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호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만만디(慢慢的) 중국인, 돈벌이엔 콰이콰이디(快快的)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3-02-25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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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인들처럼 돈을 밝히는 민족도 드물다. 새해 인사조차 ‘돈 많이 버세요’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업이 타고난 비즈니스 마인드로 무장돼 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상인들은 이(利)보다 의(義)를 중시한다. 상술(商術)보다 상도(商道)를 우선해야 거상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성황묘(城隍廟)는 도교 사원이지만, 그 안에 재신전(財神殿)이 있어 돈벌이를 기원하는 사람들로 늘 붐빈다.

    “부∼자 되세요.”

    어느 경영학 교수가 TV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그후 광고 카피로 활용돼 화제가 되더니 어느새 가까운 사람들끼리 부담없이 주고받는 인사말이 됐다. 이 대목에서 굳이 ‘부담없이’라는 말을 쓴 것은 과거 부자나 돈에 대한 우리 관념이 이중적이었다는 점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누구나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청빈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사회다 보니 돈이 많다는 사실이 자칫 고결함을 훼손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인지는 몰라도 ‘나 부자요’라거나 ‘부자 되세요’란 말을 대놓고 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돈이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면 그럴 필요가 없을 법도 한데, 우리 사회에는 겉으로는 싫은 체, 고결한 체하면서도 뒤로는 돈을 챙기는 사람이 많았다. 이게 바로 돈에 대한 이중적 태도다.

    돈 그 자체는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문제가 된다면 돈을 버는 방법과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것일 텐데, 그것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

    돈은 그냥 벌리지 않는다. 상당한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네 삶은 돈이라는 바퀴가 있어야만 굴러갈 수 있는 것이다. 돈이 귀한 줄 알아야 삶 또한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 ‘부∼자 되세요’란 인사말이 통용되기 10여 년 전에 중국의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12억 중국 인민들을 향해 “부자가 되는 것이 영광”이라고 부르짖었다. 천안문 사건의 후유증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소련마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1992년 초 한 달여 동안 중국 남부지역을 시찰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였다.

    앞에서 인용한 말은 덩샤오핑이 그때 행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일부로, 거기에는 앞으로 10년 내에 중국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적어도 ‘샤오캉(小康·중류수준)’에 도달하게끔 하겠다는 공언도 포함됐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저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주창한 덩샤오핑은 실용주의의 선봉자였다.

    ‘돈 많이 벌라’가 최고의 덕담

    따지고 보면 중국인들만큼 실용적이고, 그래서 돈을 밝히는 민족은 달리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상인종(商人種)’이란 말까지 듣겠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덩샤오핑의 ‘부자 예찬론’은 대서특필됐다. 그가 중국의 최고지도자였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면 분명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중국 대륙은 1949년 공산당 수중으로 넘어갔다. 그 결과 시장경제는 무시되고 경제구조는 필요에 따른 평균 배분방식으로 전환됐다. 돈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던 중국인들은 졸지에 돈 벌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것이 가져다준 것은 궁핍뿐이라 참기 어려웠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이같은 모순을 감추고자 홍위병을 동원해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백성의 배를 불리기보다는 이념을 앞세워 상인을 소인배라 멸시하며 허기지게 만들었으니 그는 중국 역사의 이단자였다. 일찍이 중국 역사에 이런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그와 달랐다. 마오쩌둥에 의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중국인들의 삶에 새로운 기운을 북돋우려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스스로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와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중국의 총(總) 설계사’ 덩샤오핑의 이런 노력에 힘입어 중국인들은 오랜만에 상인종의 DNA를 되찾게 됐다.

    중국인들은 돈 버는 것을 ‘파차이(發財)’라고 한다. 그래서 ‘궁시파차이(恭禧發財)’, 즉 돈 많이 벌라는 말은 정초에 나누는 최고의 덕담이기도 하다.

    정월 초하루는 섣달 그믐날(음력 12월30일) 자정이 지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준비는 그보다 훨씬 일찍부터 이뤄진다. 그 중의 하나가 귀성이다. 일자리를 찾아, 혹은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도 이때만은 부모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 그들에게 집은 모든 것의 출발점인 만큼 묵은 해를 보내고 새로운 각오와 소망으로 신년을 맞는 곳은 고향의 집일 수밖에 없다.

