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11월 13년 간 성폭행해 온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김보은, 김진관씨의 정당방위와 무죄석방을 촉구하는 전대협 기자회견.
가해자를 목 졸라 죽이는 꿈을 반복해서 꾸는 피해자도 있다. 성폭행 가해자를 죽이는 일은 현실에서도 벌어진다. 지난 3월, 딸을 성추행하고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성폭행한 남편을 목 졸라 숨지게 한 주부가 구속됐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남·김보은 사건이 있다. 법정에서 “나는 인간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고 울부짖은 김부남씨는 어릴 때 자신을 강간한 동네 아저씨를 21년 만에 찾아내 칼로 살해했다. 13년간 계부에게 성폭행당한 김보은씨는 그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았고, 이에 격분한 애인이 김씨의 계부를 찾아가 살해했다. 법정에서 피의자는 “괴로움으로 몸을 떠는 보은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다”고 눈물을 떨궜다.
두 사건이 남긴 충격 여파로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성폭력범죄는 갈수록 늘고, 피해자가 가해자로 돌변할 위험성은 여전히 잠재해 있다.
성폭력범죄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가 ‘1차 피해’라면 수사·재판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한다. 밀양 사건 이후 2차 피해를 줄이기 위해 피해자 진술녹화제가 의무화되고 최초로 전자법정이 열리기도 했지만 성폭력범죄 피해자와 가족은 여전히 불만스럽다.
성폭력 수사·재판 시민감시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의 고소 이후 가해자 가족에 의해 주로 나타난 2차 피해 유형은 성폭행 피해사실 유포 위협, 신체적 위협, 합의 및 고소취하 요구 등이다.
합의 강요하는 일부 판·검사
구체적 사례를 보면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직장에 전화를 해 괴롭히거나 사진을 찍어 얼굴을 공개하겠다고 위협한 경우가 적지 않고, 상당수 피해자는 결국 협박에 못 이겨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가해자나 그 가족이 피해자를 찾아와 욕설을 퍼붓고 폭행하거나 심지어 납치하는 등 신체적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피해자와 결혼하겠다며 고소취하를 요구한 가해자도 있다. 또한 피해자가 가해자의 회유와 협박에 시달리다 못해 합의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자, 거꾸로 ‘피해자가 돈을 요구한 꽃뱀이었다’고 소문을 내며 합의금을 돌려달라, 변호사 비용으로 쓴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황당한 경우도 있다. 다음은 강지원 변호사의 말.
“가해자들이야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합의를 종용한다고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일부 판·검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돈이라도 좀 받는 게 낫지 않나. 지금이라도 합의해주라’는 식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돈도 필요하지만 민사소송에서 얼마든지 받아낼 수 있다. 어렵게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법에 호소한 피해자에게 ‘돈을 받는 게 실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다분히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이다. 돈은 민사소송을 통해서도 받아낼 수 있다. 왜 판·검사가 재판 중에 합의를 종용한단 말인가. 피해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 이런 사람들은 문책해 마땅하다.”
성폭행당한 사실이 공개되면서 주위의 시선과 편견을 견디다 못해 다른 곳으로 이사하거나 학교, 직장을 옮기는 경우도 있다. 익산 사건의 여중생은 피해 사실이 알려진 후 전학하려 했으나 몇 군데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현재 학교측의 사건 은폐 여부를 가리는 수사가 진행 중이다. 학교측이 은폐 사실을 부인한 데 대해 피해 여중생은 “선생님이 나를 배신했다. 뻔히 다 알고서 전학 보내놓고 거짓말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사건을 맡은 강지원 변호사는 “성폭력을 포함한 학교폭력에 대해 대다수 학교가 쉬쉬하는 게 우리 교육계 풍토다. 이렇듯 아이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어른들이 본분을 다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더 큰 상처를 입고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04년 성폭력 상담 사례 2362건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성폭력범죄에 대한 피해자의 고소건수는 18.6%에 머물렀다. 대검찰청 통계에서도 25%에 그쳤다.
이처럼 피해자가 범죄발생 신고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보복 우려’ 때문이다.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서’, ‘범인이 친족이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 다음이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받는 2차 피해도 신고와 고소를 꺼리게 하는 요인이다.
한편 최근 수사·재판 과정에서 엇갈린 판결이 속출하면서 피해자와 가족들의 불만은 더 높아졌다.
얼마 전 A(여·22)씨는 2001년 말 “빌려준 책을 돌려주겠다”며 집으로 자신을 유인한 이모(남·25)씨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고소했으나 이듬해 인천지검은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이어 서울고검에서도 항소가 기각됐다. 대검에서 재항고가 기각되면서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을 냈지만 이마저 기각되자 민사소송을 제기, 3년간의 긴 싸움 끝에 손해배상 지급 판결을 받았다. 검찰이 무혐의로 풀어준 가해자에게 사법부가 벌금형을 내린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