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월호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작가 최홍의 ‘1400년 미스터리’ 추적

  • 최 홍 작가 doksuri-ch@hanmail.net

    입력2007-01-08 14: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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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우리 문화재 중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경주 첨성대가 아닐까 한다. 이 우아한 조형물을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전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데다, 그 구조를 살펴봐도 용도를 가늠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첨성대의 진실은 무엇일까. 대다수 과학자가 주장하는 대로 하늘의 천문 현상을 관측하기 위한 최초의 천문대였을까. 아니면 실제 용도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후손들의 미흡함으로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동안 학자들을 중심으로 첨성대의 실체를 밝혀보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어왔지만 천문대라는 주장이 여전히 대세를 이루고 있다. 좀더 진전된 점이 있다면 여기에 점성(占星)이나 제단(祭壇)의 목적 등을 절충하는 정도였다. 이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위한 구조물이었으리라는 주장은 주류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가. 왜 선조들은 이 아름다운 조형물의 용도를 철저히 비밀 속에 묻어둬야 했을까.

    나는 나름대로 연구한 끝에 첨성대를 만든 선조들의 의도를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를 밝혀보려 한다. 그동안 많은 주장이 쏟아져 나왔기에 또 하나의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논의 속에서 언젠가는 미스터리의 내막이 밝혀질 것이라 믿는다.

    꼬리를 무는 미스터리



    첨성대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유사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구조물이다. 외부도 호리병 모양으로 미끈하고 우아한 형상을 하고 있지만, 내부도 유별난 구조로 되어 있다.

    첨성대가 자리잡은 지역은 경주시 인왕동의 평지로, 반월성의 서북쪽이며, 신라의 상징인 계림(鷄林)과 고분군에서 가깝다. 이러한 지리적 요소는 첨성대를 해석하는 데 고려돼야 할 변수일 것이다.

    첨성대는 2단으로 된 사각형의 기단부, 원통형으로 된 27단의 몸통부, 여기에 다시 2단으로 된 사각형의 상단부로 이뤄져 있다. 총 높이는 약 9.5m에 달하며, 몸통부 맨 아랫부분의 둘레는 16m, 맨 윗부분의 둘레는 9.2m이다. 4m 정도의 높이에 사방 1m 남짓한 창이 있고, 안에는 12번째 단까지 잡석과 흙으로 채워져 있다. 19∼20번째 단과 25∼26번째 단에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이 걸쳐져 있고, 그 끝부분은 몸통부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꼭대기는 편평한 바닥이 아니며, 마치 지난 시절 우리의 우물에서 보던 것과 같은 입 구(口)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내부 면적은 약 1.5평에 달한다.

    왜 첨성대는 이러한 형태로 만들어졌을까. 많은 사람의 지적대로 첨성대는 어떤 기능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지, 예술품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따라서 외부나 내부가 현재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 그 기능에 가장 합당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첨성대 미스터리’의 본질은 첨성대가 과연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형물인가 하는 것이다. 이를 구명하려면 먼저 어떤 요소들이 미스터리를 구성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그 요소들 전반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째, 첨성대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왜 첨성대는 신라의 선덕여왕 대에 쌓여졌는가.

    셋째, 신라시대와 관계된 문헌에 첨성대에 대한 내막이 수록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넷째, 왜 첨성대의 구조가 그런 형태로 되어 있는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조들은 이러한 의문들에 대해 아무런 해명도 남겨놓고 있지 않다. 다만 9m 남짓한 덩그런 구조물과 첨성대라는 이름, 그리고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는 사실만 기록해놓았을 뿐이다.

    먼저 첨성대의 실체에 대해서 그동안 어떤 설(說)들이 있었는지, 이 설들은 과연 타당한 것인지를 검토해보자.

    동양 최초의 천문대?

    주지하다시피 첨성대가 천문 관측을 위해 신라시대에 지어진 시설이었으리라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이다. 특히 과학자들이 이 주장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이는 선조의 유산을 하나라도 더 과학유산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집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첨성대가 천문대라고 주장하는 가장 큰 근거는 ‘瞻星臺’라는 한자 표기이다.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瞻에는 ‘바라본다’ 외에 ‘우러러본다’는 뜻도 있지만, 우리 선조에게는 해와 달에 비해 별에 대한 신앙은 별로 없는 편이었다.

    칠성신이라 하여 북두칠성이 민족 고유의 숭배 대상이었으나 선조들은 북두칠성을 위해 제단을 따로 만들지는 않았다. 시대에 따라 영성(靈星·농업을 관장한다는 별), 노인성(老人星·남극성이라고도 하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별), 천사성(天駟星·말의 조상으로 알려진 별) 등이 있었고, 이 별들에게 기원하기 위한 제단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이런 단들은 첨성대와는 판이한 형태이다. 높이 1m가 채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계단이 있어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첨성대를 ‘별을 바라보는 대’라고 간주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러한 형태의 제단은 우리나라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다.

    또 다른 근거로는 조선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다음과 같은 기록이다.

    ‘신라 선덕여왕 대에 돌을 다듬어 대를 쌓았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다. 그 속이 비어 있어 사람이 오르내리며 천문을 물었다.’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시대에 천문을 관측한 기록이 부쩍 증가했다는 것도 하나의 근거로 삼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선조가 세운 최초의 천문대 또는 동양 최초의 천문대라고 알고 있는 첨성대. 그러나 실상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간주할 만한 근거는 이처럼 취약하기만 하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 아니면 상식선에서 형성된 고정관념이기에 좀더 면밀하게 검토해봐야 할 것인지는 과제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첨성대를 천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이 요인들 중에는 기존에 지적됐던 것도 있고, 필자의 견해도 포함되어 있음을 밝혀둔다.

    ‘매우 불편한 천문대’

    첫째, 첨성대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에 상당히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첨성대 꼭대기에 오르려면 먼저 땅 위에서 약 4m 높이에 있는 사방 1m 크기의 창까지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또한 내부에 들어가서도 19∼20번째 단과 25∼26번째 단에 있는 정자석(井字石)에 각각 걸쳐진 2개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반원형으로 난 구멍을 통해 지붕까지 올라가야 한다.

    첨성대가 단순히 천문 관측만을 위한 시설이었다면 왜 이처럼 사람이 오르내리기에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더구나 첨성대 내부 돌들은 외부처럼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지도 않다. 원래의 돌 모양 그대로 들쭉날쭉 쌓여 있어서 좁은 공간을 드나들기에 더욱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더구나 혼천의(渾天儀) 같은 천문 관측기구를 가지고 오르내리기에는 매우 불편한 구조이다.