    음력설인 ‘춘졔(春節)’를 전후해 고향을 찾는 연(延) 이동인구는 16억명에 이른다. 따라서 차표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이고, 부르는 게 값이다. 설령 어렵사리 표를 구했다 하더라도 발 디딜 틈이 없는 차 안에서 오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고향집에 도착하면 집을 지키던 사람들은 대문의 양 기둥에다 춘련(春聯)을 붙여놓고 반가이 맞는다. 평소에도 집 기둥에 대련(對聯)을 붙여놓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즐거운 명절을 맞아 붉은색 종이에 황금색 또는 검은색으로 신년을 맞는 그들의 기원을 적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때 가장 널리 쓰이는 문구가 ‘世世平安日, 年年如意春(평안한 날이 대대로 계속되고 뜻한 바가 반드시 이뤄지기를)’인데, 이를 세로로 써붙인다. 대문의 넓은 문짝에는 마름모꼴 종이 위에 ‘복(福)’자와 ‘재(財)’자를 써서 붙여놓는다. 복은 그들에게 희망이요 목숨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문은 물론 방 안과 창문 등에도 붙인다.

    재미있는 것은 ‘복’자를 거꾸로 붙여 놓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발음으로 ‘거꾸로 도(倒)’가 ‘이를 도(到)’와 같아 ‘복이여 오라’는 뜻에서 시작된 풍습이라고 하는데, 이같은 도복(倒福) 풍습은 중국 역사상 상업이 가장 발달했다는 송나라 때 시작됐다.

    그러나 진짜 정월 초하루는 닭 울음소리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새해는 정월 초하룻날 떠오르는 해와 함께 열리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두 설빔으로 갈아입고 가족이 함께 새해 첫 식사를 한다. 그 후에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집안 어른들에게 세배를 드린다. 이때 젊은이는 집안 어른들에게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라고 말하고, 어른들은 이들에게 세뱃돈과 함께 만사형통하라며 ‘완스루이(萬事如意)’란 덕담을 들려준다.

    파차이(發財)와 파차이(髮菜)

    돈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민족인 만큼 중국인들에게 최고의 소원은 다름 아닌 돈벼락 맞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뱃돈을 주면서도 그냥 돈만 딸랑 건네지 않고 그에 맞는 격식에 따른다. 훙바오(紅包)라 부르는 붉은 봉투에 돈을 넣고는 겉봉에 ‘궁시파차이’라 쓴다.

    아이들은 ‘훙바오나라이(紅包拿來)’라며 손을 내밀기도 한다. 번역하자면 ‘세뱃돈 주세요’가 되겠지만, 그들은 이를 현금을 달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정초에 주고받는 연하장에도 돈 다발이 뿌려지는 모습이나 돈이 가득 들어 있는 복주머니 등이 단골 도안으로 그려진다. 중국인들은 이처럼 돈에 대해 매우 솔직하다.

    ‘파차이’는 정초뿐 아니라 개업식에도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이때에는 립 서비스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채소의 모습을 띤다. 이때의 파차이(髮菜)는 쓰촨(四川), 산시(陝西), 간쑤(甘肅) 등지에서 자라는 식물로 말리면 검은 머릿결처럼 보이는데, 중국인들은 개업식 때 이 채소를 다듬어 하객들에게 내놓는다. 돈을 번다는 의미의 파차이(發財)와 발음이 같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파차이는 이제 ‘파차이관(發財官)’으로까지 발전했다. 파차이관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나으리’ 정도의 뜻이 된다. 필자가 파차이관을 두 눈으로 목격한 것은 중국 최대의 상업도시 상하이(上海)에서다. 상하이는 인구 1700만의 대도시인데다 역사가 그리 일천하지 않은데도 이렇다할 문화유산이 드물다. 대신 신중국의 엔진 노릇만은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루는 상하이에 딱 한 곳밖에 없다는 고전 정원인 위위안(豫園)을 찾았다. 16세기 중엽 쓰촨성의 고위 관리로 있던 번윤단(燔允端)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20여 년 동안 조성했다는 곳이다.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복잡하고 소란스런 위위안 상창(商場)이란 시장통을 지나야만 했다. 좁은 길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길을 잃으면 한참 헤맬 것 같았다. 길 좌우로 고개를 내민 건물들은 중국 남방의 전통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라 처마 끝이 하늘을 향해 들려 있어 무척이나 날렵해 보였다.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상하이 위위안 상창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는 파차이관(發財官). 표정이 아주 익살스럽다.

