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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뽑새들의 지렁이 잡이

  • 글: 강기영

뽑새들의 지렁이 잡이

2/12
새로 온 이민자나 서민을 상대로 항상 바겐세일을 하는 할인매장을 뒤져 장화와 비옷을 구했다. 조잡하지만 값이 싼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었다. 하지만 삽이나 곡괭이로 땅을 파서 지렁이를 잡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 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가끔 잡동사니를 사던 교포 편의점에 들러 손님이 뜸할 때를 기다렸다. 어색함을 감추려 내 딴에는 너스레까지 떨다가 슬쩍 화제를 지렁이로 돌렸다.

“지렁이를 잡는 일이요? 경험삼아 해보는 것도 괜찮지요. 처음에는 다 그러면서 시작하는 거지요. 지금 교포 사회의 터줏대감들 중 뽑새 출신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럼 사장님께서도…?”

“아닙니다, 나는. 우리 집사람이 하루 밤 나갔다가 기겁을 하고 속옷까지 적셨으니 뽑새 출신이랄 것도 없지요.”

편의점 주인은 겉으로 본 느낌과는 달리 솔직한 데가 있었다. 어느 정도 성공하고 보니 이민 초창기에 겪은 고생이 부끄러울 것도 없는 모양이다.



“뽑새라니요, 그건 뭡니까?”

“지렁이를 땅에서 뽑는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죠. 나같이 가게에서 계산기를 찍으면 찍새, 바닥을 닦는 청소 일은 딱새라 하죠. 아마 맨주먹으로 이민 와 밑바닥부터 기었다는 자조 섞인 말일 겝니다.”

남의 가게 점원으로 짐을 나르고 계산기도 찍으면서 시작해 결국 큰 가게의 주인이 되었으니 그 고생이 막연하게나마 짐작됐고 그에 대한 선입견도 어느 정도 가셨다. 그리고 지렁이는 땅을 파서 잡는 게 아니라 밤에 밖으로 기어나온 것을 손으로 잡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색이 취직이라고 출근시간까지 정해졌지만 나를 데리러 온다는 사람의 이름이나 인상착의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서성이는 내 앞에 시간만은 정확하게 낡은 밴 트럭 한 대가 와서 멈췄다. 트럭은 낡기도 했지만 방금 전쟁터를 뚫고 온 군용차량처럼 진흙과 먼지가 덕지덕지 덮여 있었다. 말쑥한 차림의 인파 속을 누더기를 걸친 거렁뱅이가 활보하는 격이었다. 이 트럭처럼 내 인생이 진흙탕으로 빠져드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잠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차에 오르자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언젠가 큰 비가 지나고 습기가 눅눅히 밴 뒷골목에서 쓰레기통 옆을 지날 때 맡았던 생선 냄새와 비슷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은 이런 분위기에 썩 잘 어울렸다. 예상대로 몸집이 크고 살집이 좋은 게 좀 둔해 보였다.

“타쇼!”

생긴 대로였다. 멋대가리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리 길바닥에서 만났지만 그래도 초면이고 앞으로 인연을 만들어갈 텐데 너무하다 싶었다. 그는 별달리 할 말이 없다는 태도였지만 그렇다고 나도 똑같을 수는 없었다. 나이를 짚어보니 나와 비슷하거나 두어 살 아래로 보였다. 나 역시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한 편은 아니지만 그런 것을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이러저러한 내 넋두리에 묵묵히 운전대를 잡고 있던 그가 아주 딴전을 치지는 않았는지, 내 말이 잠시 쉬어갈 무렵 자신을 소개했다.

“나 구사장입니다.”

생기발랄한 미스 차

몇 번인가 커브를 돌아 차는 평범한 가정집 앞에 멈췄다. 나처럼 약속이 있었는지 차가 멎기 무섭게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을 던지며 젊은 여자가 올라왔다. 키는 작은 편이지만 통통하고 생기발랄한 몸놀림이 경쾌했다. 내가 무엇을 하러 가는 신분인지도 잊은 채 옷매무새를 만지려다 머쓱해졌다. ‘내 나이가 몇인데…’

알을 낳으러 하천으로 올라오는 연어는 생식기능 외에 다른 기능은 이미 퇴화되어 있다. 소화기능도 정지되어 위 속이 말끔히 비어 있다. 그런데도 앞에서 먹이 같은 것이 움직이면 평소 습관대로 달려들어 공격한다. 연어낚시에서 별난 미끼를 다 쓸 수 있는 것도 연어의 이런 습성 때문이다.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나이를 먹어도 긴장되는 것은 이런 연어의 습성과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 타신 아저씬가보다. 안녕하세요, 미스 차예요. 그런데 오늘은 아저씨한테 자리를 뺏겼네.”

그러고 보니 나는 운전석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고, 트럭에서 자리다운 자리는 이것 하나뿐이었다. 유리창은 앞과 뒤쪽에만 있었다. 뒷자리로 가는 젊은 아가씨를 보며 나는 어정쩡할 수밖에 없었다. 응당 앞자리를 젊은 아가씨에게 양보해야겠지만, 나이로 따져서 선뜻 응할 것 같지 않았다.

자동차는 골목골목을 돌고 돌며 나말고도 다섯 명을 더 태우고 나서야 시내를 빠져나갔다. 도시 외곽으로 나가자 도로도 넓어지며 듬성듬성 아파트 군락이 보였다. 토론토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도시 외곽으로 나오기는 처음이었다.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자 건물의 규모가 점점 커지며 깨끗해져 나 혼자만 속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자리를 미스 차에게 양보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교수님의 강의 내용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범생처럼 큰길의 표지가 나올 때마다 그 이름을 기억하느라 온 정신을 쏟았다. 머리 속에 백지를 펼쳐놓고 약도까지 그려나갔다.

미스 차가 차에 오를 땐 예상이 빗나가는 줄 알았다. ‘지렁이잡이’로 돈벌이에 나서는 사람이라면 후줄근한 노동자풍일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녀의 외모가 출중했기 때문이다. 생소한 일을 나가며 처량한 기분에 젖어 있던 나에게 그녀는 적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저렇게 멋쟁이 아가씨가 하는 일이라면 지렁이잡이도 어엿한 직업일 것이다.’ 그러나 시내를 돌며 한 사람 한 사람 태울 때마다 처음 예상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차는 하이웨이를 한시간 반을 내달린 뒤 갓길로 빠졌다. 도착한 곳은 골프장이었다. 이미 어두워진 골프장은 아무도 없이 적막했다. 넓은 주차장 한 편에 차를 세우고 앞뒤 문을 열자 사람들이 내렸다. 밴 트럭 뒷문과 의자 사이의 공간은 지렁이를 잡을 때 쓰는 도구로 가득했다. 미스 차를 위시해 네댓 명은 주섬주섬 도구를 챙겼지만 서너 명은 나와 같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도 나와 같은 초행자였다. 구사장은 초보자들을 세워놓고 지시 사항을 설명했다. 자유스러운 분위기였지만 초보자들은 훈련소에 막 끌려온 신병들처럼 고분고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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