    학자들은 첨성대와 유사한 구조물로 고려시대 천문대인 첨성당(瞻星堂)과 창경궁 안에 설치된 관천대(觀天臺)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물들은 첨성대의 실체를 더욱 모호하게 하고 있다. 이 구조물들은 사람들이 오르내리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첨성대에서 볼 수 있는 매끄러운 외양이나 우아한 미의식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첨성대의 상단부를 우물 형태로 만든 것은 이 구조물이 하늘과 관련되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하늘과 통하도록 하기 위해,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어떤 존재를 맞이하기 위해 우물 형태를 꼭대기에 만들어놓은 듯하다. 아래쪽이 전체적으로 우아한 호리병 모양인 것도 우물과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신라에는 재매정(財買井)이라 하여 김유신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실제로 이와 같은 형태의 우물이 있었다. 첨성대라 하여 하늘을 향하는 이름이 지어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해서 나는 첨성대를 신라인의 지구라트라고 간주하고자 한다. 지구라트가 아시아 대륙의 반대편에 위치해 있고,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첨성대는 지구라트라고 할 만한 요소들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신라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문화적 뿌리나 양상이 유사했다. 비록 환경적 여건은 다르지만 인간이 느끼는 정신적 갈증은 다를 바 없었을 것이기에, 신앙적 의지처였던 지구라트가 신라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다. 여기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첨성대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구라트의 구조와 일맥상통한다. 다만 그 규모가 현저히 작은 이유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하기로 한다.

    다산(多産)과 성애(性愛)의 신

    그러면 신라에 지구라트를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근동지역의 지구라트에서 모셨던 신들부터 파악해보는 게 순서일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중에서 현재까지 가장 잘 보존돼 있는 것은 우르(Ur)의 지구라트이다. 우르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수메르 시대 최대의 도시국가인데, 우르의 제3왕조 시대에 웅대한 지구라트를 건설하고 그 위에 달의 신(月神) 난나(Nanna, 또는 Sin이라고 했음)를 위한 신전을 안치했다. 난나가 수메르인에게 지도적 위치의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난나의 상징은 초승달이다.

    그런데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들이 모셨던 신은 다 같았던 게 아니고 지역별로 달랐던 것 같다. 당시 주로 숭배된 신으로는 난나 외에도 대지의 신 닌후르삭(Ninhursag), 전쟁의 신 니누르타(Ninurta), 사랑의 신 이난나(Inanna) 등이 있다.

    이 여러 신 중에서 이난나라는 여신을 주목해보자. 영국의 역사학자 마이클 우드는 저서 ‘인류 최초의 문명들’에서 우르의 남쪽 에리두에 세워져 있던 지구라트의 신전에서 이난나라는 여신을 모셨음을 증언하고 있다. 에리두는 인류 최초의 도시로 알려진 곳이므로 이난나는 수메르인이 매우 중요하게 여긴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난나는 어떤 여신인가. 이난나는 수메르인이 부르던 이름이고, 아카드어로 이슈타르(Ishutar)라 했다. 서부 셈족은 아스타르테라고 불렀으며,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로마에서는 비너스라고 불렀다. 이 모든 여신의 원조 격인 여신이 바로 이난나였으며, 각 민족이 자신들의 신으로 편입시키면서 이름만 바뀐 것이다.

    이난나는 수메르인의 대표적인 여신이었으며, 그들의 종교에서 전쟁과 성애(性愛)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하늘의 신 안(An), 또는 달의 신 난나의 딸이라고 전해지며, 처음에는 곡물의 수확과 비, 뇌우 등을 주관했으나 후대로 가면서 매우 다양한 역할을 가져 수메르인이 많은 기대를 갖고 숭배했던 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젊고, 아름답고, 충동적인 성격을 가졌으면서도 남성처럼 전투를 즐기는 신이기도 했다.

    이난나는 수메르를 정복한 아카드인(셈족의 일원)에 의해 이슈타르로 통칭되게 되는데, 이슈타르는 원래 아카드인이 이난나를 자기 식으로 부르던 이름이었다. 이후 이슈타르는 역할이 강화되고 더욱 복잡한 신으로 발전해 근동지역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이 여신의 역할에서 유념할 만한 것은, 고대인의 중요한 덕목이던 다산(多産)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여러 지역의 매춘부들에게도 인기가 높았는데, 이러한 역할들은 이슈타르가 성애를 주관했던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슈타르와 금성(金星)

    그런데 이슈타르에서 특히 주목할 사실이 있다. 이슈타르가 하늘의 금성(金星)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슈타르는 금성의 여신으로 간주됐으며, 태양신 ‘샤마시’, 달의 신 ‘신(Sin)’과 함께 천체의 삼신(三神)을 이루기도 했다. 영어로 금성을 비너스(Vinus)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재도 미국의 나사(NASA)에서 금성의 지형에 붙인 명칭 중에는 ‘이슈타르 대륙’이 있다.

    금성은 우리 민족도 중요시하던 별이다. 우리에게는 흔히 샛별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외에도 태백성, 장경성(長庚星), 계명성(啓明星), 명성, 개밥바라기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다.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것은 선조들에게도 그만큼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의미한다.

    금성은 신라인에게 특히 주목받았던 별인 듯 그에 관한 기록이 많이 전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금성에 관한 기록을 인용해본다.

    ‘…최초의 기록은 200년(신라 내해왕 5) 7월이며, 그 뒤의 기록에는 관측날짜까지 밝혀져 있다. 또한 월엄범오위(月掩犯五緯)에 “신라 내해왕 10년 추 7월에 달이 금성을 가렸다”, 오위엄범(五緯掩犯)에는 “신라 문성왕 6년 춘 2월 금성이 토성을 가렸다”, 또 오위합취(五緯合聚)에도 “신라 원성왕 6년 하 4월 금성과 수성이 쌍둥이 별자리의 밝은 별인 동정(東井)에 모였다”, 오위엄범항성(五緯掩犯恒星)에는 “신라 남해왕 20년 가을 금성이 태미(太微)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태미는 하늘의 북극을 중심으로 크게 나눈 3개의 구획(垣) 중의 하나로 자미(紫微), 천시(天市)와 더불어 삼원을 이룬다. 이 기록은 어느 별을 가렸는지가 불분명한데 다음의 기록을 보면 “성덕왕 14년 추 9월 금성이 작은곰자리에 있는 네 번째 별인 서자(庶子)를 가렸다”고 구체적인 현상을 기록하고 있다….’

    ‘월엄범오위’란 달이 행성을 가리는 현상을 말하며, ‘오위엄범’은 행성끼리 접근하는 현상, ‘오위합취’는 행성들이 한데 모이는 현상, ‘오위엄범항성’은 행성이 항성에 접근하는 현상을 말한다.

    왜 유독 신라에만 금성에 대한 관측 기록이 집중적으로 전해지는 것일까. 신라인이 극히 중요하게 여긴 별이 금성이기 때문이었을까.

    만일 첨성대가 금성의 여신 이슈타르를 모시기 위한 지구라트였다면 신라에 그럴 만한 사유가 있었을까. 신라라기보다는, 첨성대가 궁성에 가까이 있었고, 선덕여왕 때 쌓은 것이기 때문에 선덕여왕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선덕여왕이 과연 첨성대를 쌓아야 할 절실한 사유가 있었을까.

