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시위가 만든 ‘괴물’ 공직윤리지원관실
- 수사기록에 담긴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흔적
- 국정원 작성 추정 박원순 문건, 총리실 문건과 양식 흡사
- “총리실, 국정원과 손잡고 감찰활동”
4월 29일 검찰 조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은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를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터진 국가정보원 여직원의 ‘댓글 공작’ 의혹에서 비롯됐다. 수사 결과를 축소·왜곡해 발표한 경찰이 논란에 불을 지폈다. 논란은 대선이 끝난 뒤 본격화했다. 검찰은 특별수사팀까지 꾸려 수사를 진행했다. 그 사이 민주당은 여러 차례에 걸쳐 원 전 원장의 선거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공세의 수위를 높였다.
3월 18일,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국정원 인트라넷에 게시됐던 ‘(원세훈)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이하 ‘원장님 말씀’)을 공개한 바 있다. 진 의원에 따르면 ‘원장님 말씀’은 2009년 5월부터 2013년 1월까지 최소 25회 게시됐다. ‘원장님 말씀’이 공개된 뒤 야당과 시민단체는 원 전 원장을 국가정보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원장님 말씀’ 중에는 민간인 사찰, 여론조작으로 볼 수 있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현재 이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가 수사 중이다. ‘원장님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심리전단이 보고한 ‘젊은층 우군화 심리전 강화방안’은 내용 자체가 바로 우리 원이 해야 할 일이라는 점을 명심할 것.”(2010년 7월 19일)
“북한과 싸우는 것보다 민노총·전교조 등 국내 내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욱 어려우므로, 확실한 징계를 위해 직원에게 말하기보다 지부장들이 유관기관장에게 직접 업무를 협조하기 바람.”(2011년 2월 18일)
“선거기간 동안 트위터, 인터넷 등에서 허위사실 유포. 확실하게 대응 안 하니 국민들이 그대로 믿는 현상 발생. 악의적 허위사실은 선거에 미치는 영향 막대. 선거가 끝나면 결과 뒤바꿀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원이 역할을 제대로 해줘야 함. 특히 종북세력들이 선거 정국을 틈타 트위터 등을 통한 허위사실 유포로 국론분열을 조장하므로, 선제적 대처해야 함.”(2011년 11월 18일)
5월 15일과 19일, 진 의원은 국정원의 불법 정치개입 의혹을 고발하며 국정원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도 공개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치적 영향력 차단’과 ‘좌파의 등록금 주장 허구성 전파로 파상 공세 차단’이란 제목의 문서였다. 박원순 서울시장 관련 문건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 이후 세금급식 확대·시립대 등록금 대폭 인하 등 좌편향·독선적 시정운영을 통해 민심을 오도, 국정 안정을 저해함은 물론 야세 확산의 기반을 제공하고 있어 면밀한 제어방안 강구 긴요.”
문건의 입수 경위에 대해 진 의원은 “의원실로 제보됐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당시 국익전략실장, 일명 B실장이라고 불리는 신모 실장에게 특별 지시해 작성한 보고서. 원 전 원장이 조직 차원에서 정치개입 행위를 지시했음을 밝혀주는 자료다’라고 적힌 메모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정원 문건인가, 아닌가
진 의원이 공개한 문서가 국정원에서 작성된 것이라면, 국정원은 정치관여를 금지하는 국가정보원법(제9조)을 위반한 것이 된다. 그러나 문건이 공개된 직후 국가정보원은 공식, 비공식 채널을 통해 진 의원의 주장을 부인했다. ‘신동아’의 질의에 대해서도 국정원은 “국정원 문건이 아니다”라는 답을 전해왔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정치권 인사들도 국정원 문건이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문건의 양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국정원 문건과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의 양식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도 “문서 양식만으로는 국정원 문서 여부를 단정하기 곤란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으로 전한다. 국정원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정치권 관계자는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은 국정원 문건과 서체도 다르고 편집방식도 다르다. 다른 정보기관에서 만들어진 문건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신동아’는 이런 주장의 진위를 확인하기로 했다. 먼저 정보팀을 운영하고 있는 각종 사정기관의 공식 문건을 입수해 양식을 비교했다. 대상은 경찰, 검찰, 국정원, 국무총리실(공직윤리지원관실) 등이었다.
그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은 민간인 사찰 사건을 일으킨 이명박 정부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의 것과 비슷했다. 내용의 기술 방식, 문건에 쓰인 기호와 약물 서식이 흡사했다. 비교에 활용한 문건은 2009년 초 지원관실에서 작성된,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의 행적을 담은 정보보고였다. 이 두 문건을 지원관실에서 근무했던 공직자들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들었다. 한 전직 지원관실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원관실에서 일하면서 국정원 문건을 많이 봤다. 그런데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과는 상당히 다르다. 일단 글자체가 다르다. 오히려 지원관실 문건과 양식 면에서 비슷한 것 같다.”
