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련의 국제성을 띤 회담에서 일제의 패전 이후 한국의 분단과 후견제라고도 하는 신탁통치 문제가 구체적으로 입안된 것이다. 신탁통치 기간으로 미국은 40년, 소련은 10~20년을 검토했다. 그해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국 외무장관 회담 결의안은 이 같은 미소의 구상이 반영된 것이었다.
모스크바회담의 요점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5년간 4개국(미·영·중·소)의 신탁 통치안, 미소공동위원회(이하 미소공위) 설치 등을 결의한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 민족은 크게 분개했고 이 문제에 관한 한 좌우익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애초 반탁(反託)을 표방했던 박헌영은 1946년 1월1일 평양에 소환돼 치스차코프 대장과 레베제프 소련 민정장관으로부터 “소련의 정책이니 찬탁(贊託)을 따르라”는 압박을 받았다. 1월2일 새벽 서울에 온 박헌영은 찬탁으로 돌변하면서 “이는 조선을 위해 가장 적당한 것이니 그 결정을 지지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아 정국을 냉각시켰다.
다음날 박헌영이 담화문을 발표해 신탁통치안에 대해 “조선 문제 해결에 큰 진전”이라고 주장하자 우익측은 1월5일 “조선공산당이 소련 1국의 신탁 통치를 지지해 조선을 소련의 연방으로 편입하려 한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좌익은 찬탁 이유에 대해 “3상 회담 내용이 임시정부 수립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절대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구, 이승만, 한민당의 김성수 등 우익 진영은 “신탁은 식민지 노예 상태로 들어가는 치욕적인 처사”라고 규탄했다. 당시 신문에서는 임시정부 수립보다 신탁통치 문제를 더 부각시켰다.
3·1절 기념식도 따로따로
민족주의 계열은 합동으로 반탁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1945년 12월28일 수백개의 민주사회단체를 모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중앙위원 76명, 상무위원 21명)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보성전문(고려대) 학생 이철승 등은 중등 이상의 학생 수천명을 동원해 ‘전국학련’을 만들고 반탁·반공·반소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해 국민운동으로 승화시켰다.
1945년 8월18일 은둔지에서 상경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그는 이승만, 하지, 아놀드, 김일성과 면담하는 한편 이승만의 독촉 전체회의에도 참석해 발언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인공의 주석직 제의를 거절하고 공산당을 배격하자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후에도 상면은 했으나 워낙 이념의 골이 깊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3·1절 기념식도 좌우익이 따로 개최했다. 좌익은 3·1운동기념준비위원회로, 우익은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 준비위원회라고 불렀다. 장소도 달라 각각 서울운동장과 남산에서 개최했다. 좌우익의 이러한 대결 양상은 신탁통치 논란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광복 이후 좌익의 절대적인 지지를 업은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여운형의 건준에서 주요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노조나 사회단체를 결성하고 지지세력 확장에 전념했다. 물론 소련의 지령을 무시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박헌영은 ‘파시즘을 근멸하자’라는 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파시스트 독일과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민주주의가 승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또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이 협조노선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초기엔 대미(對美) 유화책을 고수했다. 하지만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 폭동이 발생하자 양측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다.
찬탁 운동을 펼친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7·27투쟁’을 일으키고 미소공위 촉진을 위한 대규모 군중 투쟁을 계획했다. 미 군정은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좌파 단체를 불법 단체로 간주한 까닭이다.
1946년 5월8일 미 군정의 무장 경관대가 공산당 산하 조선정판사(인쇄소)를 위폐(僞幣)제작 혐의로 수색하고 관련자를 체포·연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정판사 직원 대부분이 당원이었기에 공산당이 입은 상처는 매우 컸다. 미군정은 또 조공 기관지 해방일보를 정간 조치했다.
우익 단체들은 서울운동장에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고 조공을 규탄했다. 10만여 명이 모인 이날 대회에서는 반소·반공 구호가 난무했고, 일부 군중은 좌익 신문인 자유·중앙·인민보를 습격하고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긴급 출동한 경찰이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켜 좌우익의 대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위기에 몰린 박헌영은 7월26일 ‘대미 자세의 역공’이란 구호 아래 신(新) 전술을 채택했다. 미소공위의 휴회와 위폐사건으로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중국, 일본 공산당과 협조해 극동에서 반미 운동을 폈다. 미 군정의 비리를 폭로하면서 정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기라고 역공세를 취했다. 이는 조공의 노선이 투쟁 일변도로 바뀐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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