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조들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남겨놓고 있지 않다. 다만 9m 남짓한 덩그런 구조물과 첨성대라는 이름,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는 사실만 기록해놓았을 뿐이다.
먼저 첨성대의 실체에 대해서 그동안 어떤 설(說)들이 있었는지, 이 설들은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해보자.
동양 최초의 천문대?
주지하다시피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위해 신라시대에 지어진 시설이었으리라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다. 특히 과학자들이 이 주장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이는 선조의 유산을 하나라도 더 과학유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는 ‘瞻星臺’라는 한자 표기이다.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瞻에는 ‘바라본다’ 외에 ‘우러러본다’는 뜻도 있지만, 우리 선조에게는 해와 달에 비해 별에 대한 신앙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칠성신이라 하여 북두칠성이 민족 고유의 숭배 대상이었으나 선조들은 북두칠성을 위해 제단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시대에 따라 영성(靈星·농업을 관장한다는 별), 노인성(老人星·남극성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천사성(天駟星·말의 조상으로 알려진 별) 등이 있었고, 이 별들에게 기원하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런 단들은 첨성대와는 판이한 형태이다. 높이 1m가 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단이 있어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첨성대를 ‘별을 바라보는 대’라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의 제단은 우리나라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또 다른 근거로는 조선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신라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그 속이 비어 있어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물었다.’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시대에 천문을 관측한 기록이 부쩍 증가했다는 것도 하나의 근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선조가 세운 최초의 천문대 또는 동양 최초의 천문대라고 알고 있는 첨성대. 그러나 실상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간주할 만한 근거는 이처럼 취약하기만 하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상식선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이기에 좀더 면밀하게 검토해봐야 할 것인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첨성대를 천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요인들 중에는 기존에 지적됐던 것도 있고, 필자의 견해도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매우 불편한 천문대’
첫째, 첨성대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상당히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첨성대 꼭대기에 오르려면 먼저 땅 위에서 약 4m 높이에 있는 사방 1m 크기의 창까지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또한 내부에 들어가서도 19∼20번째 단과 25∼26번째 단에 있는 정자석(井字石)에 각각 걸쳐진 2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반원형으로 난 구멍을 통해 지붕까지 올라가야 한다.
첨성대가 단순히 천문 관측만을 위한 시설이었다면 왜 이처럼 사람이 오르내리기에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더구나 첨성대 내부 돌들은 외부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도 않다. 원래의 돌 모양 그대로 들쭉날쭉 쌓여 있어서 좁은 공간을 드나들기에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문 관측기구를 가지고 오르내리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이다.
학자들은 첨성대와 유사한 구조물로 고려시대 천문대인 첨성당(瞻星堂)과 창경궁 안에 설치된 관천대(觀天臺)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물들은 첨성대의 실체를 더욱 모호하게 하고 있다. 이 구조물들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첨성대에서 볼 수 있는 매끄러운 외양이나 우아한 미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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