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4월26일 성난 군중이 ‘서대문 경무대’라 불린 이기붕씨의 집에서 가재들을 꺼내 불태우고 있다.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내놓겠다고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등에는 육당이 빠지지 않는다. 육당은 독립선언서 기초를 이유로 징역 2년 반을 언도받았으나 이듬해 풀려난다. 그 후 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 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거쳐 1943년에는 학병권유에 적극 나선다. 결국 이 때문에 1949년 친일반민족행위로 기소됐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고 다음해 6·25가 나면서 흐지부지된다. 육당 자신이 광복 후 친일반민족행위로 기소돼 있을 때 써낸 자술서에 따르면 “학병 권유는 민족의 기간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좋은 기회”라고 했다. “젊은 청년들이 조직과 전투에 능한 사회 중핵층을 형성하게 하여, 다가오는 신운명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강 전 총리도 육당은 결코 친일파가 아니라고 말했다.
“육당은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 친일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어떡하면 우리가 힘을 길러 독립하는가를 고민하던 분입니다. 내가 건국대에 입학하던 날 육당 선생이 하신 말을 잊지 못합니다. ‘지금 일본 사람들이 내선일체니 동조동근이니 하는데 다 소용없는 말이다. 너희는 조선 사람임을 한시도 잊지 마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다만 학병 권유 때문에 친일파로 몰리는 건데, 우리한테도 학병 나가라고 했어요. ‘그게 조선독립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이다. 이 좋은 기회를 살려야 한다’고 말했어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나는 지금도 육당이 일본에 충성하기 위해서 학병 권유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운이라고 할까, 학병으로 갔지만 그는 훈련을 마치고 육군 견습사관으로 일본 센다이에 있다 종전(終戰)을 맞는다. 전투는 구경도 못하고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때의 경력을 발판으로 다음해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서 바로 장교가 된다. 이북 고향을 찾아가기 위해서라도, 나라의 장래를 봐서라도 군인이 되는 게 가장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그의 학병 동기로는 전해종 전 서강대 교수(역사학)가 있다. 그와 전 교수는 4개월간 신병훈련을 같이 받으며 우의를 쌓는다. 그가 1949년 처음 1사단 12연대장을 맡았을 때, 전임 연대장은 광복군 국내지대 참모장으로 있다가 광복 후 귀국한 전성호 장군이었다. 전해종 교수의 아버지였다. 묘한 인연이다.
“이기붕은 부모처럼 모시던 분”
4·19 혁명은 1960년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하고 28일 이화장으로 물러나면서 마무리됐다. 그러나 실제는 4월28일 새벽 경무대 부속가옥에서 이기붕 국회의장 일가족이 자결하면서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당시 일부 언론은 이 의장 가족이 강영훈 6군단장에게 일시 피난 보호를 요청했으나, 강 군단장이 이를 거절해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도했다. 강 전 총리는 이 때문에 한동안 여러 사람으로부터 의리 없는 사람, 몰인정한 사람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과연 강 전 총리와 이 의장은 어떤 사이였을까. 왜 하필이면 그에게 피난 요청을 했을까.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방장관은 이범석 국무총리가 겸임했다. 몇 달 후 국방장관은 신성모씨로 바뀌었고, 1951년 5월에는 이기붕씨가 국방장관이 됐다. 강 전 총리는 당시 국방부 예산관리국장 겸 병기행정본부장이었다. 경리, 관리, 병기 3국의 실무책임자였으므로 장관과는 업무상 밀접한 사이였다.
그 무렵 국회에서 국방예산 심의를 놓고 강영훈 국장과 국회의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전시이므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해달라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회 국방위원들이 한가한 소리나 하고 있자 주무국장으로서 잠시 발끈한 해프닝이었다. 어쨌든 국회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으므로 그는 책임을 지겠다며 장관에게 국장직 사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기붕 장관은 “잘했어. 젊은 장교들이 그만한 용기쯤은 있어야지. 그만두기는 왜 그만둬”라며 오히려 위로했다고 한다.
이 의장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부정적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사실상 권력을 사유화한 1공화국의 최고 실력자였다는 평이다. 그러나 강영훈 전 총리는 뒷날의 평가에 관계없이 이기붕 의장은 성품이 온화하며 이해심이 많고 부하를 쓰면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