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0월호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너무 늦은 깨달음…참된 인간 되자마자 형장 이슬로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입력2008-10-06 14: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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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정기현은 19세 되던 해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가산을 정리해 평양으로 이주했다. 얼마 안 되는 집안의 전답은 노름과 술로 탕진하고, 호구지책으로 넝마주이를 시작했다. 스무 살에 장가든 이후로는 아내 사랑이 끔찍했다. 부부 금실도 좋아 5년 만에 세 아이를 얻었다. 고물을 모아 번 돈으로 아내와 세 아들, 다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정기현은 가난하나마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바르게 살겠다는 결심은 지독한 가난 앞에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동아일보 1929년 8월25일자.사진은 체포 당시 정기현의 모습.

    “이봐, 양씨! 술 한잔 어때? 내가 한 턱 낼게.”

    1929년 8월19일 늦은 오후, 넝마주이 정기현이 평양 교구정에서 고물상을 경영하는 양인성에게 찾아와 말했다. 정기현은 스물아홉 살로 양인성보다 여섯 살 연상이었다.

    “아니, 정씨가 웬일이우? 술값을 다 낸다하고. 오늘 가마솥이라도 하나 건지셨소?”

    양인성은 평소 손버릇이 나쁜 정기현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공짜 술이란 말에 귀가 솔깃해 고물상 문을 닫아걸고 정기현을 따라나섰다. 고물상과 넝마주이를 하는 처지에 요리점이나 카페에 갈 형편은 못 되고 막걸리를 사들고 개천가에 나가 마셨다.

    “돈 걱정일랑 말고 양껏 마시라고. 술이 모자라면 또 사오면 되니까.”



    양인성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인 정기현이 돈 걱정 말라고 허세를 부리는 게 같잖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이런 것 저런 것 따지지 않고 오랫동안 술에 주린 위장을 채웠다.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판은 밤 10시가 되도록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겁지겁 술잔을 비우다보니 양인성은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질펀하게 취했다. 양인성이 인사불성이 되자 정기현은 돌연 낯빛을 바꾸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놈이 내가 자전거 도둑이라고 소문내고 다닌다지?”

    양인성은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술기운이 확 달아났지만, 알코올에 마비된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얼마 전 정기현은 넝마주이를 다니다가 자전거를 훔쳐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당겨 쓴 적이 있었다. 전당포 주인은 그처럼 깨끗하고 훌륭한 자전거가 버린 물건일 리 없다며 정기현이 절도한 것이라고 의심했다. 전당포 주인은 정기현이 주어온 고물을 처리하는 고물상 주인 양인성에게 그 사실을 일러주었다. 양인성은 고물상에 드나드는 넝마주이들에게 버린 물건을 주어야지 정기현처럼 남의 물건을 훔쳐 욕심을 채워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정기현은 그 일을 문제 삼는 것이었다.

    “이봐, 정씨 오해하지 말라고. 내가 소문낸 게 아니라 나도 들은 이야기를 전한 것뿐…… 으악!”

    양인성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예리한 금속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분노가 실린 정기현의 단도가 양인성의 온몸을 마구 난자했다. 생전 처음 사람 몸에 칼을 대다 보니 칼질이 서툴러 정기현도 손가락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었다. 양인성의 숨이 멎자 정기현은 시체를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피가 흥건히 묻은 단도는 개천에 던져버렸다. 옷자락을 찢어 다친 손을 동여맨 후 범행 현장을 빠져나왔다. 술김에 난생처음 살인까지 하고 보니 속이 메스껍고 어지러웠다.

    고물상 주인에 이어 순사까지

    정기현은 1901년 평안남도 강서군 성암면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세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서당에서 2년 동안 글을 읽은 것이 학력의 전부였다. 성암공립보통학교 소사(小使·사환)를 시작으로, 성암면사무소와 성암주재소에서 소사로 일했다. 학교와 관청에서 소사로 일하다 보니 학력에 비해 일본어에 능숙했다. 열아홉 살 되던 해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정기현은 가산을 정리해 평양으로 이주했다. 얼마 안 되는 집안의 전답은 노름과 술로 탕진하고, 호구지책으로 넝마주이를 시작했다.

