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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문화 이야기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 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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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뢰겔 ‘익명의 민중’ 향한 복합적 시선

브뢰겔 작 ‘농민들의 춤”. 농촌축제의 이모저모가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미술사만이 아니라 모든 문화사, 아니 역사 자체가 19세기 자본주의 서양의 소산이다. 즉 19세기 자본주의의 시각으로 꾸려진 서양의 역사이다. 그것이 일제에 의해 급수입되어 일제시대를 거쳐 우리에게도 강요 또는 이식되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그대로 먹히고 있다. 물론 최근에 와서 서양으로부터 직수입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으나, 그 수입품도 여전히 19세기 이래의 진부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고 있다. 이제는 서양 문화를 우리 현실에 맞게 주체적이고도 다양하게 수용해야 한다.

브뢰겔은 왜 세계 4대 화가에 속할 정도로 위대한가? 기브슨은 이에 대해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듯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상식이 아닌 만큼 그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미켈란젤로와 렘브란트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다르나, 생전부터 지금까지 위대한 화가로 평가된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반 고흐는 생전에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사후에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에 반해 16세기 후반기의 브뢰겔은 당시에는 상당한 평가를 받았으나 그 후 300년 이상 잊혀졌다 20세기에 와서 세계적 화가로 부활했다는 점에서 반 고흐보다 더 극적이고 역사적이다. 기브슨은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나는 매우 중요한 점이라 생각한다. 브뢰겔은 당대의 영웅·성인·지배자 숭배나 이후의 부르주아 사조, 또는 낭만주의적으로 이상화된 자연관의 미술과는 전혀 맞지 않아 19세기까지 철저히 망각됐다. 그 후 색을 중시한 인상주의에 의해 특이한 색채가 빛을 보다가, 인간의 모습을 변형시킨 표현주의와 입체주의에 의해 비로소 각광 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엽에 와서야 재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19~20세기 미술에서 그런 브뢰겔 재발견은 사실 피상적인 것이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브뢰겔이 인간·사회·자연에 대해 지닌 태도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특히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라 부른 20세기에 충격을 준 것은 다리가 절단된 거지들을 그린 만년의 작품들이다. 거지들은 각각 당시의 지배계층을 상징한 것이었으나, 그런 도상학적 해석 이전에 밑바닥 인생에 대한 화가의 철저히 냉정한 시선이 20세기에 비로소 주목을 끌게 되었다. 16세기는 물론 그 후에도 그토록 현실을 철저하게 그린 화가는 다시없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브뢰겔의 시선이 체념이나 연민의 감정이라기보다도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비극의 20세기를 산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었다는 점이다. 브뢰겔은 거지들에 대해 어떤 감상도 표현하지 않았다. 인간은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아닌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즉 인간은 신이 흙덩이에 숨결을 불어넣어 만든 존재가 아닌 흙덩이 그 자체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는 자연사상을 표현했다. 농민 생활의 묘사에서도 감상적 농민 예찬과는 달리 철저한 리얼리즘으로, 또 인간과 현실에 대한 회의정신을 보여주는 태도로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브뢰겔은 미술사에서 가장 위대한 농민 화가, 노동 화가로 재발견되었다.



이는 인간은 자연에 뿌리를 내린 존재라는 것, 즉 자연으로부터 그 생명력을 얻는다는 사상이기도 하고, 나아가 인간이나 동식물을 존재케 하는 자연을 더욱 중시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는 심각한 자연 파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가 그린 광대한 자연은 우리가 상실한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브뢰겔은 단순히 ‘농민의 브뢰겔’이 아니라 ‘자연의 브뢰겔’로서 더욱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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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cc.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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