서, ‘선(禪)의 세계’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불교의 선사상(禪思想)으로 용해시킨 저작’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내장산 암자에 칩거하시면서 완성한 책이다.
한평생 공직에 몸담아 절제하며 사느라 별 재미를 키우지 못한 아들과 달리, 아버지는 멋을 아셨다. 우리 집안의 딸들과 며느리들은 집안 남자 가운데 제일 멋있는 남자로 아버지를 꼽는다. 하이데거를 읽던 서재의 벽은 은은한 옥색 한지로 도배가 돼 있었고 난초를 키우셨으며 가야금과 창을 배우셨다. 불교철학을 연구하실 때에는 모차르트 음악에 심취하시기도 했다.
외출하실 때면 옥색 두루마기를 입곤 하셨는데, 휘날리는 흰 수염과도 잘 어울렸다. 물론 언제라도 입으실 수 있게 두루마기를 준비하신 어머니에게는 고역이었겠지만 말이다. 동숭동에서 함께 사실 때는 대학생 손자들을 데리고 동네 호프집을 찾는 것이 큰 즐거움이셨다. 그때 머리에 눌러쓰신 베레모가 멋있어서 자세히 보니 내가 오래 전 쓰다 버린 서울대 교모였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멋을 잘 모른다. 베레모 같은 것은 쓸 엄두도 못 내봤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추구하신 멋의 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와 불교철학, 참선과 모차르트, 혹시 아버지는 상반되어 보이는 것 속에서 조화를 얻으려고 하셨던 것이 아닐까.
참선과 모차르트
항상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쏠리기 쉬운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흐름 속에서 중용과 평형을 찾아내고 화이부동(和而不同)하며 원융회통(圓融會通)을 이루는 것, 이런 마음가짐 속에서 나와 만년의 아버지는 무언으로 통했다. 조화와 중용의 정신이야말로 큰 키, 남다른 건강, 뜻한 일은 이루는 의지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아버지는 가셨다. 멋있던 아버지, 어려서는 자상한 가정교사이셨고 자라서는 따뜻한 후원자이셨으며 장성해서는 공직생활의 든든한 자문역이셨던 아버지는 떠나셨다. 아버지가 키우시던 난초는 며느리들이, 남쪽 창 밑의 대나무는 내가 가꾸고 있다. 잘 자란다. 그러나 잘 자랄수록 떠나간 아버지의 흔적이 더 크게 느껴진다. 당시에는 벅찬 일정에 번거롭기도 했던 깨알 같은 글씨의 ‘가신(家信)’이 너무도 그립다. 세상이 소란하고 앞이 안 보일수록 아버지가 안 계시다는 사실이 나를 더욱 허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