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⑫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허무와 절망 넘어선 ‘극기적 긍정’의 미학

  •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4/9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모비딕’ 초판의 표지.

왼편 끝줄의 좌석 가장자리 벽면에 ‘허먼 멜빌의 자리(Herman Melville’s pew)’라는 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교회는 그렇게 그가 이곳을 방문한 자취를 남겨 후인들의 호기심을 달래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벽면에 새겨진, 검은 테를 두른 대리석 비명이다. 바다에 수장되어 사체를 찾을 길이 없는 선원들의 유족들은 지상의 무덤 대신 이곳 교회당의 벽면에 묘비명을 새겨 상실의 허망함을 달랬다. 이스마엘은 ‘교회’라는 제목이 붙은 소설의 7장에서 그들의 심사를 이렇게 대신 전한다.

아아 망자를 푸른 땅에 모신 사람들이여,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기 꽃밭 속에 잠들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여기 이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황량한 추억을 알 수 있겠는가. 한 줌의 유골도 거기에 없는, 저 검은 테 속의 대리석이 주는 가슴을 치는 공허감! 움직이지 않는 저 묘비명들이 상기시키는 절망감! 모든 신앙심을 무화시키는 저 글귀들 속에 스며 있는 공포 어린 허무감과 불신의 마음. 그것은 무덤도 없이 죽어간 이 귀속할 곳 없는 사람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모비딕’ 전체에서 이보다 절절한 문장을 나는 찾지 못한다. 갓 20대에 들어선 젊은이의 입에서 어떻게 이런 절규가 쏟아져 나올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의 벼랑 끝에서 죽음을 온몸으로 느껴본 자가 아니고서는 토로할 수 없는 외침이다. 삶의 한가운데로 짓쳐들어와 모든 것을 부질없는 환영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싸늘한 부동의 침묵. 이것이 또한 소설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3일 동안 아합과 모비딕의 대결을 지켜보던 바다는 한순간에 고랫배 피쿼드 호도, 그것을 지휘한 선장도, 그의 불 같은 원한과 집념도, 모두 거대한 동심원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어당겨 흔적도 없이 삼켜버린다. 바다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한 무한경의 세계로 되돌아가고 그 위로 바닷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간다. 홀로 살아남은 이스마엘은 관을 부표 삼아 그 광막함 속을 이틀 동안 헤매다 극적으로 구조된다.

죽음은 이렇게 모비딕의 시종(始終)을 감싼다. 그러나 소설을 떠받치는 힘은 그 허무와 절망을 넘어선 극기적 긍정,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초탈의 미학이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앞길에도 검은 명판의 주인공들과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에 잠시 침울해지지만 이내 그것을 떨치고 평상심으로 돌아간다.



이스마엘은 청춘의 나이이지만 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아니다. 그는 이미 엄혹한 삶의 현실을 밑바닥까지 체험하고 그로부터 밀려난 국외자로서 새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작가가 자신을 닮은 화자에게 이스마엘이란 이름을 부여한 또 다른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회당을 나와서 우리는 한 블록 아래의 항구로 걸음을 옮겼다. 수호신인 양 트라이턴 상이 항구의 초입을 지키고 있다. 부두는 크고 작은 배들로 가득 차 있지만 오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뉴베드퍼드의 현재 인구는 약 10만. 오늘날에도 대서양 연안의 고기잡이, 특히 가리비 조개잡이의 중심지로서 많은 어선이 이곳을 모항(母港)으로 삼는다.

뉴잉글랜드 부유층이 즐겨 찾는 여름 휴양지 마사스 빈야드(Martha’s Vineyard)와 엘리자베스 섬의 커티헝크(Cuttyhunk)로 가는 여객선이 이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여름철에는 이 지역을 찾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나 소설이 전하는 바, 19세기 중엽 세계 포경업의 중심지로서 뉴베드퍼드 항이 누렸던 활기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뛰어난 사랑의 이야기’

소설 속에서 이스마엘이 고랫배를 타기 위해 고향인 뉴욕 맨해튼을 떠나 뉴베드퍼드에 도착한 것은 12월의 어느 토요일 밤이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배를 타고자 하지 않는다. 고래잡이의 명예와 영광을 증언하는 소설의 화자답게 이스마엘은 미국 포경업의 발상지인 낸터키트에서 그의 이력을 시작하고자 한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힘들고 고달픈 고래잡이에 나서려고 하는 젊은이들은 대개의 경우 이 뉴베드퍼드에서 발을 멈추고 배를 골라잡아 출항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두어야겠다. 나는 낸터키트에서 떠나는 배가 아니면 결코 타지 않을 작정이었는데, 그것은 그 유명한 섬과 연관된 모든 것에 대해 떠들썩하게 말해지는 것들이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에는 뉴베드퍼드가 서서히 포경업을 독점하여 낸터키트가 훨씬 뒤처지고 있긴 하다. 그렇지만 미국에서 죽은 고래를 처음으로 건져낸 낸터키트야말로 뉴베드퍼드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4/9
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연재

미국 문화 원류 탐험기

더보기
목록 닫기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댓글 창 닫기

2023/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