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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 별곡─한국의 碑銘문학 4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덕망의 코스모폴리탄 아사카와 다쿠미

  • 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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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와 아사카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한국의 나무와 흙이 되다

아사카와 다쿠미(왼쪽)와 동아일보에 실린 야나기 가네코의 음악회 예고 기사.

아사카와 다쿠미의 존재가 대중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다카사키 소지의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아사카와 다쿠미’가 1982년에 출간(한국에선 2005년 번역판 출간)되면서부터. 그전까지는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과 조선의 민예를 사랑한 유일한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야나기는 해군 장성의 아들로 도쿄대 철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부친의 후배인 사이토 조선총독의 힘을 활용해 조선민족박물관을 설립하고 조선의 민예를 이론적으로 전파하는 데 큰 족적을 남겼다. 야나기가 조선의 민예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된 계기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형 노리다카가 야나기에게 선물로 건넨 청화백자추초문각호. 직경 10.9cm, 높이 13.5cm의 이 작은 백자는 야나기가 1936년 도쿄 고바마에 설립한 일본민예관에 다른 조선 민예품과 함께 지금도 소중히 전시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해 12월 일본민예관에 가서 청화백자를 직접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일본민예관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2층의 방 하나에 오로지 조선의 민예품만을 상설전시하고 있어 이 민예관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쨌든 이런 계기로 조선을 찾은 야나기는 평소 존경해 마지 않던 아사카와를 알게 됐고, 이후 평생의 동지로 살았다. 두 사람의 우정은 아사카와의 글 곳곳에 나타나 있다. 다음은 야나기의 저서 ‘조선과 예술’의 머리말에 나온 글이다.

“1921년 내가 처음 도쿄에서 이조전을 기획할 무렵에는 소수 지인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뜻을 같이해 일해준 고(故) 아사카와 다쿠미를 지금 떠올리면 경모의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 교우를 기념하고자 ‘조선민족미술관’이 서울 경복궁 안 집경당에 설치됐다.”

이처럼 아사카와가 경성에 거점을 두고 조선 민예의 조사 결과를 야나기에게 전수하면 야나기는 일본에서 조선 민예의 이론을 정립하고 전파하는 노릇을 했다. 조선을 통해 민예의 미를 발견한 야나기는 후에 일본 민예로 그 영역을 넓히게 된다. 또 조선민족미술관을 설립할 때에는 장소 확보와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야나기가 맡고, 전시품의 수집 관리 등의 실무는 아사카와가 도맡았다. 아사카와는 “미술관이 후세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된다면 그 명예는 그(야나기)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야나기는 모든 공적을 오히려 아사카와에게 돌렸다.



언뜻 야나기와 아사카와의 관계는 정책입안자와 실무자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야나기는 조선 민예에 관한 한 아사카와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야나기도 조선을 자주 방문해 조선의 민예를 연구하기는 했으나 초기에는 관조자의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야나기는 일부 피상적 경험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조선의 미가 ‘비애의 미’라는 논리를 폈다. ‘조선과 예술’의 머리말에도 ‘가장 슬픈 생각을 노래한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시다’라는 셀리의 시구와, 유명한 희곡은 대개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들며 조선의 미는 비애가 낳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번역된 이 책은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야나기는 이 책이 나온 지 얼마 후 아사카와의 영향을 받아 이런 생각을 바꿨다. 아사카와는 실생활에서 얻은 체감으로 조선의 낙천성, 해학성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으며, “많은 훌륭한 공예품은(조선의 미는) 조선의 융성 시기에 꽃핀 것”이라고 설파했다.

불후의 명저 ‘조선의 소반’

아사카와는 단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조선의 소반(朝鮮の膳)’(1929)과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1931)가 그것인데, 한국에선 한 권으로 묶여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로 번역 출간됐다. 후세의 연구자와 후학이 반드시 참조하는 귀중한 자료이자 일반인에게도 조선의 민예를 알기 위해 꼭 권해지는 필독서이다.

아사카와는 그 많은 민예품 중 왜 조선의 소반에 주목한 것일까. 그것은 소반이 온돌방에 앉아 식사하는 문화를 가진 조선에서만 볼 수 있는, 중국에는 없는 조선 고유의 공예품이기 때문이었다. 또 소반은 사용자에 의해 아름다움이 더해가는 공예의 표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소반’ 머리말은 그의 이런 생각을 잘 반영한다.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유의 미를 발휘하므로 사용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미의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 단정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우리 일상생활에 친히 봉사하여 세월과 함께 아미(雅美)를 더해가므로 올바른 공예의 대표라고 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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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수필가, 번역가 japanlit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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