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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3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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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밥을 장복하면 쓸모없노라”

“장관(壯觀)은 깨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더라”

중국 선양의 고궁.

연암은 현실만 직관하지 않고 그 역사와 그 반면도 깊이 살필 줄 알았다. 필자는 여기서 연암의 두 가지 ‘소극적인 실학론’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 하나는 오늘의 성장 억제론에 상당하는 ‘척토향의(瘠土向義)’론이요, 또 하나는 오늘의 도무소부재(道無所不在)론에 상당하는 ‘와력분양(瓦礫糞壤)’론이다.

1780년 7월13일 고가자(孤家子)를 출발해 백기보(白旗堡)로 이동 중이던 연암은 영안교에서부터 끝없이 뻗은 진펄과 아름드리나무를 엮어 만든 다리 아래로 흐르는 기름진 녹수를 보면서 ‘저들을 개간해 몇만 뙈기 옥답을 만들면 금싸라기 몇억 석을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풍요로운 꿈을 만끽했다. 그러면서 천하의 강국 청나라를 이끄는 강희 황제는 왜 저 땅을 내버려둘까 의문을 가졌다. 더구나 농업을 장려하고 생산을 고취하는 ‘경직도’나 ‘농정전서’ 같은 책을 편찬하고, 그 자신이 농가의 자식이었으며, 그 땅은 산해관 밖 강희의 통치권이 안전하게 미치는 본향이 아닌가.

그때 비로소 연암은 간파했다. 그것은 강희 황제의 깊은 사려라고. 번지레 기름이 흐르는 이밥을 장복하면 사람의 힘줄이 풀리고 뼈가 물렁거려 전쟁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노라고. 그래서 차라리 백성에게 수수나 기장밥을 늘 먹임으로써 타고난 입맛을 잃을지언정 혈기를 돋우는 편이 나라를 위해서는 선책이라고. 옳지, 옛날 선왕들도 백성에게 ‘내기(耐飢)’, 곧 주림을 참도록 교화하지 않았던가. 아니 심양의 그 궁궐 대전에 붙어 있는 편액에도 ‘담박(淡泊)’ 두 글자가 빠지지 않았던가. 연암은 강희의 속내를 이렇게 표현했다. ‘차라리 천리에 뻗은 기름진 옥토를 팽개칠지언정 척박한 땅에서 갈고 마시며 충의를 지향하는 백성을 만들겠다’고.

연암이 7월15일 의무려산이 에워싼 북진(北鎭·지금의 北寧)에 도착했을 때다. 서울과 북경을 오가는 조선의 사절이나 무역상이 대개 여기서 만나는데, 만나면 으레 여행의 소감을 나누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어디가 가장 장관이었냐는 이야기가 오가는데, 사람마다 달랐다. 요동벌을 비롯해 백탑, 연도의 점포, 계문(텺門)의 숲, 노구교, 산해관, 각산사, 망해정, 조패루, 유리창, 통주의 배, 금주의 목축, 서산 누대, 사천주당, 호랑이 우리, 코끼리 우리, 남해자, 동악묘, 북진묘 등이 주로 손에 꼽혔다.



‘3단계 장관론’

그런데 연암의 장관론은 단순한 자연물이나 문물 그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우선 사람의 지체나 지식 수준을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로 3등분하고 각 계층에 따른 장관을 말하되 외관(外觀)이 아니라 정치관이요 사상관이었다. 그러한 관점은 연암이 평소 지니고 있던 실학관을 비롯, 조선인의 시각과 ‘춘추’에 따른 중화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를 굳이 ‘3단계 장관론’이라 담론하고 싶다. 그것은 연암의 담론이 그만큼 내외와 정치, 역사, 실학을 아우르는 정론일 수도 풍자일 수도 있어서다. “중국의 장관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이른바 상사(上士)는 발끈 화를 내면서 “중국에는 도시 볼 것이 없노라(都無可觀)”고 한다. 상사란 지체가 높은 계층을 말하는데 ‘도시 볼 것이 없노라’는 논거가 재미있다. 황제로부터 장상과 대신, 백관, 다시 만백성에 이르기까지 머리를 깎았음을 꼬집는 말인데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면 개, 돼지나 다를 바 없는 오랑캐라고 혹독하게 매도하는 것이다. 다름 아닌 황제로부터 만백성까지 변발을 강요한 청나라 문화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두 번째, 중사(中士)에게 “중국의 장관이 무어냐”고 물으면 “볼 만한 것이 무엇일까(何足觀)?” 하고 되묻는다. 상류층처럼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명분론이 아니라 선은 무어고 후는 무어라고 한 걸음 물러서서 차근차근 챙겨보는 현실론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중국은 오랑캐의 세상이 됐지만 중국의 성곽이나 궁실, 그리고 인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은·주 3대로부터 전습한 왕제와 한·당·송·명의 법률과 제도 등이 변함없었다. 요컨대 청나라 왕조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를 충실히 집행해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치더라도 그것이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쓸모 있다면 주저 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실을 긍정했다.

“보라! 저들 (우리로부터) 오랑캐로 불리는 청조는 정말로 무엇이 중국을 이롭게 하고 그것을 오래오래 누릴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연암이 복중에 깊이 간직한 말이 여기서 불거져 나왔는지 모른다. 연암은 장관을 담론하면서 조선의 처지를 드러내고 있다. 조선이 명나라의 형제 국가로서 그동안 명나라로부터 받은 은혜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1592년 임진년 왜놈이 쳐들어왔을 때 명나라는 원군을 보내 이를 막았고, 다시 1636년 병자년 청군이 몰려왔을 때 명나라 열(列) 황제는 제 코가 석 자나 빠졌음에도 바다 건너의 불을 끄려고 안간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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