    그곳 상점에는 한눈에 봐도 없는 게 없는 듯했다. 식당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쟈오쯔(餃子)가 식탁에 오르고, 옷가게에선 양장과 치파오(旗袍)가 함께 걸려 있었다. 백화점에선 종업원들이 일본어와 한국어로 연신 조잘댔다. 여기에 골동품상과 영화관, 오락실, 기념품 가게들이 가세했다. 최근 문을 연 스타벅스 커피숍도 보였다. 중국 전통 건물에 들어 있는 커피숍은 스타벅스가 중국에 상륙했다기보다는 중국 속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줬다.

    위위안 상창의 중심은 각종 상하이 요리를 파는 레스토랑. 파차이관은 그 바깥 모퉁이에 서 있었다. 높이는 2.5m 정도로 꽤 컸고 생긴 모습은 익살스럽다. 투입구에 동전을 집어넣으면 돈을 벌 수 있는 요령을 가르쳐준다고 되어 있었으나 중국어를 못해 사진만 찍었다. 그러나 파차이관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도 2위안(元)의 ‘거금’을 내야 했다. 얼마나 돈을 벌고 싶었으면 이런 아이디어까지 짜냈을까.

    생각해보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천재지변 등으로 늘 가난과 함께 살았던 그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돈을 버는 것밖에 없었다. 공허한 정치보다는 빵으로 바꿀 수 있는 돈이 그들에겐 더 중요했다. 그런 만큼 돈에 대해서는 떳떳할 수 있었다.

    돈을 버는 방법으로는 농사도 있고, 관리가 되는 길도 있었지만 뭐니뭐니해도 장사가 최고였다. 관리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농사는 아무리 잘 지어도 고생한 만큼의 대가 정도를 얻는 데 그치고 말기에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사였다.

    ‘상인종’ 원조는 商나라

    장사를 일컫는 ‘상(商)’이란 말도 중국에서 태어났다. 상은 원래 기원전 1500년경 황하(黃河) 유역에서 일어난 왕조와 그 왕조가 지배한 시절을 의미한다. 은(殷)이라 불리는 왕조의 처음 이름이 상이었다. 한자의 조상이 되는 갑골문자와 청동기 문화는 상 왕조가 남긴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상은 주(周) 왕조에게 무너졌다. 그리하여 졸지에 떠돌이 신세가 된 상의 유민들은 장삿길에 나섰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장사하는 이들을 상나라 사람, 곧 상인이라 불렀다.

    중국에 화폐가 등장한 것도 공교롭게 이때부터였다. 1997년 상하이의 중심지구인 런민(人民)광장 한 곳에 현대식 건물로 지어 문을 연 상하이박물관 화폐실에서 이 사실을 똑똑히 확인했다. 거기에는 아주 먼 옛날 화폐 대용으로 썼던 조개껍질 형태의 패화(貝貨)에서 청나라 말기의 지폐에 이르기까지 중국 대륙에서 통용됐던 각종 화폐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원전 21∼16세기 하(夏)와 상 왕조에서 쓰였던 패화는 주나라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금속화폐라 할 수 있는 포전(布錢)으로 바뀌었다. 그때가 기원전 8세기, 상나라 유민들이 상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던 시기다. 이는 또 에게해의 상권을 장악하며 해상무역 국가로 발돋움한 그리스에 코인(coin)이 등장하기 200년 전이다.

    여기에서 포(布)는 농기구 모양으로 생긴 금속화폐로 베(布木)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시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기에 그런 모습을 갖게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데, 아무튼 포는 800년 넘게 사용됐기 때문인지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처음엔 실제의 농기구를 빼다 박은 듯하던 것이 후대로 내려오면서는 상당히 동떨어진 모양으로 변했다.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칼 모양으로 생긴 도전(刀錢)으로 춘추전국시대 제나라를 중심으로 쓰였다.

    옛 동전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엽전(圓錢)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화폐개혁을 실시하면서 내놓은 회심의 역작이었다. 이때에 들어서야 중국의 화폐는 비로소 서양의 코인처럼 둥근 형태를 띠게 된다.

    하지만 코인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우선 표면에 새기는 도안 자체가 달랐다. 그리스·로마에서는 왕의 초상이나 신의 형상, 또는 이삭(穗)의 모양을 새겼으나, 중국인들은 글자를 새겼다. 두 번째 차이점은 엽전에는 한가운데 구멍이 나 있다는 것이다. 그걸 이용해 꾸러미로 엮으면 많은 엽전을 휴대할 수 있기에 그만큼 효용가치가 높았다.

