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 문상주 한국학원총연합회장

‘세계의 師父’ 꿈꾸는 한국 교육계 두 원로

  • 권주리애 전기작가, 크리에이티브 이브 대표 evejurie@hanmail.net

    입력2007-06-04 11: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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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와 문상주 한국학원총연합회장은 1981년부터 형제나 다름없이 지냈다. 독일 광부 출신으로 고학 끝에 교육학 박사가 된 권 교수와 20대 초반부터 학원을 운영해 교육사업가로 성장한 문 회장은 제대로 된 교육만이 선진국을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두 사람은 생각이 같기에 상대가 그저 웃어주기만 해도 큰 힘을 얻는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 문상주 한국학원총연합회장

    문상주 한국학원총연합회장(왼쪽)과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권이종(權彛鐘·67) 한국교원대 명예교수와 문상주(文尙柱·60) 한국학원총연합회 회장은 각기 제도권 안팎에서 한 길을 걸어오며 26년간 ‘찰떡 궁합’을 과시해왔다. 문 회장은 1968년부터 근 40년간 학원사업을 해온 교육사업가이고, 권 교수는 서독 광부로 파견돼 고생 끝에 교육학 박사학위를 받은 평생교육 전문가다. 1981년 문교부가 ‘사회교육법’ 제정을 위해 관계 전문가들을 불러 의견을 청취할 때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지금껏 형님, 아우 하며 돈독한 정을 나누고 있다.

    새벽 전화

    1968년 봄 문 회장이 서울 장충동 2층 건물을 세내어 조그만 입시지도교실을 차린 것은 21세 때였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그의 실력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그해 가을 퇴계로에 ‘경기 아카데미 학원’을 열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2년 고려학원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10여 년 만인 1981년엔 대형 입시학원인 제일학원을 인수했다. 1980년대 초 학원가를 꽁꽁 얼어붙게 한 ‘재학생 학원출입 금지조치’가 내려졌을 때 대형 학원을 인수하자 주위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선진국을 돌아본 그가 내린 결론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교육열은 식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재학생 학원출입 금지조치에 대부분의 학원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문교부에서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대책을 마련토록 했다. 문 회장은 이때 권이종 교수를 처음 만났다.

    “성악을 전공한 저는 교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 좋아 보이는 권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인지 공교육과 사교육에 모두 막힘이 없었어요. 선진국에서 공부한 권 교수의 지식이 단연 돋보여 친해지고 싶었죠.”



    권이종 교수 또한 처음 본 문 회장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날 회의에서 훤한 인상의 젊은이가 눈에 띄었어요. 젊은 나이에 큰 학원을 운영한다는데, 남성복 모델을 할 정도의 용모와 뜨거운 열의에 호감이 갔죠.”

    서로에 대한 호감은 곧 새벽에 전화 통화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문 회장은 새벽 5시면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인데, 권 교수도 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권 교수는 서독 광부 시절 낮에는 탄광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에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밴 탓이라고 했다.

    “권 교수는 인간이 의지 하나로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참으로 본받을 만한 분이죠. 그래서 전 힘들 때면 권 교수를 보고 힘을 얻어요.”

    현재 청소년육성회 총재를 맡고 있는 문 회장은 학원 사업 초창기부터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왔다. 조그만 잘못으로 학생들이 전과자가 되는 걸 막아보려고 경찰서를 드나들며 애쓰다보니 피해자들은 종종 그를 가해 학생의 부모인 줄 착각한다. 보람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문 회장은 머리 아프고 속상하면 권 교수에게 전화를 건다.

    “제가 힘들어서 전화하면 권 교수는 그냥 웃어요. 요즘 참 기쁘다면서. 권 교수 생활이 뻔해 특별히 즐거울 만한 일이 없다는 걸 아는데, 낙관적으로 사는 거죠. 광부에서 교수까지 됐으니, 지하 막장에서 보낸 삶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더 낫고 행복하다는 게 권 교수의 생활철학이죠.”

    한국의 빌 게이츠 길러내자

    두 사람은 1980년대에 학원과 청소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을 일주한 적이 있다. 낮에는 학원과 청소년 시설을 돌아보고, 밤에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권 교수는 문 회장에게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 문상주 한국학원총연합회장

    두 사람은 청소년 교육과 평생교육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 덴마크 유스호스텔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청소년 교육이 덴마크 국가 발전에 기여해 황폐한 덴마크 땅을 기름지게 바꿔놓는 원동력이 됐다고 들었어요. 그때 참 부러워서 고국에 돌아가면 그런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문 회장을 만나 단순히 청소년을 선도하는 데서 더 나아가 청소년을 지도해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고 했지요.”

    문 회장은 권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국 순례를 하기 얼마 전, 미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를 여행한 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유흥가에서 외국인을 상대하는 한국 여성이 많은 걸 목격하고는 가슴이 아팠어요. 우리나라도 하루빨리 선진국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권 교수가 청소년 교육에 기여할 만한 일을 해보자고 하기에 무릎을 쳤지요.”

