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의 ‘인왕제색도’ (1751·호암미술관)
한때 조선 후기의 문화를 주로 서구 근대문화의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시절이 있었다. 조선 후기 진경풍속의 삼위일체 경향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채, 조선 성리학의 관념화된 공리공론을 극복하고 나타난 ‘실학사상’의 과학적 사고를 토대로 논의를 시작한 뒤, 신분제 붕괴로 성장한 ‘서민’ 계층을 주 배경삼아 발달한 것으로 편향되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는 조선 후기 진경풍속을 발생시킨 핵심 요소인 ‘궁관(宮官)’ 중심의 조선 성리학과 그 속에 담긴 주체적 자존의식을 실증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이런 태도는 소중한 역사적 사실을 도리어 소외시켜버리고 만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조선 초기 이래의 도석적(道釋的)인 진경관(眞境觀)이나 와유관(臥遊觀), 사대부들의 기행(紀行) 사경(寫景) 풍습, 궁관의 무일도(無逸圖)나 경직도(耕織圖) 같은 여러 유사(類似) 진경풍속적 전통들과 연관시켜, 조선 후기의 진경풍속에 담긴 민족적인 자존의식의 역사성과 실존성을 해체하려는 작업이 시도되기도 했다. 또 한편에서는 조선 후기 진경풍속에 보이는 중국과 서양 그림의 수용 과정을 규명해 그 발생 배경을 오히려 외래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들은 기본적으로 조선 후기 진경풍속에 내재한 주체적 자존의식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함으로써, 그 중추적이고 핵심적인 기인과 부가적이고 주변적인 진행인(進行因)의 본말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 후기 진경풍속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인 조선만의 고유성과 토착성의 문제는 17세기 전반의 민족적인 시련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적 자각의식과 주체적 자존의식이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기타 내적인 문화 전통과 외적인 문화 수용의 다양한 요소들이 진경풍속을 있게 한 부가적인 원인이라고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해야 비로소 진경풍속의 실상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이 삼위일체형 복합적 다원성 속에 조선 후기 진경풍속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17세기 전반 두 차례에 걸친 호란(胡亂)과 명청(明淸) 교체의 국제적인 변동으로 엄청난 치욕과 충격을 당한 조선 지식인들은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강고한 이념체계를 모색하며 새로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부심했다. 그 결과 당시의 성리학자들은 중국의 명청 교체에 담긴 전통적인 중화(中華) 질서의 붕괴에 주목하고, 중국이 그동안 우리에게 적용시켜온 중화의 논리를 역이용함으로써, 중화 문화의 핵심인 성리학과 예학이 가장 발달한 조선이야말로 곧 중화라는 자존적 ‘조선중화사상(朝鮮中華思想)’을 주창했다. 이는 중국의 최대 약점과 조선의 최대 장점을 적절히 활용해 조선이 입은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고 명청의 패권적인 자장에서 벗어나 조선이 독자적 주체로 설 수 있는 최상의 실존적 이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