    정기현은 한 차례 절도죄로 복역한 적이 있었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심성이 사악하지는 않았다. 스무 살에 장가든 이후로는 아내 사랑이 끔찍했다. 부부 금실이 좋다 보니 5년 만에 세 아이를 얻었다. 고물을 모아 번 돈으로는 아내와 세 아들, 다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정기현은 가난하나마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바르게 살겠다는 결심은 지독한 가난 앞에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1929년이 시작되면서 경기가 눈에 띄게 침체되더니 여름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하루 종일 평양 거리를 헤매고 다녀봐야 헌 신문지 한 장 발견하기도 어려웠다. 고물 수집이 신통치 않자 다섯 식구가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울자 정기현은 하는 수 없이 또다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 철도국 관사에서 외투 한 벌을 훔쳤고, 본정에서 자전거 한 대를 훔쳐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마련했다.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범죄였다. 일련의 좀도둑 행각이 완전범죄라 생각했는데 며칠 전 동료 넝마주이가 ‘양인성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곧 주재소에 신고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남겨두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협박을 해서라도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술자리에 단도를 품고 갔는데, 술김에 그만 양인성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정기현은 사건이 잊힐 때까지 숨어 지내기로 결심하고 석천산을 넘어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을 향해 밤을 새워 내달렸다.

    날이 새자 양인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온몸에 10여 군데 자상을 입었고, 주위에는 막걸리 술병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연락을 듣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온 양인성의 가족들은 어제 저녁 넝마주이 정기현과 술 마신다고 나갔다가 이처럼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오열했다. 누가 보더라도 정기현과 양인성이 술을 마시고 다투다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다. 평양경찰서에서는 사법계 형사 두세 명을 파견해 도주한 정기현의 뒤를 쫓았다.

    밤새 내달린 정기현은 이튿날 오후 평양에서 30km 남짓 떨어진 강서군 선태성역 부근을 지났다. 강서군 보림면주재소 히로오카(廣岡) 순사는 대화리 청년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를 감시하기 위해 참석했다가 주재소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반대편에서 깡마른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왔다. 사내는 오른손에 흰 헝겊을 두르고 있었다. 히로오카 순사는 수상쩍은 사내를 향해 외쳤다.

    “이봐, 잠깐 서! 대낮에 어딜 그렇게 뛰어가는 게냐?”

    “아, 저 말씀이십니까. 그냥 볼일이 있어서 좀.”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이건 뭐냐?”

    순사가 정기현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거 이게 왜 여기 묻었지? 글쎄,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 이상하네.”

    “아무래도 수상해. 일단 파출소로 가지.”

    정기현은 눈앞이 캄캄했지만 초조한 표정을 짓지 않고 순순히 순사를 따라나섰다. 수갑을 채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난밤 평양 교구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파출소에 도착해 본격적인 신원조사가 시작되면 범행 사실이 알려질 것이 분명했다. 파출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정기현은 무슨 수를 쓰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순사 어른, 참외가 탐스럽게 익었는데 저거 몇 개 사 먹고 갑시다.”

    히로오카 순사도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어서 그러자고 동의했다. 정기현은 참외밭에서 일하던 농부를 불러 어젯밤 양인성에게 술 사주고 남은 동전 몇 개를 쥐어주곤 참외와 과도를 부탁했다.

    “순사 어른, 이래 뵈도 제가 참외 깎는 것 하나는 일품입니다.”

    정기현 체포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9년 8월26일자 기사.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정기현 체포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9년 8월26일자 기사.

    참외밭 주인이 참외와 과도를 건네주자 정기현은 헝겊을 두른 오른손을 움직여 참외를 깎았다. 두 사람은 잘 익은 참외를 나눠 먹고 다시 파출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인적 없는 길에 접어들자 정기현이 걸으면서 순사 곁으로 바짝 붙었다.

    “더운데 왜 자꾸 붙어? 저리 떨어져!”

    순사가 정기현을 밀치려는 순간 왼쪽 가슴에 차가운 금속이 파고들었다. 참외를 깎을 때 썼던 과도였다. 과도는 히로오카 순사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다. 사내가 헝겊으로 감싼 손으로 과도를 들고 히로오카 순사를 무자비하게 찔러댔다. 히로오카 순사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다가 숨이 멎었다. 사내는 시체를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내달렸다.

