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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발굴

건국훈장 추서된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사회주의 독립운동 이끈 조선공산당 핵심 리더

  • 글: 김희곤 안동대 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heegkim2@dreamwiz.com

건국훈장 추서된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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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자영은 2004년 훈장이 추서된 독립유공자 중 가장 높은 등급으로 포상된 인물이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 연구자뿐이다. 약관의 나이에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었고 이후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 그리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하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나, 분단과 냉전으로 얼룩진 한국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이 젊은 혁명가를 애써 잊고 있었다.
건국훈장 추서된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2004년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된 독립운동가 윤자영(尹滋瑛·1894∼1938)은 44년이란 짧은 생을 살다 갔다. 성장기와 마감기를 제외하면 실제 그가 민족사에서 불꽃을 태운 기간은 겨우 13년 남짓하다. 게다가 그의 최후는 오리무중이었다. 마지막 활동지가 소련이어서 한동안 접근조차 힘들었고, 오랜 기간 남북한 모두에게 외면당했다.

3·1운동 현장을 통해 역사의 무대에 데뷔했고, 1920년대 전반기는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에서, 후반기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 활약했으며, 1930년을 전후해서는 국내 지하공작의 거점 확보에 힘쓴 윤자영. 강산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세월을 넘어 그는 우리 앞에 독립유공자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했다.

윤자영은 경상북도 산간오지인 청송군 청송읍 금곡동 749번지에서 태어났다. 출생시기가 1894년 혹은 1896년으로 엇갈리지만, 일단 판결문과 제적등본의 기록에 따라 1894년으로 정리하고 넘어간다. 그의 문중이 관직과 학문을 이어오긴 했지만, 바깥으로 크게 알려진 대성(大姓)은 아니었다. 그저 중소지주로서 가세를 유지했다.

그는 20세 전후에 상경해 빠르면 1913년 늦어도 1918년쯤에는 서울에서 살았다. 그가 1932년 중국공산당에 제출한 ‘이력서’에는 1913년부터 1919년 사이에 처음 민족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가장 가까운 후손인 조카 윤동규(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씨는 “백부가 경성공업전습소(경성전수학교) 도기과(陶器科)에 다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중단했다”고 전한다. 대학로에 있는 한국방송통신대학에 경성공업전습소 건물이 남아 있는데, 이것이 경성공업전문학교를 거쳐 서울대 공대가 됐다.



그의 존재가 확실하게 드러난 계기는 3·1운동이다. 경성전수학교 2학년 진급을 앞둔 그가 3·1운동 당시 학교 대표로 나선 것. 그는 당시 만25세의 나이 많은 학생이었다. 경성전수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해방 후 서울대 법대가 된다.

1919년 1월부터 여러 조직이 움직이고 있었다. 1월22일 광무황제(고종)의 죽음은 온 나라를 술렁이게 했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에 뜻 있는 인사들은 우리의 민족 문제를 세계회의에 상정할 기회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이 분주하게 회합을 가졌고, 각급 학교 학생대표들도 날마다 구수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3월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거대한 만세시위가 시작됐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3ㆍ1운동 학생대표의 주역

건국훈장 추서된 ‘잊혀진 혁명가’ 윤자영
윤자영은 바로 학생대표 중 한 주역이었다. 학생대표들이 3·1운동을 처음 계획한 시점은 고종 서거 직후인 1월23, 24일 무렵이었고 윤자영은 이보다 보름 정도 늦은 2월12일부터 참가했다. 음악회를 비롯 여러 형태의 위장 모임이 열렸는데, 그중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구내 숙소에서 열린 음악회에 윤자영이 경성전수학교 대표로 초청됐다.

이날 모임에는 윤자영 외에도 김원벽(연희전문), 김형기, 한위건(경성의학전문), 김문진, 배동석(세브란스의학전문)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운동의 정황과 민족대표의 동향, 동경 유학생들의 활동상을 전해들은 윤자영은 국내 학생들을 결집시키는 작업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각 전문학교별 활동책임자가 결정되면서 윤자영은 김성득과 함께 경성전수학교 책임자로 선정됐다.

2월20일 승동예배당에서 열린 제1회 학생간부회의는 학생들이 독자적인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의했다. 그 자리에서 역할분담이 이뤄졌다. 김성득 김형기 김문진 김원벽 김대우(경성공업전문), 강기덕(보성법률상업전문) 등이 각 학교의 학생 참여에 관한 일체의 업무를 담당하고, 윤자영은 한위건 이용설(세브란스의학전문), 한창환(보성법률상업전문) 등과 함께 앞의 인물들이 구속될 경우 뒤처리와 2단계 투쟁을 맡기로 했다.

2월24일 연합이 확정됐고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학생들에게 시위에 동참해달라는 요청을 전달했다. 독립선언과 시위계획이 결정되자 윤자영은 다른 학생대표들과 함께 천도교·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연합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2월25일 밤 정동예배당에 있는 이필주 목사 집에서 준비 모임을 갖고, 3월1일 정오 탑골공원에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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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희곤 안동대 교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heegkim2@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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