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대 대선 D-2일인 2002년 12월17일 한 유세장에서 잡힌 유권자들의 표정. 4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오래전 유럽 여행을 하다 그리스에 들렀을 때였다. 그곳에서 철학공부를 하고 있던 청년이 웃으면서 내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거리에서 누군가와 정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하면 점심을 사면서까지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간다고. 그리스인들의 정치적 관심의 과잉을 그는 그렇게 빗대어 말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정치의식 과잉은 어떤가. 점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술 한잔 받으시오’ 하고 소주잔 정도는 건너올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택시를 타면 기사와 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게 되었다. 그들의 정치의식 과잉이 지겨워서다. 그것도 지난 몇 년 동안은 택시를 탄 뒤 행선지를 말하고 나면 대통령 이야기 나오는 것이 싫어서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다른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자리 저 모임에서 쏟아져 나오던 대통령에 대한 ‘씹어대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하곤 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투표일인 그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노사모’말고 지금의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은 다 누구란 말인가. 그들이 모두 청와대나 권력의 구중심처에 몸을 감추고 있을 리도 없을 텐데,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무리 제왕적 대통령제를 만들어낸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 국민에게는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이 신앙이자 종교가 되어버렸다. 지지자들은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또 해주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다보니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대통령에게 무조건적인 동정을 보내고,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을 내보인다. 다른 쪽에게도 편안한 나날이 아니다. 자신의 뜻에 맞는 대통령을 만들어내지 못한 반대자들은 당연히 그 시대를 환멸과 무관심 속에서 보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한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팡이를 애용하며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내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다리를 조금 다친 나는 한동안 지팡이를 짚어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어 고생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언론학을 전공한 출판인 친구를 찾아갔을 때도 나는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 나를 맞이하며 친구는 깜짝 놀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나는 별것도 아닌데 발을 디디기가 조금 불편하다는 것이 행동을 이렇게 제약할 수가 없다고, 지팡이만 짚어도 이렇게 불편한데 휠체어를 타야 하는 장애인의 고통이 어떨지 이해가 간다고 이런저런 고충을 하소연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친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첫마디는 이랬다. “야, 그러니…선생님은 얼마나 불편하셨을까!”
나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소린가 했다. 알고 보니 그가 말한 선생님은 DJ였다. 친구의 다친 다리를 보면서 대뜸 ‘선생님의 불편’을 안타까워하던 그의 말에서 느낀 절망감은, 다름 아닌 한국인의 대통령과 정치, 아니 권력에 대한 망국적인 열기와 기대였다. 그것은 종교였다. 하늘의 질서를 갈망하는 사도(使徒)의 말이지 현실이나 정치의 언어는 아니었다. 현실정치를 넘어서서 종교적 치유를 바라는 이런 국민에게 누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가없는 안락과 평온의 안수를 해줄 수 있겠는가.
‘참 알 수 없는 사람들’
2007년은, 또 한 사람의 대통령이 임기를 끝내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대선(大選)의 해다. 국민적 관심이 대통령선거에 얼마나 쏠려 있는지는 이미 온통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동정으로 뒤덮이기 시작한 신문지면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흔히 제도권 언론이라고 말하는 지면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누군가가 ‘지금까지 한국 대통령들이 남긴 아주 대단히 나쁜 업적을 적어주십시오!’라는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