    돈은 돌고 돈다고 해서 돈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하지 않던가. 돈은 유통돼야 하는 것이다. 유통 속도가 느리면 더 많은 화폐를 찍어내야 한다는 점에서도 문제이지만, 경제활동이 지지부진하다는 것을 뜻하므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현대 경제학에서도 그대로 진리다.

    이같은 중국인들의 생각은 장방형의 지폐를 두고서도 원(圓·지금의 ‘元’은 ‘圓’의 약자다)이란 명칭을 사용했던 것을 보면 그보다 훨씬 후대인 청대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붉은색을 좋아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붉은색은 처음에는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벽사(?邪)의 의미로 쓰였으나, 붉은색을 띤 피가 온몸을 잠시도 쉬지 않고 돈다는 것을 알고는 유통의 의미로 사용한 것이다.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상하이박물관의 화폐실에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각종 화폐가 전시돼 있어 중국 경제사를 일견케 한다.

    상나라 유민들의 예에서 보듯 상인의 역사는 자기가 사는 땅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시작됐다. 땅을 가진 자는 농사를 짓고도 먹고 살 수 있기에 굳이 낯선 사람들과 부딪쳐가며 힘들게 장사를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땅을 빼앗겼다거나 다른 어떤 이유로 그 땅에 머물지 못하게 된 자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관리는 더더욱 될 수 없다.

    하지만 중국은 넓다. 다양한 물산이 나지만,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생산자가 그것을 모두 소비하는 것도 아닌지라 누군가가 그 둘 사이를 이어줘야 한다. 상인이 그 일을 했다.

    세계 3대 상인종이라 일컬어지는 중국인, 유대인, 아랍인들은 한결같이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태어나 자기 나름의 상술을 터득했다. 그들이 자랑하는 상술이란 달리 말하면 그들 특유의 생존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들이 그것을 무기로 삼지 않았다면 그 험난한 세월을 어떻게 견뎌왔겠는가.

    중국인들의 돈에 대한 애착은 참으로 끝이 없는 듯하다. 궁시파차이와 파차이관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숫자가 쓰이는 곳이면 으레 8자와 9자를 등장시킨다. 8은 파차이의 ‘파(發)’와 발음이 같다고, 9는 오래간다는 의미인 ‘져우(久)’의 발음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숫자 중에서 최고로 치는 것은 8899다. ‘發財久久’란 뜻이니까.

    위위안 상창의 스타벅스 커피숍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집어온 ‘차이나위크’의 별책부록엔 광고들이 잔뜩 실려 있었는데, 큰 호텔과 레스토랑의 전화번호에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88이나 99가 들어 있었다. 예를 들어 암브로시아 호텔은 6431-4988이고, 사계헌(四季軒) 호텔은 6256-8888, 푸둥 샹글리라 호텔은 6882-8888이다. 최고급 빌라인 시마마오 레이크사이드 가든은 6888-9888이다.

    전화번호뿐만이 아니다. 웬만한 큰 빌딩의 번지수도 대개 88이나 888이다. 휴대전화 번호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끝자리가 8888인 번호는 5000위안(80만원)을 호가하는 데도 없어서 못 팔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런 중국인들에겐 또 하나의 특이한 습성이 있다. 상점에서 첫 손님을 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만약 첫 손님 때문에 기분이 상하면 그날 하루 종일 장사가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청소를 할 때도 밖에서 안으로 한다. 재물이 들어오라는 뜻에서다. 더러는 ‘재(財)’자가 쓰인 괘도를 옆으로 걸어놓고 가로로 누워야 횡재할 수 있다며 소파에 가로로 눕기도 한다. 이래서 중국인들은 24시간 돈 벌 생각만 한다고 말하는 모양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이 쌓이고 쌓여 그들 특유의 상술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평소엔 ‘慢慢的’, 돈벌이엔 ‘快快的’

    중국인의 상술 중 으뜸으로 치는 것은 박리다매(중국인들은 이를 ‘薄利多鎖’라 쓴다), 즉 이문을 적게 남기면서 많이 파는 것이다. 장사는 이문을 남기려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첨병이라 할 수 있는 기업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이윤의 창출에 둔다. 그렇다면 이문을 많이 남기고 팔아야 할텐데, 왜 그들은 이런 상식을 무시하고 적은 이문에 만족하는 것일까.