    선덕여왕의 고뇌

    잘 알려진 대로 선덕여왕은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등극한 여성 임금이다. 신라는 내내 성골(聖骨) 출신이 왕위를 계승하다가, 26대 진평왕을 끝으로 더 이상의 성골 남자가 없자 화백회의에서 성골 여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는데 그가 바로 선덕여왕이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재위 기간 내내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남성들로 이뤄진 귀족들이 고분고분하게 굴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 계승 당시나 이후에 여자 임금이어서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결국 선덕여왕은 그 반란 전쟁의 와중에서 죽음을 맞았다. 심지어 당나라의 태종은 나라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친척을 보내 임금으로 삼는 게 어떤가 하고 제의할 정도였다.

    이 여왕 때에 유달리 고구려, 백제와 분쟁이 잦았던 것도 최초의 여자 임금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국가란 약하게 보이면 항상 주위에서 넘보게 마련이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여성 임금이라는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재위 기간에 영묘사, 분황사, 황룡사 9층탑 축조 등 유달리 큰 불사(佛事)를 많이 일으킨 것이다. 이는 왕실의 위엄을 내세워 여왕의 존재를 정당화하고, 불력에 의지해 왕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왕이 유독 김유신과 김춘추를 살갑게 대했던 것도 그들의 충성과 지지를 이끌어내 자신의 입지를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이외에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선덕왕 지기삼사(知幾三事)’도 여왕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며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씨 겉봉의 그림을 보고 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자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나, 겨울에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백제 군사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다는 것, 죽을 때 죽을 달과 날을 미리 알려줬다는 것 등은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덕여왕에게 또 하나의 커다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신라 성골의 대를 이을 후사가 없다는 점이었다. 자신도 남자가 없어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사상 유례 없는 여성 임금에 올랐기에 대를 이를 후사가 없다는 것은 엄청난 고민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최근에 발간된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이 후사를 두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잘 나와 있다. ‘화랑세기’는 그동안 그 진위를 놓고 적잖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최근 그 실체를 인정하려는 경향이고 필자도 이에 동의하는 바이므로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신라시대 김대문이 쓴 ‘화랑세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에게는 삼서제(三壻制)가 시행됐다고 한다. ‘서(壻)’는 남편을 뜻하므로, 세 사람의 남편을 뒀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나 실제 선덕여왕은 결혼하지 않았으므로 삼서제는 여왕에게 씨를 제공하는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삼국유사’에는 선덕여왕이 결혼해 음갈문왕(飮葛文王)을 배필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음갈문왕은 삼서 중의 한 사람으로 간택된 김용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갈문왕이란 신라시대에 가까운 친족에게 주던 봉작을 뜻하기 때문이다. 김용춘은 선덕의 숙부 되는 사람으로, 이미 결혼한 몸이어서 선덕과 결혼했다고 해도 정식 결혼이 아니어서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듯하다.

    먼저 김용춘을 택했다가 성과를 보지 못한 여왕은 이어서 친척인 흠반(欽飯)과 대신 을제(乙祭)를 차례로 불러들였으나 끝내 자식 만들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숫제 애를 낳지 못하는 석녀(石女)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때문에 다음 왕은 부득이 동생이 즉위하는데 진덕여왕이다.

    이러기까지 선덕여왕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상상해볼 수 있다. 왕조시대의 가장 중요한 일은 왕조의 존속, 유지였다. 따라서 왕손의 맥을 잇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여왕

    경북 포항시 흥해읍에는 천곡사(泉谷寺)라는 절이 있다. 현재는 법당과 요사채만 남아 있는 조그만 절이지만,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큰 사찰이었다. 이 천곡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는데, 전해지는 얘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명으로 건립 됐다고 한다.

    선덕여왕이 피부병으로 내내 고생하다가 어느 신하의 권유에 따라 포항의 천곡령(泉谷嶺) 아래에 있는 약수로 목욕한 후 병이 낫자, 자장율사에게 그곳에 절을 짓도록 해서 천곡사가 됐다는 것이다. 현재도 절의 한쪽에는 선덕여왕이 목욕했다는 우물 석정(石井)이 남아 있다.

    선덕여왕은 왜 피부병에 걸렸을까. 왕실은 가장 깨끗하고 위생상태가 청결하게 마련인데 무슨 이유로 임금이 피부병에 걸렸을까. 아마도 심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조 세조도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왕위 찬탈 과정에서 단종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살해한 끝에 훗날 심신이 쇠약해지자 극심한 죄의식이 피부병으로 도진 것이다. 그 때문에 멀리 속리산 법주사까지 행차해 정성으로 불공을 드린 후에 나을 수 있었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자신이 믿고 의지할 대상을 갈구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임금이었기에 충신에게만 의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 불교도 만족스러운 의지처가 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여왕에게 구원의 여신으로 등장한 게 이슈타르, 즉 금성의 여신이 아니었을까. 앞에서 봤듯 이슈타르는 선덕여왕이 인간적으로 부족함을 느낀 여러 여건을 보충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전쟁의 여신이며, 다산의 여신인데다가 젊고, 아름답고, 용감무쌍했다.

    15년에 걸친 재위 기간에 외적으로는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귀족들의 거부반응에 시달리다 끝내 그들의 반란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던 여왕. 그러면서도 왕위를 계승할 후사를 두지 못해 남자를 셋이나 바꿔가며 노심초사했던 여왕. 이러한 여왕에게 금성의 여신은 자신의 정치적 곤경과 왕손의 출산 문제를 동시에 해결해줄 능력이 있는 신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비록 우리의 상식으로 금성의 여신은 해와 달처럼 우리 선조에게 익숙한 신은 아니었지만, 앞에서 본 대로 우리 문명은 수메르 문명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라의 왕실은 근동지역과 문화적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근동지역의 대표적 여신이었던 이슈타르, 즉 금성의 여신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금성의 여신을 왕실로 모시기 위해 생각해낸 제단이 바로 첨성대가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첨성대의 창이 궁성 쪽을 향해 있는 것도 이런 배려가 아니었을까.

    ‘1개월’과 ‘1년’을 상징

    그외에도 첨성대가 금성의 여신을 위한 제단이었다는 근거는 여럿이다.

    첫째, 첨성대라는 이름과 부합한다. ‘瞻’은 ‘바라본다’ 외에도 ‘우러러본다’는 뜻이 있어 금성을 위한 제단의 이름으로 어긋남이 없다.

    둘째, 앞에서 첨성대 상층부의 신전으로 보이는 방(室)이 6개의 단으로 쌓여졌다고 했다. 이 방이 6개의 단으로 쌓여진 이유는 금성을 위한 신전을 나타내려는 것인 듯하다. 고대인에게 금성의 수는 바로 6이었다. 우리가 일주일의 이름으로 무심코 사용하고 있는 행성들은 실상 오래전부터 숫자가 주어지고 의미가 부여되어 인간의 주일에 적용되었다. 즉 태양-1, 달-2, 화성-3, 수성-4, 목성-5, 금성-6, 토성-7 등이다.

    셋째, 조선조 세종 때 수학자 이순지, 김담이 왕명에 의해 편찬한 역서(曆書) ‘칠정산(七政山)’ 내편(內篇)에는 하늘의 오성(五星) 중 금성 항목에 ‘1개월에 한 궁(宮)씩 머물고, 1년에 하늘을 한 번 돈다’고 했다. 이 내용이 우리 선조가 금성에 대해 갖고 있던 유일한 실제 정보였던 셈이다. 오늘날 금성의 실제 공전 주기는 0.6152년으로 밝혀졌지만, 선조들은 금성이 태양 가까이에서 머물기 때문에 태양과 같이 1년의 공전주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칠정산’은 조선시대에 편찬됐지만 금성에 대한 정보는 신라시대부터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인은 일찍부터 금성에 관심을 갖고 많은 관측을 했기 때문이다.

