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진 작 ‘바람의 나라’
한국만화의 역사는 19세기말~20세기초 창간된 애국 계몽적 신문의 풍자만화와 더불어 시작됐다. 일제 치하에서는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공출을 위해 쌀의 생산을 독려하기 위한 관제 만화가 창작되기도 했다. 해방후 격동의 현대사에서 만화는 전단이나 포스터 같은 프로파간다로 폭넓게 활용되었다. 전쟁중 피란지 어린이들의 위안거리가 되었던 ‘딱지 만화’를 거쳐서, 종전후에는 성인 대상 오락 잡지와 만화전문 잡지가 탄생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단행본 출간 유행과 더불어 만화 대본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본소는 혼란스런 시절,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 환상의 공간이었다.
1966년부터 한국만화는 검열과 독점이라는 두 가지 악재에 시달려야했다. 이 암울한 시기, 어린이 잡지에 정기적으로 연재된 명랑만화와 성인용 잡지에 연재된 성인극화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길창덕의 ‘꺼벙이’ 등 명랑만화, 고우영의 ‘삼국지’, 강철수의 ‘팔불출’, 이두호의 ‘객주’ ‘임꺽정’ 등 역사극화는 독자를 매혹시켰다.
1980년대 대본소 만화의 붐을 이끈 작가는 이현세다. 최고 히트작은 ‘공포의 외인구단.’ 허영만의 ‘무당거미’도 이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1986년 창간된 ‘만화광장’을 통해 발표된 많은 리얼리즘 만화들의 성과도 빼놓을 수 없다. 농촌·도시빈민 문제 등을 다룬 이희재의 단편이나 1970년대 SF작가인 김형배가 월남이라는 공간을 새롭게 조망한 만화 ‘투이호아 블루스’,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준 허영만의 ‘오! 한강’, 김혜린의 뛰어난 단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만화가 ‘만화광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6년 ‘만화광장’에 단편을 발표하면서 데뷔한 오세영은 근대 조선 민중의 얼굴과 조선의 풍광을 가장 정확하게 묘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특히 그가 1990년대 이후 발표한 중·단편 만화문학관은 만화를 문학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끌어올린 수작이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어린이 만화로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가 있다.
1980~90년대 한국만화는 새로운 시각문화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한국만화는 민중미술과 만나면서 외연을 풍부하게 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과 함께 한겨레그림판을 맡아 그린 박재동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대본소 극화 붐은 작품의 양적 확산을 가져왔을 뿐 질적인 도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대본소 만화는 점차 시스템에 따라 제작되는 만화로 굳어졌으며, 이에 식상한 독자들은 대본소 만화에서 떠나기 시작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드래곤볼’ ‘슬램덩크’ 같은 일본만화다. 이를 기화로 일본만화는 우리나라에 자국의 출판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이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한동안의 혼란이 정리되면서 새로운 작가군이 만화 잡지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자신의 욕망과 개성적 시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양영순, 이유정, 권가야, 박흥용이 그렇다. 1990년대 중반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가 순정만화라 불리는 여성만화의 약진이다. 대표작으로 김진의 ‘바람의 나라’, 김혜린의 ‘불의 검’을 들 수 있다. 황미나, 김혜린, 김진, 신일숙, 강경옥, 박희정 등 1980년대 작가들에 이어 등장한 1990년대 작가들은 일상의 영역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여성작가들의 약진과 함께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홍승우, 조남준, 이우일, 홍윤표 등 또다른 신세대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은 주로 일상의 이야기를 만화로 옮기는 데 남다른 기량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