또 다른 전직 지원관실 관계자의 말은 보다 구체적이었다.
“MB 정부에서 국정원과 지원관실은 여러 사안을 공조해 조사했다. 국정원에서 조사 의뢰가 오면 이걸 배당해 조사하게 하고 결과를 국정원에 통보했다. 공직자의 비위 사실도 많았지만, 솔직히 정치권이나 시민단체의 동향 파악이나 민간인 사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
“국정원 보고, 팀장회의 전파”
과연 그의 주장은 사실일까.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지원관실 민간인 사찰 사건 수사기록을 검토했다.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전직 지원관실 관계자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단서를 몇 개 포착했다. 국정원과 총리실이 특정 사안에 대해 공조하며 민간인 사찰에 나섰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확인됐다. 지난해 5월 25일 진행된 진경락 전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에 대한 검찰 수사기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녹색성장 붐”을 악용한 사기 발생 소지 조기 차단
검찰 : ‘일련번호 371, 문서유무 O, 사건명 녹색성장 붐’을 악용한 사기 발생소지 조기 차단, 접수일 2009.5.25. 출처 국정원, 담당팀 총괄, 보고일 미상, 보도처 미상, 조치결과 팀장회의(5.25) 시 전파, 진행상황 종결’에 대하여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내용인가요.
진경락 :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보니 국정원에서 녹색성장 붐을 악용한 사기 발생 소지가 있으니 조기에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달받아, 팀장회의 시 전파를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검찰 : 그럼, 국정원으로부터 현안에 대한 내용을 전달받아 내부 회의 시 그 내용을 전파한 것에 불과하다는 말인가요.
진경락 : 예, 그렇습니다.
국정원의 조사 의뢰를 받고 지원관실이 사찰활동을 한 단서도 확인됐다. 다음은 지원관실 기획총괄팀에서 일하던 국토해양부 출신 6급 공무원 전OO 씨의 진술기록(2012년 5월 9일)이다.
검찰 : 파일명 ‘총리실 공문 비위통보(2008.12.1. 오후 4:18:10 저장)’인데, 어떠한가요.
이때 검사는 진술인에게 문건 내용을 제시하여 보여주고,
전OO : 국정원 정보사항 등을 1팀에 전달하여 조사토록 한 것인데, 별다른 조사 없이 정보사항을 붙임으로 하여 각 기관에 통보한 공문으로, 제가 업무를 맡기 이전인 2008년도에는 1팀에서 직접 기안하여 기관에 통보했으나, 2009년 이후에는 기획총괄과를 통해 공문이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국회 요구자료에 대응하기 위해 문서수발대장을 점검하다가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고 1팀으로부터 사본을 받아서 보관하였습니다.
수사기록은 전직 지원관실 관계자들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국정원이 정부 정책이나 공무원의 비위사실에 대한 사찰이나 내사를 지원관실에 의뢰하거나 정보사항을 보내면 지원관실이 이를 조사하고, 그 결과를 다시 국정원에 통보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전직 지원관실 관계자는 “나도 국정원에서 내려온 오더를 종종 받았다. 국정원 오더 파일을 가지고 다니면서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곤 했다. 민간인 사찰 수사 당시 검찰이 공개한 문서를 확인한 적이 있는데, 지원관실 문서가 아닌 것도 많았다”고 말했다.
촛불시위라는 공통점
물론 이 정도의 정황만으로 진 의원이 공개한 문건이 지원관실과 관련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민간인 사찰로 문제가 된 지원관실이 국정원과 공조해 사찰활동을 했다면 흥밋거리로 지나칠 일이 아니다. 어쩌면 지난 검찰 수사에서 미처 밝히지 못했던, MB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개입 여부를 확인해줄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 기관이 서로 정보를 공유해가며 사찰과 감찰을 진행했다면, 당연히 그것을 조율한 곳도 있었을 것이다. 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을 주도한 박영준 전 차관과 이영호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 국정원 정치개입을 주도한 원 전 원장 모두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는 점은 이 문제와 관련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국정원의 정치개입 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원 전 원장이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결심한 것은 행정안전부 장관이던 2008년 촛불시위를 겪은 뒤다. 그리고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박 전 차관이 지원관실 설립을 결심한 계기도 촛불시위였다. 국정원과 지원관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을 개연성은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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