    금성과 1개월과 1년. 첨성대에 과연 이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을까. 첨성대의 몸통부를 이루는 벽돌식 돌들을 보면 길이가 일정하지 않다. 이는 어떤 수를 채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정한 것으로 해석되는데, 석재의 수는 모두 364개(창의 양쪽에 세워진 2개 포함)이다. 364라는 수는 선조들이 1년의 날수로 생각했던 것과 분리해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첨성대의 맨 위에 덮여 있는 판석까지 더하면 365개가 된다.

    또한 첨성대의 단수는 원통부가 27단이며, 여기에 사각형의 상단부까지 더하면 29단이 되는데 이 역시 음력 날수로 한 달을 나타내려 했던 게 아닐까. 달이 백도(白道)를 따라 일주하는 항성주기는 27.32일이며, 한 달을 나타내는 초승달에서 다음번 초승달까지의 삭망주기는 29.53일이다. 조형물에 1개월과 1년을 의미하는 숫자를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금성을 상징하는 구조물임을 나타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 창은 창고 문?

    넷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신라인은 유독 금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들에게 어떤 위상을 갖고 있던 별이었는지를 나타내는 증거라 할 수 있는데, 해와 달처럼 인간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아닌 이상 그 이유는 신앙적인 것이라고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한 제단이 있었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가정해볼 수 있다.

    다섯째, 이 글의 첫머리에서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으므로 첨성대의 중앙부분에 있는 창에 대해서도 새롭게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창은 과연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여신의 하강을 위해 만들어놓은 것일까. 그리고 가끔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여신과 조우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일까.

    이 창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다. 수메르인의 여신 이난나는 창고(倉庫)와 많은 관련이 있는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재산을 관장하는 여신임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러면서 ‘창고 문이 이난나의 상징’이라고 했다. 혹시 첨성대의 창은 창고 문을 의미해 금성의 여신을 위한 조형물임을 나타내려 한 게 아닐까.

    비밀에 부친 이유

    그러면 왜 첨성대는 ‘삼국사기’에도 등장하지 않고 그 내막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는가. 그 이유는 선덕여왕의 개인적인 제단이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자 한다. 첨성대가 지구라트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현저히 작은 것도 이러한 면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도 선덕여왕은 인간적인 부족함을 많이 느낀 임금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도 대규모 신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평민들은 사사로운 신전을 만들기도 했고, 가족들만의 신전이 있기도 했다.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최 홍

    1953년 전북 남원 출생

    전주고·전북대 법대 졸업, 서울대 환경대학원 수료

    작품 : ‘마이산 석탑군의 비밀’ ‘천년의 비밀 운주사’ ‘베팅 999’

    한국소설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지난 11월22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시 계림과 첨성대 사이의 황남동 일대에서 8세기 신라 왕실의 제의 시설로 추정되는 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 유적을 제의시설로 추정하는 주된 이유는 흙 속에 6개의 구덩이가 있었고, 이 구덩이들 중 5개의 구덩이에서 지진구(地鎭具) 항아리가 발견됐기 때문. 지진구란 선조들이 절이나 탑을 세울 때 지기를 무마하여 건조물이 오래도록 보존되게 하기 위해 묻는 물건들을 말한다.

    이 유적이 제의시설로 밝혀지면 이 일대는 신라 왕실의 신성한 지역이었음이 확인되는 셈이다. 따라서 첨성대가 선덕여왕의 제단이었다는 내 주장에도 무게가 실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는 구조물이라는 설이 대세를 이루지만, 실제 별을 관측하기에는 불편한 구조로 되어 있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천문을 관측하는 일은 다방면의 소양과 천문학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고관(高官)이 맡았을 것이다(신라에는 천문박사라는 직책이 있었다). 따라서 그 연령대를 적어도 장년층 이상으로 봐야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르내리는 건축물을 왜 구태여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도록 만들었을까. 더구나 첨성대 내부에 있는 사다리들은 정자석에 걸쳐져 있어 경사가 가파르기에 오르내리는 데 상당한 위험이 따랐을 것이다.

    둘째, 첨성대 내부의 형태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이다. 첨성대 내부는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층층이 쌓인 벽돌 형태의 돌들을 1개의 단으로 간주할 때, 12단까지는 잡석과 흙으로 채워져 있고, 19∼20단과 25∼26단에는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들이 걸쳐져 있다. 만일 첨성대가 순수하게 천문 관측만을 위한 시설물이었다면 이러한 장치들은 사다리를 걸쳐 놓거나, 조형물의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이는 마치 편한 길을 두고 일부러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구조물을 훨씬 쉽게 만들 수도 있는데, 일부러 어렵게 만들어놓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보조 장치까지 만든 꼴이 됐으니 말이다.

    혹자는 “이왕이면 구조물을 호리병 모양으로 우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왕’이라는 의미는 ‘같은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첨성대를 우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고, 실제 사용자가 큰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같은 조건이 될 수는 없다.

    ‘삼국유사’에만 한 줄 언급

    첨성대가 천문대라면 이는 기능성 구조물이지 예술품이 아니다. 따라서 천문을 관측하기에 가장 용이한 형태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고려시대의 첨성당이나 조선시대의 관천대를 보더라도 우리 선조들이 어떤 방식으로 천문대를 만들었는지 어렵지 않게 가늠해볼 수 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천문대를 이러한 형태로 만들지 않았다.