    큰 이문을 얻고자 가격을 올리면 한동안은 재미를 보겠지만, 그런 상태가 오래가지는 못한다. 이윤 폭이 커지면 새로운 경쟁자가 시장에 진입할 것이고, 그들이 덤핑 공세를 펴기라도 하면 그때까지 누리던 우월한 지위가 단박에 흔들릴 수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다. ‘한탕’이나 ‘대박’을 노린다면 몰라도 평생, 나아가 자손 대대로 그 일을 가업으로 물려줄 생각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

    박리다매는 소비자들에게도 고마운 일이다. 런던 소호가의 중국식당 옹케이나 뉴욕 맨해튼의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중국식당 합키는 바로 이런 전략을 구사해 성공을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 유럽 여행중 낯선 여행자들로부터 “친절하진 않지만 비교적 싼 값에 괜찮은 중국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봤는데, 과연 듣던 대로였다. 특별히 선전하거나 돈을 들여 광고하지 않는다는데도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차례가 오려면 30분 정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데도 손님들은 불만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자신이 키운 과일을 거리로 들고 나와 파는 농민. 본업은 농민이지만 장사꾼 기질이 다분하다.

    우리는 돈을 일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수단쯤으로 알고 있다. 수단이라는 게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평생 하겠다는 사람을 만나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대개는 지금 하는 일로 돈을 좀 모은 다음, 정작 하고 싶은 것은 그때 가서 본격적으로 하겠다고 답한다.

    정작 하고 싶은 일을 이루는 데 있어 돈이 불가결한 요소라면 돈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돈 버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상인은 소비자를 속이려 하지 말고 싼 값에 질 좋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아야 할 것이고, 관리는 국민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그때그때 파악해 필요한 처방을 미리 마련해야 한다. 학자와 문인, 예술가는 자신의 경험과 혼을 바쳐 연구 실적이나 작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기본 자세다. 또한 그래야만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도 살찌울 수 있다.

    만만디(慢慢的). 이는 중국인의 여유로운 생활 태도를 일컫는 상징적인 말이지만, 그들이 늘 천하태평인 것은 아니다. 그들도 돈을 버는 일과 맞닥뜨리면 평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때는 그들 말마따나 ‘콰이콰이디(快快的)’가 되는 것이다.

    늦은 밤 서울 영등포역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총알택시는 중국에도 있다. 한가한 고속도로에선 시속 170km까지 밟아댄다. 버스터미널이나 시장통에선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장거리 합승버스는 차 길이에 버금가는 철근을 바닥에 싣고 달리기도 한다. 한 사람의 손님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먼저 탄 승객의 불편함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피드보다 지구력으로 승부

    타이산(泰山)이나 황산(黃山)과 같은 이름난 산에 가보면 혼자 걸어오르기도 힘겨운 가파른 계단을 무거운 짐이나 사람을 메고 묵묵히 오르는 짐꾼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정부가 발급한 영업허가증도 갖고 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아끼지 않는 게 중국인이다. 그런 행동은 비단 생계만을 위한 것으로 보기도 힘들었다. 자신의 존재감과 성취감, 그리고 유용성을 확인하는 기회로도 삼는 듯했기 때문이다.

    박리다매라고 하면 이문이 없는데도 경쟁 때문에 손해를 봐가며 물건을 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밑지는 장사란 곧 본전을 까먹는 것이므로 그렇게 할 바에야 문을 닫고 만다. 그들은 장사를 오래 계속하려면 원금 정도는 쥐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그들은 “어쨌거나 공장은 돌려야 할 것 아니냐”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밑지는 장사라도 해야 한다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장사가 좀 된다고 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공장부터 키우는 ‘생각 모자란’ 일은 아예 벌이지도 않는다. 시장의 동향을 무작정 따라가기보다는 자신이 그것을 주도하고자 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우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결국 큰돈을 만지는 사람은 오히려 그들이다. 그러면서도 속을 끓이지 않는다. 사소한 장세에 노심초사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박리다매란 그런 것이다.

