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열린 조용필 콘서트.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수만명의 관객이 모여 그의 노래를 즐겼다.
인간은 자라면서 감각기관이 작용하고 나와 남을 구별하려는 의식이 생긴다. 여기서 욕심이 생기고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어른이 되면 현실적으로 동심을 지니기 어렵다. 따라서 되도록 동심을 잃지 않으려 힘써야 하고, 동심이 가리면 되살리려 애써야 한다. 집을 나간 본마음을 되찾아오는 행위인 수양을 통해 오르려는 경지가 바로 동심의 세계다.
조용필 노래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동심이다. 조용필의 동심 지향은 ‘고추잠자리’(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곡의 노랫말은 ‘아마 나는 아직은 어린가봐 그런가봐/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기다리지/엄마야 나는 왜 자꾸만 보고 싶지…’로 돼 있다.
노래의 주인공이 몇 살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어머니와 ‘몸’이 분리돼 있는 상태다. ‘들꽃’과 ‘고추잠자리’는 주인공의 마음이 시골에 가 있음을 암시한다. ‘들꽃 따러 왔다가’ 잠이 들어 의식이 정지한 상태에서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물어본다. 비록 들꽃을 따러 나왔지만 세상은 세상이다. ‘성인’인 주인공은 어머니의 품속이 그립다.
‘나는야 언제나 술래’
주인공이 잠들어 꿈을 꿨다는 전제 아래, 그 꿈이 노인으로 태어나 거꾸로 자라서 어린이가 되고 아기가 되어 결국 태어난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역진(逆進)의 꿈이라면 주인공은 라캉식으로 표현해 ‘스스로의 퇴행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목격자’이고 그의 꿈은 ‘환상적 해방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어머니와 하나가 되어 영원히 품속에 함께 있고자 하는 주인공의 바람을 드러낸다. 그것이 완전한 상태이고, 완전한 상태는 본성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갓난아이의 마음을 되찾는 과정은 본성을 향한 역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꿈은 역진의 꿈이다.
동심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못 찾겠다 꾀꼬리’(김순곤 작사, 조용필 작곡)로 연결된다. 이 노래는 ‘못 찾겠다 꾀꼬리… / 나는야 오늘도 술래…엄마가 부르기를 기다렸는데… / 이제는 커다란 어른이 되어…’라는 가사로 돼 있다.
주인공은 술래잡기를 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어렸을 때 그는 언제나 술래였고 숨어 있는 친구들을 찾아야 했다.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찾으러 오는 엄마가 있다. 이때 ‘나’는 더 이상 술래가 아니다. 술래는 어머니가 된다. 어머니가 찾으러 오지 않으면 계속 술래 상태로 있어야 한다. 주인공은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던 시절,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찾으러 오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주인공은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술래’라고 고백한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 헤매는 술래다. 주인공은 그 꿈을 ‘찾을 때도 됐는데 보일 때도 됐는데’라고 하며 안타깝게 찾아 헤맨다. ‘못 찾겠다’고 하면서도 ‘언제나 술래’라고 강조함으로써 포기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한마음으로 놀던 고향의 어린 시절, 특히 밤이 늦으면 아이를 찾으러 동네를 다니며 이름을 부르던 어머니에 대한 꿈은 결코 포기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 노래는 단순히 어린 시절 동심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잊고 사는 것, 잃어버린 것 등 본질적인 것들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지향성을 담고 있다. ‘고추잠자리’와 ‘못 찾겠다 꾀꼬리’는 주인공의 욕심 줄이기 과정과 함께 존심(存心)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맹자는 “누구나 마음을 다하면 본성을 알고 성을 알면 하늘을 알며 그 마음을 보존하여 성을 기르면 하늘을 섬길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진심은 ‘철이 든’ 사람이 욕심의 꺼풀을 하나씩 벗겨 순정으로 돌아가는 과욕으로 구체화하며, 존심은 그 순정을 간직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두 노래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려는 것은 욕심을 하나씩 걷어내고 순정으로 돌아가려는 지향성이며, 주인공은 순정을 상당 부분 보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