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는 1997년과 2002년 두 번에 걸쳐 캄보디아를 가보았다. 두 번의 현지 취재에서 필자는 캄보디아를 할퀸 20년 내전의 상처가 좀처럼 치유되기 힘들 것이라고 느꼈다. 내전의 깊은 상처가 많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류사에 대량학살 또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현상을 낳았다. 동남아시아의 작고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가 겪어온 비극은 외풍 탓이 크다. 80년 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1953년 겨우 독립을 쟁취했지만 곧 베트남전의 불똥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1960∼70년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에 미국은 캄보디아 동부 베트남 접경지대의 ‘호치민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적대세력(북베트남군과 베트남인민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공습을 하곤 했다. 이로 인해 숱한 캄보디아 농민들이 목숨을 잃고 생활 터전을 빼앗겼다. 그래서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killing field)’는 크메르 루주 치하의 70년대가 아닌 60년대에 이미 시작됐다”는 비판마저 일었다. 캄보디아에서의 대규모 공습과 군사정권 지원 등 미국의 정치·군사적 개입은 지금도 논쟁거리다.
베트남전쟁이 끝난 후에도 캄보디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다. 곧 동서냉전의 대리전 성격을 지닌 내전이 벌어지는 비극을 맞은 것. 미국·중국·옛소련·베트남을 포함한 주변 열강들은 캄보디아에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었고, 그로 인해 내전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내전이 끝난 것은 동서냉전이 막을 내린 1990년대 들어와서였다.
전쟁으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대사는 크게 5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 1단계(1953∼60년대 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베트남전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기 직전까지다. 이 시기는 시아누크 국왕이 중립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호치민 루트’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결정했고 이에 미국은 1960년대 말부터 남베트남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공산군을 친다는 구실로 공습을 벌이곤 했다.
2단계(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 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 루주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그 무렵 미국은 B-52기를 투입해 대규모 공습을 자행했고 이때 수많은 캄보디아 농민들이 공습에 희생됐다. 하지만 닉슨 미 행정부는 공습 자체를 없는 일로 부인해왔다.
3단계(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군에 함락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살벌했던 기간이다. 이상적인 자치농경 공산사회를 건설하겠다며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폈던 폴 포트 정권 치하에서 약 170만명의 사람들이 처형과 굶주림으로 죽었다. 이른바 ‘킬링 필드’의 시기다.
4단계(1979∼91년)는 10만 베트남 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베트남 정부군과 폴 포트의 크메르 루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기간이다.
5단계(1991년∼현재)는 파리평화협정 체결 뒤 유엔평화유지군 1만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TAC)의 선거 감독 아래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선 후 잇단 정치불안 속에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는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