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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시론

‘도덕적 문화국가’ 전통 이어 세계평화 선도하자

광복 60년, 세계사 속의 한반도를 생각한다

  •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 ojjung@snu.ac.kr

‘도덕적 문화국가’ 전통 이어 세계평화 선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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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군사대국 청나라에 대해서는 무법자라는 인식에 따라 그에 심복하지 않고 이미 멸망한 명나라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파병하여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우며 불망지의(不忘之意, 은혜를 잊지 못하는 뜻)를 다졌다. 국가간에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논리로 유교문화권의 공동선에 입각하여 조선의 입지를 다지려는 의도였다.

두 번의 전란으로 무너진 사회기강과 질서를 세우기 위해 예치를 주요 현안으로 삼았다. 예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경(愛敬)을 극진히 여기는 준칙이다. 사랑과 존경이 없으면 그 사회가 비인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인식의 소산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인간관계의 회복이 급선무이던 조선사회에서 무너진 사회정의를 일으켜 세우고 질서를 회복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문화국가의 정통성 자부

그로부터 환갑이 되는 1704년 갑신년에 조선 후기 사회는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문화국가로 우뚝 서서 명나라를 계승하는 동아시아의 문화중심국가가 바로 조선이라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선포하고 그 구체적 장치로서 대보단(大報壇)을 만들어 왜란 때 도와준 신종 황제의 제사를 지냈다. 대보단은 후에 마지막 황제 의종과 명의 건국시조인 태조까지 합하여 삼황(三皇)을 함께 제사지내게끔 보완됐다. 대보단은 비록 청의 무력에 굴복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최고라는 문화자존의식과 함께 유교문화의 적통(嫡統) 계승자라는 의식의 발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조선은 또한 문화국가의 정통성이 자신에 있다는 자부심을 키웠다. 무력으로 평화적 국제질서를 교란한 일본이나 명을 무너뜨리고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는 침략과 약탈을 일삼던 야만이므로 동아시아의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사회의 자부심 회복과 정체성 확립과 관련되며 이후 조선은 문화대국이라는 자부심으로 조선 고유의 문화 창달에 성공했다. 숙종 후반기와 영조·정조대인 18세기는 진경문화로 알려진 조선의 문예부흥기였다. 전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군사대국 청에 대응하기 위해 문화국가로서의 자부심을 키우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조선 후기, 우리 조상들은 강력한 군사대국인 청나라를 앞에 두고도 불굴의 자세로 자신의 방향성을 세우고 자부심을 회복했으며 문화대국의 의지를 키웠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는 문화적 도덕국가로 거듭나고 200년 넘게 평화기를 누렸다. 그러한 평화는 조선이 자주국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내수외양(內修外攘, 내치를 닦아 외적을 물리친다)의 기치 아래 국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도 각기 내치에 주력하던 국제정세에도 힘입은 것이었다.

19세기 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 이르러 우리는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직면했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어 광무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서구제국주의의 팽창과 동양진출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영세중립국의 꿈은 무산되고, 마침내 전통적으로 힘의 논리에 익숙하여 재빨리 서양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었다. 결국 평화공존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겨야 했던 것이다.

근대적 민족주의 함정 경계해야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서는 지난 세기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역사의 창(窓)으로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에 따라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이 세상에는 변치 않는 가치나 원칙이 있다. 예컨대 진(眞), 선(善), 미(美)와 같은 가치나 효도의 의미는 시간이 아무리 경과해도 변치 않는 진리일 터이고 인류애나 애국심도 변치 않는 가치라고 생각된다.

지나간 세기에 이 두 가치는 상반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애국심은 민족의식의 발로요, 민족의식은 민족이기주의의 표출에 불과하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따라서 애국심에만 무게중심을 두면 보편적인 인류애를 확대하는 저해요인이 된다고 이해됐다. 일본의 황국신민의식이나 독일의 나치즘같이 세계를 전란의 소용돌이에 밀어넣은 종족우월주의는 저급한 민족이기주의이며 제국주의의 원흉이라는 인식도 이러한 사고의 기저에 깔려 있다.

세계의 여러 민족과 국가는 나름대로 민족적 특성과 고유 문화를 갖고 있으므로 각자의 우수문화를 계발 발전시켜 세계문화에 기여하도록 하되, 그 고유성과 정체성을 지키게끔 배려할 때 세계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수 있다. 그러한 기초가 다져질 때 세계의 모든 민족은 더불어 살아가고 함께 번영할 것이다. 세계주의나 세계화의 논리가 대국이나 강국의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한계성을 경각(警覺)하되 민족이기주의와 민족간 갈등과 투쟁이라는 근대적 민족주의의 함정에 침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원류는 우리의 전통시대, 아득한 옛날에 세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원대한 목표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지금과 가장 근접한 전통시대인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확인된다. 이는 그 시대에 세계의 문화중심국임을 자부하고 동방예의지국임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데서 분명해진다. 개개인 사이에 의리와 예의를 지켜야 하듯, 국가간에도 의리와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은 투쟁이 아니라 상호존중의식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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