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재를 위해 난생 처음 찾은 카지노였지만 신출내기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돈 놓고 돈 먹기’라는 단순명료한 논리만 통하는 도박판에서 ‘타짜’나 ‘초짜’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화려하게 꾸며진 카지노의 위세에 눌려 주눅이 드는 것도 잠시, 판돈이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니 그곳이 카지노인지 친구들이랑 벌이는 포커 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카지노는 잘 꾸며진,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따야 하는 ‘돈 먹는 하마’일 뿐이었다.
취재수첩에다 주변상황을 묘사하면서 게임의 결과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평상심은 3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그 다음부터는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할 정도로 도박에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이유는 딱 하나, ‘수업료’라고 생각한 밑천이 30분 만에 바닥났기 때문이다.
결과는 완패였다. 아무리 길어도 2시간 이상은 도박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마지막 동전을 밀어넣으면서 시계를 보니 어느새 여섯 시간이 흐른 뒤였다. 게임머니도 당초 계획보다 열 배 이상 불어났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장장 여섯 시간의 전투에서 완패했음을 인정하는 그 순간에 뜬금없이 체 게바라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엔 이룰 수 없는 꿈을 가지자.”
-체 게바라
그렇다. 그건 애초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물론 한평생을 바쳐서 온몸으로 마르크시즘을 실천했던 체 게바라가 도박을 두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게 뒤죽박죽인 밤이었으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다.
‘나일의 여왕’의 미소
시드니의 5월은 가을이다. 새벽공기도 차갑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허탈감을 주체할 길이 없었다. 잃은 돈이 아깝기도 하고, 겨우 30분 만에 평상심을 잃고 도박에 휘둘린 사실을 곱씹고 있자니 화가 나기도 했다.
뜨거운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카지노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발길에 차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필자가 중심을 잃고 넘어질 정도로 제법 강하게 부딪친 것 같은데 정작 발길에 차인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가가서 보니 동양인이었다.
“그냥 가슈.”
그는 한국인이었다. 차마 그럴 수 없어서 머뭇거리는데 그가 일어섰다. 단정한 양복차림에 넥타이까지 맨 40대 중반 의 남자. 그는 왜 그 시간에 차디찬 대리석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을까.
“이런 데서 웬일입니까. 들어가서 커피나 한잔 드시지요.”
“아닙니다. 혹시 집에 갈 차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뜻밖의 반응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주머니에도 동전 한 닢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자동차 키를 내보이면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닙니다. 그냥 차비만 좀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를 데리고 카지노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카지노 안은 여전히 북적댔다.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두 잔을 뽑아 그와 마주앉았다. 그는 자신을 S라고 소개했다. 아내와 2남 1녀를 둔 43세의 직장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