    문 회장은 즉각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다. 1982년 일본 컴퓨터 전문학교와 계약을 하고, 국내에서 지원자 10명을 뽑아 학비와 일본에서의 생활비를 지원했다. 주변에서 “나라가 할 일을 뭣 하러 사교육 하는 사람이 떠맡느냐”고도 했지만, 그는 ‘앞으로 세상은 컴퓨터가 지배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밀어붙였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얻은 깨달음이었다. 문 회장은 한국의 빌 게이츠를 길러내는 것을 꿈꿨다. 그는 유학생 10명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영친왕이 살던 곳을 찾았다.

    “영친왕이 이곳에서 사시게 된 것도 우리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니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라고 일장 연설을 했더니 학생들이 공감하더군요.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인들이 살던 곳도 보여주며 정신교육을 시켰어요.”

    유학생들은 1년간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2년제 전문대학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일본 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한국 학생들이 컴퓨터 시험에 대거 합격했다’는 소식이 일본 신문에 크게 실렸다.

    아들 중매와 딸 주례

    문 회장은 1994년부터 대통령직속 교육개혁위원회 위원으로 일할 때도 컴퓨터 교육을 강조했다. ‘미스터 컴퓨터’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이후 문 회장은 우체국 공중전화에 남겨진 동전을 수거해 전국의 학교에 컴퓨터를 마련해주는 ‘우체국 낙전 사업’을 추진했고, ‘주부 100만 인터넷 교실’도 그의 작품이다.

    1997년 문 회장이 중국에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학(중화고려대학)을 설립한 것도 한국 선진화의 초석을 다진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이 더 성장하려면 미국과 일본 외에 새로운 경제 파트너를 찾아야 하는데, 한국 자본으로 대학을 지어 중국인을 가르치면 친한파(親韓派)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중국에 한국 상품을 팔려면 우선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야 했다.

    문 회장은 2002년 한일월드컵 때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월드컵 공동 개최국으로서 일본에 뒤질 수 없다는 일념으로 전국 서포터즈를 만들고 회장을 맡았다. “월드컵 경기를 관람하러 온 관광객, 선수, 관계자들에게 모든 면에서 ‘일본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고 싶었다”는 그는 한국직능단체 회장으로서 택시기사, 호텔 및 음식점 종업원 등 각 분야의 인력이 각자 맡은 바 최선을 다하도록 유도했다.

    이렇듯 문 회장이 큰일을 벌일 때마다 권 교수는 쌍수를 들어 돕는다.

    “문 회장은 번뜩이는 총명함으로 한 번 결정하면 뒤 돌아보지 않고 무섭게 추진해요. 그래서 반대파를 만들기도 하고, 주위 사람을 지치게도 하기 때문에 저는 늘 ‘서두르지 말고 여유 있게 추진해라’ ‘가슴으로 사람들을 포용해라’고 말하죠. 사람들이 문 회장을 ‘냉철한 리더’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참 다정해요.”

    문 회장과 권 교수는 집안 대소사까지 상의한다. 문 회장은 권 교수에게 아들 중매를 부탁했고, 권 교수는 문 회장에게 딸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을 정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

    권 교수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파독 광부 2기’에 지원해 독일로 떠났다. 소 팔아 여비를 마련해준 가족에게 보답하고자 연장 근무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공부했다.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온 성실한 젊은이에게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박사까지 마치는 행운을 누렸다. 1979년에 귀국해서는 전북대 교수가 됐고, 1985년부터 한국교원대에 재직하다 지난해 정년퇴직했다.

    “퇴직하는 날 문 회장이 찾아왔어요. ‘형님 이제부터 뭘 하실 겁니까’ 하고 묻기에 ‘퇴직했으니 이제부터 쉬어야지’ 했더니 을지로 3가에 사무실을 얻어놨다면서 청소년 육성에 대한 연구를 해보라는 거예요. 1980년대 초반에도 수입 골프채를 소포로 덜렁 보내고는, ‘교수 체면도 있으니 연습장에 등록하라’고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도 그렇게 절 감동시켰지요.”

    그러나 문 교수는 권 교수가 자신에게 베푼 것에 비하면 약소하다고 손사래를 친다.

    “제가 장남이라 형이 없어서, 친형처럼 26년을 한결같이 지냈어요. 특히 교수님의 긍정적인 사고는 제가 많은 일을 추진하는 데 큰 힘이 됐지요. 이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도 교육 개방화가 우리 교육현실에 미칠 영향에 대해 여러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했는데, 오직 권 교수님만 ‘돈 워리(Don’t worry)’라고 했어요. 우리는 저력 있는 민족이라서 충분히 헤쳐 나갈 수 있다고요.”

    두 사람은 지금 같은 꿈을 꾸고 있다. 남을 도울 능력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국민소득이 5만달러가 되고, 우리 국민이 ‘세계의 사부(師父)’가 되게끔 청소년 및 평생교육에 매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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