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이트 게임’ : 피터 홉커크 지음, 정영목 옮김, 사계절출판사, 691쪽, 2만9500원.
지난 8월에는 아프가니스탄 동부의 사로비에서 탈레반의 매복 공격에 프랑스인 공수부대원 10명이 피살되고 21명이 부상했다. 2001년 미군과 나토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이래 최악의 손실이었다고 한다. 카불에서 사로비와 잘랄라바드를 거쳐 파키스탄의 페샤와르로 이어지는 도로는 다시 외국인들이 다닐 수 없는 길이 됐다.
지난 20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역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이 길은 특별한 상념으로 다가온다. 1842년 1월 카불을 떠나 페샤와르로 철수하던 영국군 병사와 그 식솔 2만명이, 매복한 아프간인들의 공격을 받고 이 길에서 몰살당한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승승장구하던 대영제국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수모였고 참변이었다. 이 사건은 19세기 내내 이 산간의 왕국과 주변부를 둘러싸고 유럽의 두 열강이 벌인 각축의 드라마에서 하나의 정점을 이룬 비극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각축전
이 드라마는 일찍이 19세기 초부터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불렸다. 이 게임의 플레이어는 영국과 러시아였으며, 게임의 대상은 아프가니스탄과 그 북쪽 초원지대에 위치한 히바, 부하라, 메르브 등의 이슬람 왕국들이었다. 피터 홉커크가 1990년에 펴낸 ‘그레이트 게임’은 제목 그대로, 근 100년간 이어진 이 게임의 역사를 그려낸 것이다.
영국의 논픽션 저술가인 홉커크는 이미 우리말로도 번역된 ‘실크로드의 악마들’(사계절출판사, 2000; 원제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1980)이라는 책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흔히 서역이라 불리는 현재의 중국령(領) 중앙아시아를 탐험한 서양인 6명의 모험담을 생동감 있게 그린 이 책은 발간 즉시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았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홉커크는 그 이래 ‘그레이트 게임’을 포함해 티베트, 러시아, 터키 등 중앙아시아에 관한 다섯 권의 책을 더 썼다.
오래전에 ‘실크로드의 악마들’ 영문판을 너무도 재미있게 읽고 바로 홉커크의 팬이 된 나는 나머지 책 가운데 몇 가지도 구해 읽었다. 그 가운데 단연 압권이 ‘그레이트 게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다뤄진 고고학적·지리적 탐험은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러나 스케일이나 박진감에서는 ‘그레이트 게임’에서 다뤄진 제국 간의 각축과 제국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전사들’의 모험담을 따라오지 못한다. 홉커크의 글솜씨와 서사 능력도 10년 전보다 훨씬 발전한 듯했다. ‘그레이트 게임’을 읽고 나는 따분한 학술적인 글이 아닌 홉커크 유의 논픽션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새삼 갖게 됐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책을 쓰게 된 배경에는 분명히 홉커크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받은 감명도 부분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레이트 게임’은 15세기 몽골 세력의 쇠락 후 힘의 공백이 생긴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야심을 갖게 된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부터 시작한다. 러시아는 초원지대 너머의 영국 식민지 인도에 대해서도 관심을 표했다. 18세기 말~19세기 초 영국은 나폴레옹이 유럽을 압도하고 이집트까지 공략하자 프랑스가 동쪽으로 눈길을 돌려 인도를 침공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다행히 나폴레옹의 제국은 곧 붕괴됐으나, 이제 유럽에서 무시 못할 세력으로 등장한 러시아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813년 굴리스탄 조약을 통해 러시아가 페르시아를 압박하자 영국은 인도를 지키기 위한 외교전과 정보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영국은 인도의 서북쪽에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이슬람 왕국들을 러시아보다 한발 앞서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인도의 영국 식민지 정부는 군 장교들을 때로는 사절로, 때로는 위장한 스파이로 파견했다. 러시아도 이에 맞서 장교들을 남하시켜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이로부터 100년을 이어온 그레이트 게임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