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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으로 본 한중일 문화인류학 ⑦

나가사키 화교 음식 ‘쨤뽄’이 한국에 있는 까닭

  •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민속학 duruju@aks.ac.kr

나가사키 화교 음식 ‘쨤뽄’이 한국에 있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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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華僑)와 화인(華人)

나가사키 화교 음식 ‘쨤뽄’이 한국에 있는 까닭

한국에 있는 한 중국식당.

화교의 탄생은 16세기부터 본격화한 세계적인 무역 붐과 관련이 있다. 특히 명나라 때 정화(鄭和)가 이끄는 선박이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항해하면서 명나라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쿨리(苦力)’라는 별명을 지닌 중국인들이 각종 노동에 종사했다. 이들의 원래 목적은 계절노동에 있었다. 주로 남자들로 구성된 이들은 현지에서 돈을 벌어 춘절 때 고향으로 돌아갔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다룬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들이 중국인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고향과는 너무 먼 외국까지 진출한 ‘쿨리’들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현지에 적응해 살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미국이나 동남아시아의 화인들이 대부분 이런 과정에서 생겨났다. 특히 동남아시아의 화인들은 푸젠(福建)성과 광둥(廣東)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명나라 때 중앙의 통제가 미약해지면서, 돈을 벌기 위해 마을 단위로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이주한 곳 중의 한 곳이 지금의 타이완이다. 오늘날 타이완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지식인의 다수는 커자런(客家人)으로 불리는 이주민들 후손이다. 그 다음이 태국과 동남아시아로의 이주였다. 특히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상인들과 무역경쟁을 펼치면서 경제적 위상을 세운 화인들이 오늘날 동남아시아 화인의 선조다. 이들은 중국인이라는 의식도 강하지만, 동시에 이주한 곳에서의 현지화 의지 역시 강했다.

한국의 짬뽕이 나가사키의 시카이로(四海樓)라는 중국식당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이 제법 많다. 인터넷 웹사이트를 검색해보면, 직접 그 현장에 다녀와서 사진과 감상의 글을 올려놓은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지금의 ‘시카이로’라는 식당 2층에 마련된 ‘·#51748;뽄박물관’ 때문에 그 역사성이 널리 퍼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카이로는 나가사키 시내 남쪽 항구 안 언덕에 있는 관광지 오우라(大浦) 입구에 있다. 2000년에 지어진 웅장한 중국식 건물은 이 식당 주인의 차남인 친마사히로(陳優宏)가 직접 설계했다. 건물 완공 이후 2층에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자료들을 전시해 ‘·#51748;뽄박물관’을 열었다. 이 ·#51748;뽄박물관에서 밝히는 ·#51748;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51748;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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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차이나타운.

1892년 푸젠성 푸저우(福州) 출신인 19세의 천핑순(陳平順)이 사탕무역을 하는 상인의 집에서 일을 하기 위해 나가사키에 왔다. 천핑순은 상점 주인에게 돈을 빌려 손수레에 사탕을 싣고 나가사키 반도 전체를 다니면서 행상을 했다. 1894년과 그 이듬해까지 조선에서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인들의 시선이 결코 곱지 않았지만 열심히 행상을 했다. 결국 천핑순은 1899년 당인촌의 정문 바깥에 있는 집을 빌린다. 이곳에 식당이면서 여관 시설도 갖춘 점포를 열었다.

천핑순이 상호로 사해동포(四海同胞)를 뜻하는 ‘사해’를 선택한 이유는 당시의 나가사키가 일본열도로 향하는 입구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이나 한반도와 연결된 연락선이 정박하는 중요 항구이기도 했기에 자신의 고객이 사해에서 모여들라는 뜻에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창업 당시의 사진을 보아도 그 규모는 대단했다. 자료에 의하면 종업원이 3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51748;뽄’이란 이름이 개업 초기부터 존재한 것은 아니다. 나가사키에 유학을 와 있던 중국인 젊은이들을 위해 개발한 음식이라고는 하지만 그 이름도 처음부터 ‘·#51748;뽄’은 아니었다.

1900년대 초반에 찍은 이 식당 사진에는 ‘지나요리서해루온돈원조(支那料理西海樓·#53801;?元祖)’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온돈’은 중국음식 훈둔(??)에서 나왔다. ‘훈둔’은 작은 만두를 국물에 넣은 일종의 만둣국이다. 넓게 보면 한국의 떡국도 ‘훈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에도시대에 일본에서는 이 우동이 국수를 국물에 만 음식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과자점포에서 부식으로 팔다가, 18세기 이후에는 전문적인 우동야(うどん屋) 혹은 소바야(そば屋)가 생겨났다. 그러니 ‘우동’이란 국물에 국수를 만 음식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다만 지역에 따라서 우동을 소바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시에는 ‘·#51748;뽄’이 아니라 ‘시나우동(支那·#53801;?)’이었다. 여기에서 ‘시나’는 중국을 가리키는 말로 ‘차이나’의 일본식 한자에서 유래한다. 온돈(·#53801;?)은 일본어로 우동이다. 그러니 간판은 ‘중국요리점인 서해루가 중국우동의 원조’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1910년대에 들어 어느 순간부터 ‘시나우동’이란 이름과 함께 ‘·#51748;뽄’이란 이름도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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