    셋째,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정통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첨성대가 미스터리의 대상이 된 것은 구조물의 비중에 비해 그에 관한 기록이 극히 박약하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존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문헌은 오직 ‘삼국유사’뿐이다. 심지어 그 진위를 놓고 오랫동안 논란을 벌인 필사본 ‘화랑세기(花郞世紀)’에도 선덕여왕에 관한 얘기는 꽤 실려 있지만 첨성대는 등장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기록 문화에 있어서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민족에 비해서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 선조들이 유독 첨성대에 대해서는 왜 이처럼 소홀했는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삼국시대의 공식 역사서로 알려진 ‘삼국사기’에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단 한 줄도 실려 있지 않은 것은 많은 의문을 자아낸다. ‘삼국사기’에는 분황사, 영묘사, 황룡사 9층탑 등 선덕여왕 대에 세워진 건축물이 모두 실려 있다. 또한 자장법사가 불법을 배우러 당나라에 갔다왔다는 비교적 사소한 일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정작 천문 관측이라는 국가의 중대사를 담당하는 구조물에 대한 기록은 빠져 있다. 혹자는 사관들이 실수로 누락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왜냐면 ‘삼국유사’에도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짤막한 구절만 실려 있을 뿐, 어느 해에 무슨 목적으로 쌓은 것인지는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궁성 안이 아니라 밖에 있었던 첨성대에 사람이 수시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했다면 이 사실은 입소문을 타고 시중에 널리 유포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설화를 수록한 ‘삼국유사’에 그처럼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넷째, 첨성대가 세워진 뒤로 천문 관측 기록이 늘었다는 것이 확실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연세대 교수를 지낸 나일성은 첨성대가 세워진(흔히 647년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이후 신라의 천문 관측 기록이 부쩍 늘었다는 것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 신라가 왕조를 유지하던 992년 동안 전체 천문 관측 기록 횟수는 141회인데, 이중 91회(약 65%에 해당)가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의 288년 동안에 이뤄졌으며 이는 첨성대와 같은 천문 시설이 축조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수메르의 원통형 안장에 새겨진 그림. 초승달 신앙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연 이를 중요한 근거로 삼을 수 있을까. 신라는 그 후 극심한 체제 변화를 겪었다. 백제가 멸망한 해는 660년이며, 그로부터 8년 후 고구려가 멸망했다. 첨성대가 세워졌다는 647년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 그리고 이 체제는 그 후 270년 가까이 지속됐다. 따라서 신라 후반기에 천문 관측 기록이 훨씬 증가한 것은 삼국을 통일한 사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백제와 고구려도 천문 시설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러한 관측은 신라로 통합된 후에도 계속됐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천문은 고도의 전문 영역이고, 백제와 고구려는 지역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정이 사실이라면 모든 관측 기록은 신라의 기록이 됐을 것이다.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닌 다른 용도의 구조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은 1970년대부터 제기되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게 일종의 불교적 제단이었을 것이라는 설이다. 동양사학자 이용범이 처음 제기했고, 최근에 고대사학자 김기홍에 의해 좀더 변형된 형태로 전개됐다. 이 설들은 첨성대의 외형이 불교에 등장하는 수미산(須彌山)과 비슷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둔다. 수미산은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성산으로, 그 정상에 도리천(?利天)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불교 제단說의 허점

    이용범은 첨성대가 수미산을 본뜬 일종의 불교적 제단이라고 주장해 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과학자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으나, 과학사학자 박성래는 이를 받아들여 ‘외형적인 모습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나, 실제로는 우리 조상들이 농업 신으로 섬기던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했다. 박성래의 주장은 ‘수미산 설’에 첨성대의 ‘하늘을 바라보는 기능’을 절충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근 고대사학자 김기홍은 이용범의 수미산 설을 근간으로 해 첨성대가 수미산 정상에 있는 도리천의 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도리천은 제석천(帝釋天)이라 하는 왕이 지배하는 곳인데,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제석신에 대한 신앙이 독실했다고 한다. 따라서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만든 것은 생전에는 제석신이 강림하기를 기원하고, 죽어서는 도리천에 환생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여기에는 물론 생전에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서 겪어야 했던 많은 고충을 저변에 깔고 있다. 그러면서 첨성대를 지상과 도리천을 연결해주는 통로(일종의 우주 우물 또는 宇宙木)로 간주했다.

    그 근거로 김기홍은 33천(天)으로 이루어진 도리천과 마찬가지로, 첨성대의 구조가 모두 33단으로 이뤄졌다는 점을 들고 있다. 즉 첨성대가 상단부 2단, 원통부 27단, 하단부 2단 등 31단에, 첨성대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을 각각 1단으로 하여 총 33단으로 구성됐다는 것.

    그러나 이용범과 김기홍의 수미산 관련 설들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난감한 점이 없지 않다. 결정적인 것은 첨성대라는 이름과 연관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름 자체가 우리에게는 문화유산이다. 첨성대라는 이름은 신라시대부터 전해지는 것이고, 선조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그렇게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설에서는 첨성대라는 이름과 아무런 관련성을 찾아볼 수 없다. 이 설들을 따르자면 첨성대라는 이름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박성래의 주장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농업신인 영성을 숭배하는 것은 우리의 토착 신앙에서 비롯된 것인데, 왜 구태여 불교의 수미산을 따라 단(壇)을 만든단 말인가. 그리고 농업 신을 위한 제단 같은 단들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높지도 않고, 상단부가 우물 형태로 되어 있지도 않다.

    다음으로 지적할 점은 첨성대가 33단으로 돼 있다는 것이다. 김기홍은 첨성대의 기단부를 2개의 단으로 포함시키고, 이어 첨성대 위의 하늘과 아래의 땅까지 각각 하나의 단으로 간주하여 모두 33단으로 이뤄졌다고 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33이라는 숫자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끌어다 붙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기단을 만든 것은 그 위의 조형물을 돋보이게 하고 지탱하기 위한 것일 텐데, 이 기단을 조형물과 동일한 자격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도 조형물과 같은 자격이 아니다. 가령 하나의 돌로 쌓인 단과 하늘을 어떻게 같은 자격으로 놓을 수 있겠는가.

    수미산의 33천은 수평적인 위상인데 왜 첨성대와 같은 형태로 쌓여졌는지도 지적할 만하다. 즉 도리천인 33천은 수미산 정상에 있는 제석천과 사방 4개의 봉우리에 있는 8개의 천으로 이뤄졌다는데, 첨성대의 33단은 수직 구조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김기홍은 당시 사람들이 도리천의 구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미흡해서가 아니었겠는가 하고 추측한다. 그러나 첨성대를 쌓을 정도면 당대 최고의 지식과 기량이 동원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도리천에 대한 지식이 미흡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우며, 도리천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 도리천을 형상화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것 또한 납득하기 힘들다.

    또한 이 설들 역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첨성대 내부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있다. 왜 첨성대 아랫부분은 흙으로 채워져 있는지, 창은 왜 그처럼 높은 곳에 있는지, 그리고 상층부에는 왜 우물 정(井)자 형태의 장대석들이 걸쳐져 있는지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규표說과 주비산경說

    이외에도 첨성대가 규표(圭表) 기능을 하는 조형물이었다는 설, ‘주비산경(周? 算經)’ 관련설 등이 있다. 규표는 태양 빛에 의해 생긴 그림자를 재서 태양의 고도를 측정하는 기구이다. 또한 주비산경이란 고대 중국의 대표적인 수학서인데, 이 수학서에 통달한 신라 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입증하기 위해 상징적인 조형물을 만든 게 첨성대라는 설이다.