    장사가 최고라고 해서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밑천도 있고 인맥도 있어야 한다. 이런 처지가 못 되는 농부는 자기의 논밭에서 키운 것들을 시장으로 끌고 나오고, 어부는 강이며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로 좌판을 벌인다. 봉급 생활자들은 자신이 일한 만큼 대가가 지불되기를 원한다. 개혁·개방 10년 만에 ‘철밥통’은 능률급, 성과급으로 바뀌었다. 돈의 대가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으면 그들도 이제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타이산(泰山)의 가파른 돌계단을 무거운 짐을 메고 오르는 짐꾼들. 돈을 벌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젊은이들도 창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대학은 이들을 적극 지원한다. 말로만이 아닌 구체적이고도 실천 가능한 산학협동이 중국 대륙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 선봉장은 대학 중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는 베이징의 칭화대(淸華大). 그들의 홈페이지(www.tsinghua.edu.cn)에 들어가 ‘産學協’을 클릭하면 그 현주소를 한눈에 살필 수 있다.

    중국인들에게도 시간은 이제 돈이다. 그러나 스피드, 즉 콰이콰이디가 돈과 직결된다고 해서 그들이 미국식 기업들이 구사하는 스피드 경영을 따라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벌이고 있는 것은 지구력 게임이다. 스피드와 반대 개념인 지구력으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들의 본바탕에는 흥정의 습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흥정(bargain)이 없는 거래가 어디 있으랴만, 중국인들의 흥정은 좀 특이하다. 사는 자와 파는 자가 벌이는 흥정이 지구력 게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흥정에서 승패를 가르는 것은 스피드가 아니라 인내력이기 때문이다. ‘메이파쯔(沒法子)’. 이것 또한 중국인의 특성을 일컫는 말인데, 인내를 뜻한다.

    그들의 인내력은 전쟁과 천재지변, 포악한 정치 등을 견디며 장구한 세월에 걸쳐 담금질된 것이라 따를 자가 없다. 그러니 그들과 거래할 때는 덤비지 말아야 한다. 조급하게 덤빌수록 그들은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선다. 그러다 보면 크게 당하기 십상이다.

    가족경영과 꽌시(關係)

    장사엔 이처럼 인간의 내면적인 힘까지 동원되는 까닭에 중국인들은 장사를 단지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보는 것이다. 장사의 요체는 결국엔 사람으로 귀착되고 만다. 중국 상술의 한 특징으로 지적되고 있는 가족경영 방식과 시(關係) 중시 태도는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장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큰 장사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사람을 끌어들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란 동업자일 수도 있고, 투자자일 수도 있으며, 원료나 자재를 공급해주는 중간 생산자일 수도 있다. 때로는 자신의 물건을 사주는 소비자가 되기도 한다. 규모가 커지면 불확실성도 그만큼 커지므로 믿고 맡길 수 있고, 거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중국인들은 가족경영 방식을 택했다. 그래야만 거래비용과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책임경영이 가능하다고 믿어서다.

    물론 가족경영 방식은 서구 기업에서도 낯선 형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 있는 전문가에게 경영을 맡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따른 리스크는 보험이나 다단계 의사결정 방식 등을 통해 분산한다. 이에 비해 중국인들은 제도보다는 그것을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인간을 찾는다. 제도란 결코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했기 때문이다. 제도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중국인들은 가족기업이라고 해서 사주(社主)의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리를 선뜻 내주지는 않는다. 자식을 능력 있는 경영자로 키운 다음에야 그렇게 한다. 유대인들이 밥상머리에서 돈의 가치와 사용법 등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듯 그들 또한 어릴 때부터 경영자 수업을 시킨다. 대개의 가옥 구조가 1층은 가게, 2층은 살림집이라 굳이 따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자식들은 부모가 흥정하는 것을 보며 기본기를 익히게 된다. 이런 노력이 있기에 가업이 몇 대에 걸쳐 승계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우와 매우 대조적이다. 외환위기 이전 30대 기업 명단에 들었던 회사 가운데 지금 몇 개가 그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못 속에 있는 물오리는 태평스러워 보이지만 수면 아래의 두 다리는 쉬지 않고 물을 차내고 있듯이 기업이 시장의 변화에 견디려면 한시라도 나태해질 수 없는 것이다.

