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출마선언문은 “오랜 번민과 고뇌의 시간을 거쳐 마침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몇 달간은 제 삶에 있어 가장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수많은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고, 참으로 많은 지인과 국민들을 만났습니다”라고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정치에 몸담은 지 10여 년. 어느덧 3선의 중진이 되었습니다. 1972년 2월24일 새벽, 단돈 1만4000원 달랑 들고 서울역에 내린 산골 소년이 이제 이 땅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룰 만큼 이루었습니다. 검사 시절에는 사법정의 실현을 위해 거악(巨惡) 척결에 앞장섰고, 15대 16대 국회의원 시절에는 권력형 비리를 색출하기 위해 ‘저격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감수했습니다. 2004년 4월, ‘탄핵 광풍’을 뚫고 서울 동북부 17개 선거구 중에서 한나라당 후보로는 유일하게 당선되고 나서부터 한나라당의 울타리를 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제 할 일이 무엇인지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읽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명박의 ‘원조 측근’
홍준표의 출마를 보는 당 안팎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갈렸다. “당내 경선에 활력소가 될 것”이란 긍정론이 있고, “돈키호테는 어쩔 수 없다”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팽팽히 맞선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박근혜 전 대표측의 반응도 달랐다. 전자는 불쾌해했고 후자는 그의 출마를 내심 반겼다.
그의 최근 정치적 궤적을 되짚어보자. 2006년 초까지만 해도 그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 홍준표만큼 이명박과 인간적 유대를 맺고 있던 이도 없었다. 이명박에 대한 충성도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원조(元祖)’ 측근이었다.
그러던 그는 2006년 서울시장 경선을 거치면서 이명박과 결별했다. 올해 초엔 박근혜 전 대표로부터 경선 캠프 본부장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박근혜 캠프의 상당수 인사는 그를 영입하기 위해 발 벗고 뛰었다. 박근혜 캠프에서 홍준표를 영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의원 한 명을 영입하는 의미 이상이었다.
그 역시 그 제의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물론 이 전 시장측은 홍준표가 끝내는 자기들에게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홍준표의 선택은 한동안 언론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홍준표는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출마하는, 다소 의외의 결론을 내린다. 그는 왜 스스로의 표현대로 번민과 고뇌 끝에 출마를 결심한 걸까.
홍준표의 삶을 관통하는 큰 명제가 하나 있다. 그가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나는 잃을 것이 없다”다. 이 말은 그의 뱃심과 근성을 상징한다. 배수진이자 자신감이기도 하다.
그는 경남 창녕의 가난한 집 막내아들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을 한량으로 보낸 무능력한 가장이었다. 홍준표는 국민학교만 5군데를 옮겨 다녔다. 막노동으로 먹고살기 위해 창녕, 울산, 합천, 대구를 유랑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그랬다.
장학금 준다는 곳이면 ‘똥통학교’도 마다하지 않았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돈이 많이 든다”는 아버지의 반대로 육군사관학교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도난 비료를 배급받았다가 경찰에 잡혀가 곤욕을 치르는 사건을 겪으면서 사법고시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어 홍준표는 ‘1만4000원’을 들고 상경한다. 그는 가난했고, 왜소했고, 볼품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