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2월호

승부근성, 나를 키운 8할

  • 장윤창 경기대 교수, 전 배구 국가대표

    입력2006-02-02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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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부근성, 나를 키운 8할
    1979년 1월로 기억한다. 루마니아에서 열린 모스크바올림픽 배구 예선경기. 상대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일본이었고, 나는 대표팀의 막내였다. 꼭 이기고 싶었지만 게임은 쉽지 않았다. 두 세트를 내주고는 세 세트를 내리 따내 뒤집은 극적인 승부.

    결국 한국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대회 불참을 결정하면서 올림픽 무대에는 나가지 못했지만, 일본을 이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한국의 짧은 배구 역사와 얇은 선수층으로는 절대 일본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겼고, 이후로는 항상 일본과 호각세를 유지했다.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나는 그 경기를 내 인생 최고의 승부라고 말한다. 그 경기에서 느낀 승리의 쾌감은 내가 선수생활을 하는 내내 사그라질 줄 모르는 승부욕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누군들 지는 것을 좋아하겠는가만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나의 승부근성에는 그 경기에서의 경험도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지는 것에 익숙지 않게 됐다고나 할까.

    골프를 처음 배운 것은 10년 전 미국 유학 시절이다. 박사학위 공부로 정신이 없을 때여서 연습장에도 제대로 못 나갔고, 한국 유학생 친구들과 어울려 한 달에 한 번쯤 필드에 나간 것이 고작이었다. 변변한 선생님도 없이 친구들끼리 자세 봐주고 함께 연구해가면서 배운 골프였다. 직업이 운동선수였던 사람이다 보니 못 친다는 소리는 안 들었지만, 실력이 나아질 리는 없었다.

    2001년 무렵 귀국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필드에 나가기 시작했고 남보다 빨리 스코어가 좋아졌다. 1년이 지나자 80대에 들어섰고, 지금은 연습을 제대로 하고 나가면 70대 후반, 그렇지 못한 때에는 80대 중반 정도 나온다. 스코어가 안 나오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내 경우는 그게 좀 다르다. 라운드에서 ‘깨지면’ 겉으로 흥분하는 대신 무슨 수를 써서든 ‘복수의 칼’을 준비하는 스타일이다. 예의 그 승부근성이다.



    재작년 겨울 무렵이었을 것이다. 지인들과 골프 행사를 만들었는데, 마침 시내에서 예정돼 있던 다음 스케줄 시각이 가까워져 마음이 급했다. 시간에 쫓기니 공이 제대로 맞을 리 없었다. 그나마 9홀엔 아예 서보지도 못하고 자리를 떴다. 딱히 내기로 잃은 돈 몇 만원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졌다는 사실 자체에 속이 아팠다. “오늘은 내가 사정이 있어서 물러난다만 꼭 설욕하겠다”는 다짐에 친구들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바로 그 다음주에 다시 약속을 잡고 그 멤버 그대로 불러모았다. 1주일 내내 눈에 불을 켜고 연습했음은 불문가지. 깔끔한 승리로 기분 좋게 설욕하고 나니, 친구들이 “독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는 것이었다.

    언뜻 배구와 골프는 전혀 다른 운동 같지만, 사실은 매우 가깝다. 핵심이 ‘임팩트’에 있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일생 동안 공격수로 스파이크를 때리며 보낸 사람에게는 골프공도 마찬가지다. 공의 어디를 때려야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지, 스핀을 주려면 어떻게 때려야 하는지에 대해 배구선수만큼 잘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공의 크기나 무게 차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골프를 배울 때 흔히 듣는 말이 ‘힘을 빼고 치라’다. 배구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기에는 온 힘을 다해 때리는 것 같지만, 배구도 유연하게 휘둘러 맞는 순간의 임팩트만으로 때려야 공이 힘있게, 제대로 날아간다. 배구에 입문하는 학생들에게도 “힘을 빼라”는 말은 계속 반복되는 주문이다. 사실 초보자에게 힘을 빼라고 아무리 얘기해봐야 쉽지 않은 일이므로, 힘을 빼는 데 숙련이 된 배구선수는 필드에 처음 섰을 때부터 보통 골프 초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구선수 출신은 대부분 골프도 잘 친다. 대한배구협회 이인 전무이사, 경기대 이경석 감독, 동해대 진준택 감독, 강만수 전 현대차 감독 등이 모두 70대 후반에서 80대 초반의 스코어를 자랑한다. 그뿐인가. 평생 다져온 승부감각이나 흔들리지 않는 근성도 빼놓을 수 없는 이점이다.

    승부감각이라고 해서 무조건 승부에만 집착하며 이성을 잃는 태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진정한 승부욕은 매순간 냉정함을 유지하는 능력이 아닐까 한다. 나만 해도 필드에 나서면 친구들이 무섭다고 할 정도로 기복이 없는 편이다. 아무리 농담을 걸고 장난을 쳐도 플레이가 전혀 흔들리지 않으니 짜증이 날 법도 하다. 프로 골퍼들 가운데도 타이거 우즈나 프레드 커플즈처럼 매끄럽고 여유 있는 플레이를 펼치는 이들을 좋아한다.

    골프는 홀마다 승부가 새로 시작되는 게임이다. 지난 홀에서 아무리 안 좋았다 해도 이번 홀에서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 실망할 필요도, 흥분할 필요도 없다. 그래 봐야 스트레스만 받고 게임을 망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평상심을 유지하며 즐기는 자세, 그게 바로 진짜 승부욕이다. 이겨본 경험이 있는 사람, 이기는 데 익숙한 사람이 유리한 운동이라는 특징도 그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인생을 살아가며 필요한 자세도 그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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