    시는 가족의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인들은 인터넷을 ‘인특망(因特網)’이라 번역한다. 그렇다면 시를 ‘인특망(人特網)’이라 해도 되지 않겠는가. 시는 지역과 학교, 클럽, 결혼, 거래 등을 통해 가까워진 사람들끼리 짠 인간의 그물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타인과 의견교환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ID를 로그인해야 하듯 인특망에 접속하고자 할 때에도 그와 같은 절차를 거쳐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밝혀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인내·관인술·박리다매로 富  거머쥔 ‘商人種’

    ‘삼국지’의 의인(義人) 관우는 ‘비즈니스의 신’ 으로 떠받들어진다. 장사는 의(義)를 바탕에 둬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신뢰는 신용(credit)과 다르다. 신용은 은행에서 개개인의 신용도를 숫자로 표시하듯 계량화가 가능하다. 책임의 유한성을 전제로 해서이다. 이에 비해 신뢰(trust 또는 faithfulness)는 무한책임을 전제로 하기에 계량화가 불가능하다. 제도에 대한 불신이 신용보다는 신뢰를 더 선호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신뢰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인 바, 요즘 유행하는 광고 카피의 표현을 빌리면 ‘신뢰야말로 중국 상술의 숨어 있는 1인치’인 것이다.

    문제는 그 숨어 있는 1인치를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것인데, 중국인들은 이에 대해서도 나름의 해답을 내놓았고, 또 실천해왔다.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관인술(觀人術·physiognomy)이 바로 그것이다. 고전을 두루 섭렵하면서 감인술(鑑人術)을 연구한 룽쯔민(龍子民)이 관인의 요령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은 ‘중국 감인 비결’(2001년 6월 발간)을 보면 관인은 관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상의 목적이 그 사람의 성격과 운을 알아내는 데 있다면, 관인술은 그 사람의 내면세계와 행동거지까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이목구비와 신색(身色) 등과 같은 용모는 물론, 표정과 덕, 재능, 혈기, 처세, 언변과 언술까지 살핀다. 그런 다음 자신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판단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된 ‘상경(商經)’의 주인공 호설암(胡雪巖)은 인간관계가 금전보다 훨씬 중요하다며 “상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은 사람을 제대로 쓸 줄 아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 중시의 경영을 몸소 실천한 그는 인간관계의 출납부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굳이 그의 어록을 들추지 않더라도 손자(孫子)가 ‘병법’에서 “남을 알고 나를 알면 어떠한 싸움에서도 지지 않는다”고 한 것만 기억하고 있어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들어내는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져 나쁠 것은 없으리라.

    상하이의 위위안 상창에서 내 눈을 끈 게 또 있다. 파차이관이 서 있는 곳에서 70∼80m 떨어진 성황묘(城隍廟)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향을 피우며 연신 고개를 숙여 절을 하고 있었다. 성황묘는 도교사원이지만, 토지신을 모시고 있어 예로부터 풍요를 기원하는 제사가 올려졌다. 그래서인지 내부에는 재신전(財神殿)도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은 그곳을 향해 있었다. 도(道)와 재(財)는 도대체 어떤 관계에 있기에 성황묘 안에 재신전을 둔 것일까.

    그때 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중국 곳곳에 세워진 관제묘(關帝廟)였다. ‘삼국지’에서 조조에게 붙잡혀 조조가 자신을 따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을 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나는 유비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어 함께 죽기로 맹세한 사이로 절대 배반할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곳에 머물지 않을 것이나 반드시 수훈을 세워 조조 전하에게 은혜를 갚고 떠날 생각”이라고 대답하는 등 평생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은 사나이 관우(關羽)를 중국인들은 의(義)의 상징적 인물로 생각하며 관제묘를 세웠다.

    그런 관우가 비즈니스의 신으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국 역사상 상업이 가장 발달했던 송나라 때부터였다. 관제묘 역시 그때 우후죽순처럼 지어졌다. 관우가 재신으로 추앙받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중국의 부기법인 산법(算法)을 관우가 발명했다는 것이 그 하나이고, 관우의 출생지가 유명한 산시(山西) 상인의 고향인 산시성이라는 것이 또 다른 이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의 이유로 관우가 비즈니스 신으로 추앙받는다고 믿기에는 뭔가 허전하다.

    으뜸 상인은 산시성 ‘晉商’

    중국인들에게 이(利)와 의(義) 가운데 하나만 택하라고 하면 대개 의를 택한다고 한다. 이는 잃어버려도 곧 되찾을 수 있지만, 의는 한번 무너지면 영원히 회복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그들이 이런 의식을 갖게 된 데는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유교의 가르침이 한몫했겠지만, 그것만이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인 그들인지라 오랜 경험을 통해 그것이 검증되지 않았다면 공자가 아니라 천제(天帝)가 강요한다고 한들 따를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자본주의는 도덕성에서 출발한다고 지적한 막스 베버보다 훨씬 앞서 의가 이의 근본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일찍이 음양의 이치를 터득한 터라 그들은 모든 사물을 양극단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와 의가 서로를 배척하는 관계에 있는 듯하나 그들은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단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 이라면 의는 그것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는 차이 정도로 인정할 뿐이다.

