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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하게 젖은 꽃잎’ 닮은 시인 김선우

“詩心 차올라 온몸 간질거리는 거, 꾹 참는 즐거움을 아세요?”

  • 원재훈 시인 whonjh@empal.com

‘촉촉하게 젖은 꽃잎’ 닮은 시인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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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촉하게 젖은 꽃잎’ 닮은 시인 김선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시다. 이 시를 읽으면 나는 사라지고 시 속에 나오는 벌 나비라는 남성 혹은 곤충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는 내가 좋아하는 시다. 왜냐하면 나의 옛 애인을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자신과 추억과 직접 관련이 있는 시를 읽다가 그 추억이 떠오르면, 그 시는 읽는 이에게 위안이 된다.

나는 한때 시를 쓰면 성급하게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주곤 했다. 한밤중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천천히 소리 내어 읽어주면 간혹 그녀는 탄식 어린 한숨을 내뱉곤 했다. 그녀는 아마도 딱히 내 시가 좋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이 시를 읽어주는 그 목소리가 좋아서였을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둘 사이에는 작은 우주가 탄생한다. 둥글고 원만하고 적당히 어두운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소리를 내면 공명이 일어나 멀리 퍼져나간다. 그때 연인의 목소리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문장일지라도 달콤하게 들리게 마련이다. 간혹 그녀의 탄식 소리에 젊은 나는 저절로 발기됐다.

나는 ‘물방울의 기억’이라는 시를 쓰던 날,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읽어준 적이 있다. 그녀가 내 시를 들으면서 짧게 신음소리를 내자 나는 벌 나비처럼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그녀의 꽃봉오리는 활짝 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번은 시를 읽어주다가 방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는 그녀의 방으로 달려간 적도 있다. 20년이나 지난 일이다. 아니, 20년이 더 지난 일이다.

만주 벌판을 지나는 중국 열차 침대칸에서 누운 자세로 시집을 들고 낮게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시집을 덮고 뒤표지를 보았다. ‘시힘’ 동인이자 그녀의 좋은 선배인 나희덕 시인이 뒷말을 썼다. 김선우의 시를 잘 보고 쓴 시인의 직관이 돋보이는 글이다.

‘촉촉하게 젖은 꽃잎을 연상시키는 김선우의 시는 여린 듯 강렬하고 수줍은 듯 관능적이다. 그녀의 시에서 저절로 배어나오는 물기란, 젊음의 소산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어둡고 따뜻한 자궁 속에 출렁거리고 있는 양수에 가깝다. 그녀의 여성성이 발산하는 새로운 빛은 이 양수의 풍요로움에서 비롯된다. 그 속에 숨쉬고 있는 너무도 많은 누이와 어머니와 노파들은 각기 태아이면서 동시에 산모이고 산파이기도 하다. 그 둥근 생명들을 산란하기 위해 그녀는 지금 운주(雲住)에 누워 있다. 곧 물의 살을 찢고 눈부신 가시연꽃이 필 것이다.’



운주사 가시연꽃

희귀하게도 식물 중에서 1속1종인 가시연꽃, 크게는 연꽃잎이 2m가 넘기도 한다. 언젠가 전라도 어디에서 가시연꽃을 본 적이 있다. 그 가시연꽃은 부처가 이 세상에 와 잠시 앉았다 간 자리처럼 넓고 컸다. 각성한 부처의 마음자리는 그 크기와 형태를 짐작할 수 없는 것이지만 거대한 가시연꽃잎을 보면, 그 자리에서 피어 오른 연꽃을 보면 인간의 각성이란 저런 것이지 싶을 때가 있다. 연꽃잎 중앙으로 피어오른 가시연꽃은 관능적이면서도 초월적이다. 김선우는 저런 시를 쓰는구나 싶다. 나는 아주 잠시 그 연꽃잎에 맺히는 물방울이 됐다가 떨어졌다. 김선우는 스물아홉이라는 나이에 가시연꽃을 찾아 운주로 떠난 모양이다.

가시연꽃을 찾아 단 한 번도 가시연꽃 피운 적 없는 운주사에 가네 참혹한 얼굴로 나를 맞는 불두, 오늘 나는 스물아홉 살.

이십사만칠천여 시간이 나를 통과해갔지만 나의 시간은 늙은 별에 닿지 못하고 내 마음은 무르팍을 향해 종종 사기를 치네 엎어져도 무르팍이 깨지지 않는 무서운 날들이 만가도 없이 흘러가네

운주에 올라, 오를수록 깊어지는 골짝, 꿈꾸는 와불을 보네 오늘 나는 열아홉살,

잘못 울린 닭 울음에 서둘러 승천해버린, 석공의 정과 망치 티끌로 흘어졌네 거기 일어나 앉지 못하고 와불로 누운 남녀가 있어 출렁, 남도 땅에 동해 봄 바다 물 밀려오네

참 따뜻하구나, 물속에 잠겨 곧 피가 돌겠구나

걷지 못하는 부처님 귀에 대고 속삭였네 달리다쿰, 달리다쿰! 누가 내 귀에 대고 소녀여 일어나라, 일어나라! 하였지만

-시 ‘雲住에 눕다’ 중에서

시 몇 편을 읽고 시집을 펴서 얼굴을 가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날 나에게 만주 벌판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어둠뿐이었다. 그 터널과 같은 어둠 속에서 야간열차는 나를 한없이 먼 곳으로 데리고 가는 공간이었다. 잠결에 덜거덩거리는 기차 바퀴 소리는 ‘일어나라, 일어나라’라는 환청으로 들리기도 했다. 만주 벌판을 달리는 뚜거덕거리는 말 발자국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잠이 들자 침대가 관처럼 느껴지면서 몸이 무거워졌다. 이대로 어디론가 갔으면 싶었다. 이대로 그냥 어디론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어디론가… 하다가 까마득히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머물고 싶지 떠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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