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호

‘돌부처’, 필드에 오르다

  • 양재호 프로 바둑기사 9단

    입력2005-12-28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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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부처’, 필드에 오르다
    나는 스스로 스포츠광이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스키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테니스에 심취한 적도 있다. 무슨 종목이든지 간에 한번 빠져들면 열병을 앓곤 하는데, 골프도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은 연구실을 꾸려가느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지만 연구실을 시작하기 전에는 정말 적잖은 시간을 필드에서 보냈다. 일주일 동안 4~5번 라운드하러 나간 적도 많고 제주도에 가면 2박3일 동안 108홀을 돌고 오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련만, 그렇게 열심히 필드를 찾은 것치고 내 골프실력은 형편없는 편에 가깝다. 심지어 후배인 유창혁 9단은 나를 보면 “골프에는 재주가 없는 것 같다”고 핀잔을 주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해서 새콤하게 약이 오른다. 다른 종목의 경험을 떠올려보면 분명 운동신경이 없는 것은 아닌데.

    최근에 필자는 이창호 9단의 머리를 올려주었다. 이 9단이 연습을 워낙 하지 않은 편이어서 샷은 신통치 않았다. 그렇지만 퍼트는 달랐다. 한눈에도 재주가 엿보이는 것이었다. 프로 바둑기사들은 대체로 퍼트를 곧잘 한다. 바둑에서의 수읽기와 그린에서의 라인 읽기 사이에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집중력 뛰어나기로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9단이 골프에서 그 명징한 정신력을 얼마나 활용할지 지켜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이창호 9단은 이기고 지는 일의 묘미를 아는 승부사 아닌가.

    이 9단은 나와는 띠 동갑으로 한참 후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9단의 인품을 좋아하며 존경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이 9단은 자제력이 뛰어나고 겸손하며 다른 사람에게 한 약속은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내고야 마는 책임감의 소유자다. 그런 성품 때문일까. 그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바둑 승부에서 숱하게 나를 이겼지만, 아무리 봐도 밉지가 않다. 중국에서 이 9단의 인품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나 중국 바둑계에서 그를 한국에서보다 더 영웅으로 대접하는 이유도, 그의 실력뿐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 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9단이 골프를 배우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는 해마다 6월 제주도에서 열리는 ‘한일 프로기사 골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 9단이 바둑시합 때문에 일본에 갈 때면 한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활약 중인 조선진·유시훈 9단이 이 9단에게 골프를 배우라고 권하곤 했다. 두 기사는 이 9단과 어릴 적부터 연구생 시절을 함께 보낸 절친한 사이. 아마 골프대회에서도 이 9단과 함께하기를 원했던 것이리라. 오랜 친구들의 권유가 이어지자 뚝심 깊은 이 9단도 결국은 설득당하고 말았던 모양이다.



    한일 프로기사 골프대회의 일본측 대표로는 조치훈·조선진·유시훈 9단이 항상 참가하는데, 조치훈 9단은 싱글, 조선진·유시훈 9단은 아주 센 보기플레이어다. 조선진 9단은 성격이 차분한 까닭에 골프 스코어도 안정적이고, 유시훈은 쾌활한 성격과 공격적인 대국(對局) 스타일 그대로 골프도 장타를 쳐대는 과감한 플레이 위주다(물론 OB도 많지만). 올해 조치훈 9단은 서봉수 9단을, 조선진 9단은 유창혁 9단을 꺾었다. 매년 그래왔지만 올해도 한국팀은 일본팀에 1대 5로 참패하고 말았다. 아마 내년 대회에는 이창호 9단도 한국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겠지만, 아쉽게도 가뜩이나 허약한 한국팀의 전력에 큰 보탬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시작 아닌가.

    바둑과 골프에는 비슷한 면이 많은 듯하다. 두 종목을 함께 즐기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대목이다. 우선 골프의 기본은 몸에서 힘을 빼는 것이라고 말한다. 몸에서 힘을 뺀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지 말고 가볍게 치라는 뜻. 바둑도 마찬가지다. 이기려고 하거나 큰 이득을 보려고 욕심을 부리면 영락없이 손해를 보고 형세를 그르치게 된다. ‘위기십결’의 바둑격언에 ‘부득탐승(不得貪勝)’이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이기려고 하면 득이 없다는 뜻이다. 바둑을 둘 때 이기려고 하거나 정도(正道)를 벗어나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바로 실패의 지름길이다. 시합을 하기 전에 오늘은 이기려고 하지 말고 정도로 두자고 되새기지만 생각대로 되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 바둑 승부를 겨룰 때 염두에 두어야 할 대목이 즐겁게 두자는 것이다. 승부를 의식하지 않고 재미있게, 가볍게 둘 때 좋은 수가 나오고 멋진 대국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골프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큰 승부일수록 이기려고 하면 오히려 어깨에 힘이 들어가 무리한 샷이 나오게 마련이다. 스포츠나 일에서 승부나 열정은 기본적인 사항이지만 지나치면 자칫 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즐기는 마음이 더욱 중요하리라.

    많은 바둑기사가 골프를 즐기는 것은 이러한 공통점을 실감하기 때문인 듯하다. 골프를 통해 몸이 건강해질뿐더러 정신력도 가다듬을 수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바둑 승부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막 필드에 들어선 이창호 9단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세계 바둑 1인자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골프라는 운동의 장점을 잘 활용했으면 싶다.

    나도 바둑을 두는 정신력을 골프에 접목할 수 있다면 새해에는 타이틀도 따고 골프실력도 싱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창한 희망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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