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년 11월9일 백악관에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왼쪽) 퇴임과 로버트 게이츠 전 CIA 국장(오른쪽)의 후임지명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연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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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봄, 한국의 외교안보 소식통들은 미국측 지인들로부터 야릇한 소문을 들었다. 이종석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미국의 한미정상회담 제의를 수개월간 묵살했으며, 이 때문에 롤리스 부차관이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에게 “이종석을 교체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이야기였다. 5월18일 ‘내일신문’, 6월 발행된 ‘월간조선’ 등을 통해 기사화된 이 소식은 NSC측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월간조선’은 중재에 따라 반론·정정보도를 내보냈다.
그러나 이후 확인된 청와대와 관련부처 관계자들의 증언에는 곱씹어볼 대목이 있다. ‘이종석 차장이 정상회담 제의를 뭉갰다’는 내용은 사실 여부를 두고 다툼의 여지가 있지만, 2005년 2월말 롤리스 부차관이 용산기지 이전협상, 주한미군 감축 등의 사안을 두고 대립각을 세워온 이종석 차장의 경질을 정 장관에게 요구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 “이 차장과 NSC가 한미간 합의한 내용에 대해 자꾸 입장을 번복하고 있다”며 정 장관에게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롤리스 부차관이 이 차장의 낙마를 유도하기 위해 ‘정상회담 제의 묵살설’을 유포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대두됐다(‘신동아’ 2005년 8월호 ‘미국, 이종석 낙마 유도 의혹’ 기사 참조).
가장 잘 알려진, 가장 덜 알려진
리처드 P 롤리스. 그의 이름을 한국언론재단의 기사검색 시스템 ‘KINDS’에서 찾아보면 1155건의 기사가 나온다. 이는 스티븐 해들리 백악관 안보보좌관(1141건)을 능가하는 숫자. 직급이나 업무범위로는 한국의 국장급 혹은 부국장급에 불과하지만,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장관급인 백악관 보좌관을 넘어선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떤 인물이며 어떻게 업무를 수행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에서 이름이 가장 잘 알려진 미국 관료 가운데 하나지만, 정작 구체적으로는 가장 덜 알려진 셈이다. 동아태 담당 차관보로 승진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려온 지금 궁금증이 더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롤리스 부차관이 어떤 인물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 이 정도 직급의 관료에게 관심을 기울일 리 만무한 미국 언론에서 그에 대한 기사를 찾기 어려울뿐더러, 특히 개인이력은 상당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미 국방부 홈페이지는 고위직 인사 80여 명의 이력을 공개하고 있지만 그의 경력기록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기서도 빠져 있다. 국내외 언론을 통틀어 공개된 그의 개인정보는 1946년생으로 아내가 한국계라는 정도가 전부다.
그와 장시간 교분을 나눈 이들도 “개인적인 이야기는 거의 들은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하거나, 부인과 함께 식사자리에 나오거나, 사석에서 지갑에 넣어 갖고 다니는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것 같은 미국인 특유의 행동도 일절 없었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의 한 관계자는 “외모에서도 알 수 있듯 이탈리아 혈통이라는 점, 간혹 휴가도 이탈리아로 가곤 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에 약간의 ‘귀속감’을 갖고 있는 듯하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라고 말했다.
사석에서의 대화에 따르면,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첫 번째 계기는 1970년대 초반에 ‘평화봉사단(Peace Corp)’으로 전라도 지역에서 2년가량 일한 것이었다. 주한미군에서 근무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평화봉사단 경력이 와전된 것인 듯하다. 평화봉사단이 대학재학 이상의 학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대학을 다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도 아는 이가 없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국방부 차관보 인사발령과 함께 간략하게 소개된 기록에 따르면 1972년에 미 중앙정보국(CIA)에 ‘입사’했다는 점이다. 그가 평화봉사단 활동을 마치고 CIA에 들어갔는지, 아니면 평화봉사단원으로 가장한 CIA 요원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그는 1987년까지 CIA 요원으로 본부를 비롯해 일본과 한국, 유럽에서 근무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의 회고 등을 종합하면 1981년부터 1987년까지는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신분을 위장한 ‘화이트’ 요원으로 일했다. 한국지부장 같은 간부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수백차례 서울을 드나들며 활동한 명실상부한 한국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