    그러나 나는 첨성대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앞서의 4가지 의문에 납득할 만한 답이 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첨성대는 규모로 보나, 기량으로 보나 결코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꼭 그렇게 세워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규표설은 4가지 의문 중 어느 한 가지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규표 용도로 쓰기 위해 첨성대와 같은 조형물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비산경설도 마찬가지다. 첨성대 형태의 일부가 ‘주비산경’에 나오는 7형도의 7원(七圓)과 닮았다거나, 원형부의 단수가 27단인 것은 27대 왕인 선덕여왕을 나타내고 위의 정자석까지 합하면 28단이 되어 하늘의 28수(宿·고대인들이 해, 달, 행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하늘을 28자리로 나눈 것)를 나타낸다거나, 이 외에도 여러 구조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열거해놓은 것은 참고할 만하지만,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기는 난감하다. 각 구조가 의미하는 것들이 일맥상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주비산경’의 7원과,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것과, 하늘의 별자리 28수가 과연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것과 하늘의 28수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이를 나타내기 위해 첨성대와 같은 구조물을 만든단 말인가. 이는 이미 세워진 조형물의 구조에 걸맞은 숫자를 갖춘 내용만 끌어다 붙인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면 첨성대의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 먼저 우리 문화유산 중에서 첨성대와 유사한 것을 찾아보자. 비교할 만한 것이 있다면 첨성대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은 그동안 일부 인사들에 의해 첨성대와 유사한 구조물로 주목받아왔다. 아래쪽의 단은 둥글고, 위쪽의 단은 정사각형이기 때문이다. 물론 참성단의 아래쪽 단의 몸통이 완전한 원형은 아니고, 위쪽의 단도 서쪽 일부만 그렇다. 그러나 아래쪽을 완전한 원형으로 만들지 못한 것은 지형적 조건 때문으로 보이며, 위쪽의 단이 다른 것은 첨성대와의 시대적, 또는 기능적 상이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유사하며, 이와 같은 구조물은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두 구조물은 이름도 비슷하다. 참성단은 요즈음은 ‘塹城壇’으로 고정된 듯하지만 원래는 ‘塹星壇’과 혼용했다. 첨성대와 의미는 다르겠지만 우리말 이름은 닮아 있으며, 같이 별 성(星)자가 들어가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참성단이 주는 힌트

    이외에도 특기할 것은 석단이 요즈음의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첨성대를 보면서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것이 이러한 벽돌 형태의 돌이다. 그런데 참성단의 단도 자세히 보면 모두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져 있다. 물론 그 세련도는 첨성대에 비해 떨어지지만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된다. 첨성대는 훨씬 뒤의 시대에 세워진 것이고, 왕궁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두 구조물은 왜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진 것일까. 건축기법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강화도의 참성단은 우리 민족에게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단’으로 알려져 왔다. 또한 조선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예로부터 매년 봄, 가을에 대언(代言)을 보내 하늘의 별들에 제사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첨성대가 참성단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라면 참성단의 이러한 기능 역시 고려됐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참성단은 그동안 일부 식자들에 의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구라트(Ziggurat)와 비슷하다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 지구라트란 고대의 근동지역에 세워진 피라미드 형태의 계단식 신전탑을 말한다. 참성단의 (원형의) 단 위에 또 다른 단이 있는 점, 이 단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점, 단이 모두 벽돌 형태의 돌로 쌓여 있는 점 등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근동지방에는 암석이나 나무가 없기 때문에 예전에는 모든 건물을 흙벽돌로 지었다.

    참성단에는 언제 심어졌는지 모르는 까치 박달나무가 있는데, 누군가가 이 나무를 심은 것은 지구라트 난간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우주목(宇宙木)을 나타내기 위한 것처럼 보여 흥미롭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는 원래 하늘에 있는 신과 지상을 연결하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참성단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참성단을 축조한 실질적인 이유는 신과 교통하기 위해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대한 아시아 대륙의 양쪽 끝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우리 문명은 실제로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까. 첨성대도 혹시 지구라트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우리 고대 문화와 수메르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 문명에서 시작되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우리의 전반적인 옛 문화가 수메르인의 문화와 유사하다는 것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도 우리의 고대 문화가 중국 문화보다는 그리스, 이란 문화와 친숙하다고 했거니와 최근에는 구체적인 사례들도 제시되고 있다.

    먼저 우리 언어와 수메르어의 유사성을 들고 있다. 수메르어는 다른 지역에서 그 동질성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언어인데, 그 주된 이유는 교착어(膠着語)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말도 대표적인 교착어이다. 교착어란 어떤 말에 독립성이 없는 조사나 접사 등을 붙여, 그 기능에 따라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를 말한다.

    다음으로 문법 구조가 같다. 즉 영어 중국어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어-동사-목적어로 되어 있는 게 아니고, 주어-목적어-동사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처럼 수메르어와 우리 언어는 중요한 특징을 공유할 뿐 아니라 단어의 형태도 비슷한 것이 많다. 가령 아버지를 뜻하는 ‘아비(Abi)’, 어머니를 뜻하는 ‘움마(Uhma)’, 일인칭을 뜻하는 ‘나(Na)’, 도로를 뜻하는 ‘길(Gir)’ 등을 비롯한 여러 단어 외에, 사람을 높여 부를 때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이는 것도 유사하다.

    또한 수메르 유물 중 씨름하는 형상의 청동 향로를 보면 우리의 민속경기인 씨름과 대단히 유사한 경기가 있었다는 것, 임금과 스승과 부친을 동일한 가치로 받드는 군사부(君師父)일체 사상, 인간 세상의 운세가 천체의 운행과 관련이 있다는 사고방식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이외에도 근동지역에서 숭상된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라는 꽃이 우리의 무궁화와 유사하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샤론의 장미는 학명이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인데, 놀랍게도 우리 무궁화의 학명과 같다. 샤론의 장미와 무궁화가 같은 꽃이라는 얘기다.

    흔히 무궁화는 근대에 와서 우리 국화(國花)지정된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단군이 개국할 때부터 무궁화가 있었다고 하며, 신라의 효공왕이 최치원을 시켜 당나라에 보낸 국서나, 중국의 ‘구당서(舊唐書)’ 199권 ‘신라전(新羅傳)’ 등에는 신라를 가리켜 ‘근화향(槿花鄕·무궁화의 나라)’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이처럼 무궁화는 우리 민족과 그 역사를 함께해온 꽃인데, 이 꽃이 멀리 근동지역에서도 높이 숭배되고 있었다는 것은 예사롭게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 수메르인의 문명과 동양 문명의 유사성이 속속 밝혀지면서 수메르인이 과연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부 학자들은 수메르인은 토착 원주민이 아니며, 그들은 ‘동방에서 온 머리가 검은 아시아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세계 최초의 문명은 결국 동방에서 전래된 문명이었으며, 이 문명은 우리 민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셈이 된다.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불교의 수미산도(圖). 외형이 첨성대와 닮아 있다.(왼쪽) 신라 유물인 마두식 각배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오른쪽 위) 수메르의 청동 향로. 아랫부분이 우리의 씨름 자세와 유사하다.(오른쪽 아래)

    고대에는 교통수단의 미비로 서로 소통이 되지 않은 채 독자적인 문명이 형성됐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의 교류가 있었음이 여러 증거로 속속 입증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문명의 유사성은 도처에서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수메르 문명이 우리에게 전래됐든, 우리 문명이 수메르 쪽으로 갔든 분명한 것은 어떤 식으로든 상당한 교류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처럼 수메르 문명과 우리 문명의 유사성으로 볼 때 지구라트와 같은 신앙 구조물도 유사한 것이 있을 수 있음을 충분히 상정해볼 수 있다. 왜냐면 수메르 문명의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지구라트이기 때문이다. 강화도의 참성단이 바로 그 같은 지구라트의 자취가 아닐까.

    박혁거세 탄생 설화의 비밀

    그러면 첨성대도 지구라트의 자취라고 할 수 있을까. 이를 밝혀내려면 신라 문화로 범위를 좁혀 근동 문화와의 유사성을 살펴봐야 할 것이다.

