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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6·3항쟁 ‘프락치 폭로 보복 사건’ 송철원 父子 이야기

눈물로 모은 6·3의 기록, 40년 만에 드러난 진실

  • 최영철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ftdog@donga.com

1964년 6·3항쟁 ‘프락치 폭로 보복 사건’ 송철원 父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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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공개된 6·3 자료

1964년 6·3항쟁 ‘프락치 폭로 보복 사건’ 송철원 父子 이야기

송상근씨에게 큰절을 하고 있는 6·3동지회 회원들.

‘1964년 1월23일(목) 맑음 : 차관회의에서 합의하여 일반 공무원에게 강조하는 바가 발표되었다. 매 토요일 저녁에는 죽을 먹을 것. 머리를 짧게 깎을 것. 자전거를 타고 다닐 것 등등. 재미있고 기가 막히는 말씀들이다. 어느 하나 씨가 먹지 않는 말들이다. 몇 만원씩 월급에, 판공비에 호식하시고 관용차에 자가용 넘버까지 사용하는 분들의 잠꼬대이다. 그 많은 공무원들이 얼마의 수입으로 무슨 방법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줄이나 아는지 모르는지? 부정과 부패에서 살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 소수의 청빈한 이들은 죽이 아니라 결식(缺食)이며 자전거가 아니라 도보(徒步)이다. 우선 고위층에 있는 이들이 관용차나 자가용 관용차를 버리고 뇌물에 좌우 안 되어 주었으면…이것이 제일 급하다.’

6·3항쟁 동지들의 5월4일 모임에서 송철원씨는 놀랄 만한 자료들을 공개했다. 1964년 3월25일부터 1969년 4월30일까지 주요 시국사건에 대한 신문보도를 모아놓은 대형 스크랩북 8상자와 6·3항쟁과 관련된 각종 자료였다. 모두 쌓으면 높이가 4m에 달하고 무게는 소형 트럭 적재량의 절반 분량이다. 6·3항쟁 관련 신문 보도뿐 아니라 관련 학생들의 입건에서부터 재판과정, 결과까지 정리한 도표와 담당 판사, 검사의 이름이 정리된 일지, 운동권 주요 멤버들 간에 오고간 서신, 선언문과 격문 등이 망라돼 있다. 스크랩북은 종이봉투를 뜯어서 바탕을 하고 달력을 오려 페이지 표시를 하는 등 모두 재활용품을 이용한 것인데 아직까지도 보관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 방대한 스크랩북과 자료들은 아버지 송상근씨가, 아들 철원씨가 6·3항쟁에 앞서 1964년 3·24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한 이후부터 모은 것. 철원씨와 관계된 것으로는 도피 생활 중에 보낸 편지, 구속통지서, 격려편지, 감옥에 넣은 영치금 영수증, 면회기록 및 차입표, 계엄사령관의 출두 공고서, 중앙정보부로부터 린치 당한 사실을 동아일보 김원기 (전 국회의장)기자에게 연락하라고 아버지에게 건네준 메모, 불꽃회 관련 자료 등이 있다. 서울대신문 기자인 정치학과 61학번 동기 김학준(현 동아일보 사장)이 철원씨 사건과 관련해 쓴 기사도 눈에 띈다. 송상근씨는 스크랩을 시작한 이유를 스크랩북 맨 앞머리에 이렇게 써놓았다.

‘1964년 5월2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을 중심으로 거행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한 후 5월21일 새벽 불법납치 폭행당함을 계기로, 국내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제반 데모에 관한 지상(紙上) 보도기사를 전부 발취 수집하기로 결심하였다.



4년11개월이 지난 이달 (철원이가) 교직생활(건국대 강사)에 들어감으로써 다음달 5월분으로 중지하려고 한다. 그간의 가택수색 여러 차례 등으로 일부가 습기 차고 벌레 먹어 훼손된 것은 유감천만이다. 1969년 4월.’

철원씨는 6·3항쟁 한 해 전인 1963년 2학기 중반까지만 해도 운동권에서 그리 주목받는 인물이 아니었다. 3학년 때인 1963년 정치학과 학생회장선거에서 자신이 지지한 경기고 동문이 낙선하자 기성 정치판과 비슷한 학생회에 낙담하고 운동권 핵심세력과 가까워진다. 이때 그는 6·3항쟁의 트로이카라고 불리는 김중태·현승일·김도현과 지도부 그룹이던 김정남·김지하(김영일)·최동전·박재일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집을 나와 김도현이 편집장으로 있던 문리대 학생기관지 ‘새세대’ 사무실에서 합숙하며 운동권의 중심으로 성장한다.

중정 프락치 밝혀내다

그러던 어느날 송씨는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 선배인 김모씨가 영자신문 기자라며 학교에 나타나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김씨는 문리대 학생회장과 서울대 총학생장을 지낸 인물로 1963년 봄 대학 졸업 후 행방이 묘연했다. 대학1, 2학년 때 김씨를 분신처럼 따라다니며 선거활동을 도왔던 송씨는 김씨가 느닷없이 나타나 “정치를 하게 도와달라” “입당원서를 써 달라”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놓자 최동전·김도현에게 그의 뒤를 캐보겠다고 하고 김씨에게 접근했다.

조사 결과 김씨는 졸업 후 중앙정보부의 학원사찰 전문요원이 돼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이던 서울대 문리대 근처를 배회하며 동향을 보고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결국 중정의 프락치로 밝혀진 김씨는 뒷날 국가안전기획부 국장을 지냈다). 몇몇 학생이 그에게 도움을 준 사실도 밝혀냈다. 송씨는 이런 사실을 동료들에게 알린 후 그해 말쯤 집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송씨에게 형과 누이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에서 학비를 벌 생각으로 라디오 수리학원과 영어학원에 다니며 유학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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