    그렇지만 단기적으로 볼 때 이득이 된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그들은 장기적 관점에서 득이 되는 쪽을 택한다. 그게 바로 그들이 생각하는 의인 것이다.

    그들이 눈에 보이는 금전보다 인간을 중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순간 이를 챙기려는 잡상은 소비자를 속이거나 술책을 부리곤 하겠지만, 멀리 내다보고 장사를 하는 거상은 결코 그런 속보이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술보다는 상도(商道)에 주목한다. 의란 인간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처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제묘나 성황묘의 재신전에 참배한다는 것은 술(術)의 단계에서 도(道)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의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걸 통해 그들은 이와 의의 균형을 도모코자 한다. 그들은 결코 ‘돈벌레’가 아니다. 중국이 자랑하는 10대 상방(商房)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이는 쉽게 증명된다.

    10대 상방의 으뜸은 관우의 고향 산시성을 터전으로 한 진상(晉商)이다. 이들의 특징으로는 적극성과 근검, 절약, 신의, 공동경영, 업종 다양화 등이 꼽힌다. 황산 아래 안후이성(安徽省)을 중심으로 한 휘상(徽商)은 성실성과 인(仁)의 자세로 손님을 대하는 것으로 이름 나 있다. ‘상경’의 주인공 호설암도 휘상 출신이다. 남부의 광둥(廣東) 상인은 혈연·지연의 결속력이 강하며 매사에 적극적이라 해외 무역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광둥 상인과 라이벌 관계에 있는 푸젠(福建) 상인은 목전의 이익보다 먼 장래를 내다보고 거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가 생겨난 월(越)나라의 터전도 바로 이 푸젠성이다. 푸젠성 북쪽의 항구도시 닝보(寧波) 상인은 부단한 시장 개척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경영전략을 구사한다.

    닝보와 또 하나의 상업도시 윈저우(溫州)를 거느리고 있는 저장성(浙江省)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 상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땅이다. 이곳 출신의 사업가들이 지금 상하이 대기업의 40%를 차지한다. 그들은 자기네 고유의 기업가 정신을 21세기에 되살리려 하는 것이다.

    산둥(山東) 상인은 주식회사, 합자회사 형태를 가장 먼저 선보인 상인 집단으로 혼자서는 사업을 하지 않는 특이한 습성을 갖고 있으며, 산시(陝西)성의 섬상(陝商)은 모험심과 적응력, 인내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내륙지방 쓰촨의 상인은 협(俠)의 고장 출신답게 신의를 중히 여긴다.

    경제 춘추전국시대

    중국 각지의 상인들은 지리적 여건과 그 땅의 산물 등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과 활동영역을 갖고 있으나 신의와 인내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다. 장사란 자신의 인격을 파는 예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 변혁의 와중에 있다. 그 중심은 물론 돈이다. 돈을 버는 방식도 바뀌고 있으며, 그것을 쓰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IT산업이 뜨고 있으며, 그 동안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서비스 정신도 서서히 살아나고 있다. 소비자들은 좀 비싸더라도 서비스와 분위기가 좋은 곳을 찾는다. 이름난 고급 레스토랑은 늘 사람들로 붐비고 유명 브랜드 상품은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이에 발 맞춰 백화점도 밤 10시가 돼야 문을 닫는다.

    지난 10년 사이에 소득이 크게 늘어난 탓도 있지만, 정부가 나서서 “벌어들인 돈은 그때그때 써야 나라가 산다”면서 소비를 부추긴 바도 크다. 그 목적은 두 가지. 하나는 내수시장을 키워 생산 기반을 늘리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다. 시장이 커야 그들이 욕심을 낼 테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2500년 만에 또 한 번의 춘추전국시대를 맞았다. 이번의 것은 정치와 사상의 그것이 아니라 경제의 춘추전국시대다. 다양한 주장과 경영방식, 소비형태가 중국대륙을 달구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를 잘 넘기기만 한다면 세계시장은 ‘중국 가격(China Price)’에 맞춰 재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돈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생활태도야말로 자본주의 체제와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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