    박혁거세는 신라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신화를 근거로 그의 내력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가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근원적인 의문이 들 때도 적지 않다. 특히 그의 탄생설화에서 이러한 면면을 엿볼 수 있다.

    ‘…진한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알천(閼川) 상류 언덕에 모여 군왕을 정해 받들기로 하고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羅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져 있고, 백마 한 마리가 땅에 꿇어앉아 절을 하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자줏빛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함)이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알을 깨자 어린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赫居世) 왕이라고 하고, 위호를 거슬감(居瑟邯)이라 했다. …남자아이(혁거세)는 알에서 나왔고, 그 알의 모양이 박(匏)과 같아서 성을 박이라 했다….’

    이 설화는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나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처럼 난생(卵生) 설화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마을 우두머리들이 군왕을 정해 받들기로 하고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는 것은 혁거세가 외지에서 온 인물임을 나타내려는 듯하다. 다음으로 알이 자줏빛이라 했는데, 왜 하필 많고 많은 색 중에서도 자줏빛이라 했을까(푸른빛도 있으나 자줏빛에 중점을 두고 있는 듯하므로 자줏빛으로 통일하기로 하자). 우리가 알고 있는 알은 대개 백색이거나 갈색이다. 다른 어느 건국 시조의 난생설화에서도 자줏빛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줏빛은 혹시 혁거세의 피부색을 나타내려는 게 아니었을까.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혁거세가 태어난 알의 모양이 박과 같았다는 구절이다. 그냥 (타원형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될 텐데 왜 구태여 (둥근) 박과 같은 알이라고 했을까.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기록이 ‘삼국사기’의 신라 초기 편에 전한다.

    ‘…호공(瓠公)이란 사람은 그 족성(族姓·족속과 성)이 자세하지 않으나 본래 왜인으로,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일컫는다….’

    이 기록은 ‘박’과 ‘바다를 건너오는 것’의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당시엔 박이 요즈음으로 말하면 구명대와 같은 기능을 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혁거세가 태어난 알이 박과 같았다는 것은 혁거세가 바다를 건너온 족속임을 나타내려는 게 아니었을까. 바다를 건너온 자줏빛 피부의 사람….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박혁거세의 설화에만 등장하는 백마의 존재도 심상치 않다. 백마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혹시 박혁거세가 기마민족 출신임을 상징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다음으로 ‘파사(婆娑)’라는 명칭이다. 신라의 5대 임금의 시호는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다. 신라의 왕위는 박씨로 이어지다가 4대 때 석씨(昔氏 탈해)가 등극한 후 다시 박씨로 환원되는데, 이 5대 임금이 바로 파사이사금이다.

    波斯, 婆娑, 페르시아?

    그런데 파사라는 명칭은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가락국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서역에서 가져왔다는 석탑의 명칭이 바로 파사석탑(婆娑石塔)이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 수로왕비 허황옥이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波神)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석탑을 싣고 왔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현재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모셔진 이 석탑은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빛이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섞여 있다고 한다.

    신라 왕의 시호였던 파사와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석탑의 파사는 이름뿐만 아니라 한자까지 같다. 이 사실을 과연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파사라는 명칭에는 과연 어떤 뜻이 담겨 있는가. ‘婆娑’의 우리말 풀이는 가볍다거나, 쇠하고 가냘프다거나, 잎이 성기다거나 하는 등의 형용사여서 별다르게 관련지을 만한 것이 없다. 그런데 옛적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한 페르시아의 한자 이름이 바로 파사이다. 이 파사는 한자 표기가 ‘波斯’여서 이를 ‘婆娑’와 동일한 의미로 간주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지만, 원래는 페르시아를 나타내기 위해 ‘婆娑’가 쓰였으나 어느 시기엔가 한자 표기가 바뀌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월성(月城)’이라 불리는 성이다. 경주에는 신라 시대에 궁궐이 있었던 월성이 남아 있다. 첨성대에서 남쪽을 향해 언덕배기를 오르다보면 현재도 그 흔적이 있으며, 성의 한쪽에서는 얼음 창고였던 석빙고도 볼 수 있다.

    월성은 신라 5대 임금인 파사이사금 때 축조됐다고 하며, 문무왕 때에는 인근의 안압지, 임해전지, 첨성대 일대를 궁궐에 편입해 확장했다고 전해진다. 월성은 다른 이름으로 초승달을 뜻하는 ‘신월성(新月城)’,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해서 ‘재성(在城)’이라고도 불렸으며,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반월성(半月城)’은 조선시대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성이 월성, 또는 신월성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겨 그에 맞게 성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월성이 위치한 지형이 과연 전체적으로 초승달처럼 생겼을까. 그리고 임금이 거주하는 궁성을 단순히 지형에 따라 쌓았다는 게 과연 맞는 얘기일까. 궁성은 당대의 사상과 종교, 지식이 총 결집된 결과물이 아닐까.

    이처럼 의문을 갖게 된 이유는 이 성이 다른 왕도 아닌 파사왕 때 만들어졌고, 초승달과 결부시켜 성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파사라는 명칭은 페르시아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고 했는데, 근동지역에는 옛적에 달, 그중에서도 초승달에 대한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근동지역에는 예로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역(The fertile cresent district)’이라는 지역이 있었다.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이 있는 지역에서부터 시리아, 이스라엘, 요르단까지 이어지는 비옥한 구릉지대를 말하는데, 학자들은 이 지역을 인류 첫 문명의 요람지로 추정한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에리두(Eridu)는 인류가 건설한 최초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유목민은 에리두의 언덕을 ‘두 초승달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아부 샤라인’이라 했다. 또한 에리두에는 ‘초승달의 방파제’로 알려진 성벽이 있기도 하다.

    에리두에서 20여 km 떨어진 우르라는 도시에는 달의 신 ‘난나’(후에 Sin이라 불렸음. 원래는 보름달이었다가 후에 초승달로 변모됨)를 모시던 신전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우르는 ‘달의 도시’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도 초승달은 이슬람의 대표적인 징표여서 여러 이슬람 국기에서 초승달 그림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파사왕 때 초승달 형상으로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신월성, 월성이라 불렀던 사실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신라와의 어떤 문화적 연관성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닐까.

    다음으로는 동물의 뿔로 만든 각배(角杯)라는 술잔이다. 설화에 따르면 신라 4대 임금인 석탈해도 외지에서 온 이방인으로 보이는데, 탈해왕 때 각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각배는 우리 토착문명의 산물이 아니다. 멀리 지중해의 에게 문명권에서 성행해 근동지역까지 미쳤는데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와 가야 지역의 고분에서만 발굴되고 있다. 또한 신라의 4∼6세기 적석목곽분에서 지중해 로마지역의 유리그릇이 많이 출토됐는데, 이 그릇들도 각배와 비슷하게 전파된 것으로 추측된다.

