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상주 한국학원총연합회장(왼쪽)과 권이종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새벽 전화
1968년 봄 문 회장이 서울 장충동 2층 건물을 세내어 조그만 입시지도교실을 차린 것은 21세 때였다.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 그의 실력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그해 가을 퇴계로에 ‘경기 아카데미 학원’을 열기에 이른다. 그리고 1972년 고려학원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10여 년 만인 1981년엔 대형 입시학원인 제일학원을 인수했다. 1980년대 초 학원가를 꽁꽁 얼어붙게 한 ‘재학생 학원출입 금지조치’가 내려졌을 때 대형 학원을 인수하자 주위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선진국을 돌아본 그가 내린 결론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교육열은 식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부의 재학생 학원출입 금지조치에 대부분의 학원이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문교부에서 관계자들을 불러놓고 대책을 마련토록 했다. 문 회장은 이때 권이종 교수를 처음 만났다.
“성악을 전공한 저는 교육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이 없었어요. 그런데 사람 좋아 보이는 권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를 많이 해서인지 공교육과 사교육에 모두 막힘이 없었어요. 선진국에서 공부한 권 교수의 지식이 단연 돋보여 친해지고 싶었죠.”
권이종 교수 또한 처음 본 문 회장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날 회의에서 훤한 인상의 젊은이가 눈에 띄었어요. 젊은 나이에 큰 학원을 운영한다는데, 남성복 모델을 할 정도의 용모와 뜨거운 열의에 호감이 갔죠.”
서로에 대한 호감은 곧 새벽에 전화 통화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문 회장은 새벽 5시면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인데, 권 교수도 새벽부터 깨어 있었다. 권 교수는 서독 광부 시절 낮에는 탄광에서 일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새벽에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밴 탓이라고 했다.
“권 교수는 인간이 의지 하나로 어떻게 성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참으로 본받을 만한 분이죠. 그래서 전 힘들 때면 권 교수를 보고 힘을 얻어요.”
현재 청소년육성회 총재를 맡고 있는 문 회장은 학원 사업 초창기부터 청소년 선도에 앞장서왔다. 조그만 잘못으로 학생들이 전과자가 되는 걸 막아보려고 경찰서를 드나들며 애쓰다보니 피해자들은 종종 그를 가해 학생의 부모인 줄 착각한다. 보람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문 회장은 머리 아프고 속상하면 권 교수에게 전화를 건다.
“제가 힘들어서 전화하면 권 교수는 그냥 웃어요. 요즘 참 기쁘다면서. 권 교수 생활이 뻔해 특별히 즐거울 만한 일이 없다는 걸 아는데, 낙관적으로 사는 거죠. 광부에서 교수까지 됐으니, 지하 막장에서 보낸 삶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더 낫고 행복하다는 게 권 교수의 생활철학이죠.”
한국의 빌 게이츠 길러내자
두 사람은 1980년대에 학원과 청소년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전국을 일주한 적이 있다. 낮에는 학원과 청소년 시설을 돌아보고, 밤에는 술잔을 주고받으며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때 권 교수는 문 회장에게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