    “첨성대는 메소포타미아 여신 섬긴 석녀(石女) 선덕여왕의 개인 제단”

    첨성대와 지구라트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사진들이다.<br>바벨탑을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사마라의 광탑. (왼쪽) 흙벽돌로 쌓은 우르의 지구라트. (오른쪽 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오른쪽 아래)

    기마민족 루트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 문명과 수메르 문명의 원초적 유사성 외에도 신라왕실과 근동지역이 어떤 식으로든 문화적 교류를 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아시아 대륙의 양끝에 있는 신라와 근동지역은 어떻게 교류할 수 있었는가. 이에 대해서는 각배가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각배는 기원전 8∼2세기경에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한 유목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들의 분묘에서도 많이 발굴되어 그 유통경로를 짐작케 한다. 즉 근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로 이어지는 스텝지역의 기마민족 루트를 따라 신라까지 전파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시아에는 또 다른 기마민족인 흉노족이 있어 두 종족 간의 접촉과 민족 이동 과정에서 각배가 아시아의 동쪽 끝인 신라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특기할 사실은 이러한 유물들이 고구려와 백제에는 전해지지 않고 신라에만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학자들은 북방 초원 루트에서 동해안을 따라 이주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아마도 북만주 세력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앞에 언급한 대로 박혁거세가 ‘바다를 건너온 족속’이라는 추정은 이러한 루트가 있었음을 시사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신라의 대표적 유물인 금관(金冠)과 찬란했던 황금문화도 모두 스키타이, 흉노계의 문화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기마민족이 유달리 금에 집착한 것은 이동이 잦은 생활에서 금이 휴대하기가 간편하고 높은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 문화가 근동지역의 문화와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그 중간에 기마민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스키타이인은 원래 이란계 유목민족이었으므로 이들이 근동의 문화에 익숙해 있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들과 흉노의 접촉을 통해, 또는 직접적인 전래를 통해 근동의 문화가 신라에까지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뤄볼 때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인 지구라트를 닮은 건축물이 신라에도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문화적 유사성은 신앙이라고 예외일 수 없으며,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첨성대, 신라의 지구라트?

    경주 첨성대는 과연 우리 선조들이 세운 지구라트였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첨성대가 지구라트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실상 우리는 첨성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서도 그 구조 자체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먼저 지구라트의 구조는 내부를 진흙 벽돌로 채웠다는데, 그토록 커다란 건축물이면서도 내부에 방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첨성대도 내부가 비어 있지 않고 12단까지 채워져 있다. 왜 하필 12단까지 채워져 있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하기로 한다.

    외부는 구운 벽돌로 덮었는데, 이와 비슷하게 첨성대의 외부도 벽돌식 형태의 돌로 돼 있다. 이 돌들이 첨성대의 축조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벽돌 형태의 돌들로 쌓은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 듯하며, 나는 그 의미를 지구라트 형태의 조형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한다.

    다음으로, 지구라트의 상단부에는 사각형의 신전이 설치돼 있었다. 이는 그들이 숭배하는 신을 모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단부에서 이 신전으로 오르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첨성대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조를 볼 수 있다. 내부의 상층부에는 2개의 정(井)자형 장대석이 걸쳐져 있는데, 나는 앞에서 이 정자석들은 첨성대의 구조적 안정성을 위해 설치된 게 아니라고 언급했다. 또한 혹자는 이 정(井)자를 첨성대의 우물과 같은 구조를 나타내려 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왜냐면 정자석이 2개나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 정자석들을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일종의 방(室)을 나타내려 한 건 아니었을까. 정(井)을 우리는 흔히 ‘우물’로만 생각하기 쉬운데, ‘우물 난간의 모양’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천정(天井)이라는 어휘가 그 증거이다.

    따라서 정(井)자형의 두 장대석을 위와 아래에 걸쳐놓은 것은 일종의 방과 같은 공간을 나타냄으로써, 결과적으로 지구라트 위에 있던 신전을 의미하려 했던 게 아닌가 여겨지는 것이다. 이 정자석 아래에 사다리만 걸쳐놓으면 이 또한 지구라트 위에서 볼 수 있던 계단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 아래에 12단까지 흙으로 채워져 있는 이유에 대해 감이 잡힐 듯하다. 이는 하계(下界)를 나타내려 한 게 아니었을까. 12라는 숫자는 인간 세상에서 극히 중요한 숫자였으며, 많은 분류체계에 대한 척도였다.

    그런데 정자석이 마련한 공간은 6개의 단으로 이뤄져 있다. 이처럼 6개의 단은 막연히 만든 게 아니고, 뭔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뒤에서 더 자세히 논하고자 한다.

    정자석은 실상 첨성대의 비밀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코드인데도 그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첨성대가 우물과 비슷한 형태이기 때문에 정자석이 막연히 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첨성대가 위치한 장소는 월성의 서북쪽이다. 첨성대 주변에는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얽혀 있는 계림과 고분군이 있어 신라인에게 신성한 의미를 가진 지역이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이와 함께 첨성대가 월성의 서북쪽에 세워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고대인에게 서북쪽은 모든 것의 시작으로 생각되는 중요한 방위였다.

    우물 정(井)자에 숨은 뜻

    그러면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는 정사각형, 혹은 직사각형인데, 왜 첨성대는 원형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라트가 사각형으로만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사진에서 보는 탑은 메소포타미아의 압바스 왕조의 수도였고 현재도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의 성지 중의 하나인 사마라(Samarra)에 있는 첨탑인데, 흔히 ‘사마라의 광탑(光塔)’이라 불린다. 전체적으로 원추형이며, 높이는 50여 m에 달한다. 특이하게도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유명하며, 최상부는 신전을 의미하는 듯한 형태이다. 학자들은 이 탑을 지구라트로 간주하고 있으며,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바벨탑을 모방해 세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바벨탑은 대표적인 지구라트였다.

    여기에 또 다른 이유를 보태자면 우리 민족에게 하늘과 관련된 단(天壇)은 원래 원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 듯하다. 아마도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강화도의 참성단이 그 증거이다.

    그렇다면 지구라트 외부에서 볼 수 있는 계단이 왜 첨성대에는 없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계단이 지구라트의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영국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지구라트 항목 중 이에 대한 설명을 인용해본다.

    ‘(지구라트가) 원래는 밖으로 낸 3개짜리 계단이나 나선형 통로를 통해 올라가도록 했으나 발견된 지구라트 가운데 거의 반수는 올라갈 수 있는 어떤 길도 찾아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첨성대의 상단부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첨성대의 상단부는 흔히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하고 있다고 표현된다. 실상 우물 정자라고 하기에는 중앙의 사각형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네 귀퉁이의 돌출 부분이 미미하기는 하나, 이 형태가 우리 전래의 우물을 나타내려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옛 우물들의 입구가 흔히 이렇게 생긴데다가, 네 귀퉁이를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않고 튀어나오게 해서 井자 형태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왜 상단부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지구라트의 상단부가 이러한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 기록에도 나와 있지 않다. 여기에는 신라인들의 사고방식이 결부됐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신라인에게 우물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시조 박혁거세는 나정(蘿井)이라는 우물과 관련해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알영정(閼英井)에서 나온 용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한 나라를 여는 시조는 하늘에서 내려보내는 것이라고 간주할 때 신라인에게 우물은 바로 하늘과 통하는 장소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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