    고물상 주인이라면 몰라도 순사까지 살해한 이상 경찰에 붙잡힌다면 사형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소사였을망정 주재소에서 다년간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정기현이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사형대를 떠올리니 온몸에 힘이 풀렸다. 생각해 보니 지난밤을 꼬박 새웠고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곤 참외 한 개가 전부였다. 정기현은 일단 몸부터 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인근 산으로 올라가 소나무 숲에 숨어 밤을 보냈다. 썩은 솔잎을 모아 잠자리를 만들면서 여름이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히로오카 순사의 시체가 발견되자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 전 경찰서에 비상이 걸렸다. 수천의 경관이 눈에 불을 켜고 달아난 연쇄살인범 정기현을 찾아 나섰다. 고물상을 죽인 것은 몰라도 순사를 죽인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강서군 곳곳에는 무장경관 수천명이 경계를 서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했다.

    하룻밤을 소나무 숲에서 노숙한 정기현은 아침에 눈을 뜨자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양인성을 살해한 후 이틀 동안 참외 한 개로 80리 산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쫓고 쫓기는 탈주극

    산속에 눌러앉아 있다간 경찰에 체포되기도 전에 굶어 죽을 것만 같았다. 산을 내려와 경찰의 눈을 피해 용강군 양곡면을 향해 걸어갔다. 먼 친척 정명직의 집에서 며칠 신세질 생각이었다. 정명직의 집 사립문 앞에서 소리를 낮춰 주인을 찾았다.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저 기현이에요.”

    “뭐, 기현이?”

    밭에서 일하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에 들른 정명직이 뛰어나왔다. 신문조차 들어오지 않는 산골 마을에 사는 정명직이 먼 친척 조카가 지난 이틀 동안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턱이 없었다.

    “이 무심한 사람, 이게 몇 년 만인가? 그래 자네 모친 돌아가셨을 때 이후로 처음이지?”

    오랜만에 찾아온 조카를 반갑게 맞이하던 정명직은 정기현의 옷에 묻은 핏자국과 옷자락을 찢어 동여맨 오른손을 보곤 표정이 굳었다.

    “무슨 일 있는 거로군. 일단 집으로 들어가세. 방금 점심 먹으려던 참일세.”

    정기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오랜만에 곡기가 들어오니 이틀 동안 쌓인 피로가 엄습해 그 자리에서 곯아떨어져 저녁 먹을 시간이 돼서야 일어났다. 저녁을 먹으며 정기현은 이틀 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정명직에게 털어놓았다. 정명직은 착잡한 표정으로 조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이제 어쩔 셈인가.”

    “당분간 숨어 지낼 생각입니다. 몇 년 숨어 지내다 보면 저 같은 놈 금방 잊어버리겠죠. 경찰이야 다른 사건도 많을 테니.”

    “그야 고물상 주인 죽였을 때 이야기지. 경찰을 살해했다면 저들은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갈 거야. 그러게 경찰은 왜 죽였나.”

    정명직은 안타까워서 조카를 꾸짖었다. 정기현은 내일 아침 일찍 떠날 것이니 옷 한 벌과 노자를 빌려달라고 청했다. 정명직은 조카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한겨울 옷말고는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고, 집안엔 일원짜리 지폐 한 장도 없었다.

    “아침 일찍 이웃에서 빌려볼 테니 걱정 말고 자게나.”

    이튿날 아침 정명직은 옷과 노자를 구하러 이웃집을 돌아다녔다. 가난한 산골 마을에서 옷이며 현금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웃 마을인 지운면 인하리에 가서야 옷가지와 노자를 구할 수 있었다. 옷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명직은 경찰의 검문을 받았다. 경찰이 아침부터 옷은 왜 들고 다니느냐고 집요하게 캐묻자 정명직은 겁에 질려 사실을 자백했다. 정기현의 꼬리가 잡히자 용강경찰서 소속 100여 명의 무장경찰은 정명직의 집 주위를 에워싸고 체포 작전에 돌입했다.

    무장경찰이 정명직의 집을 포위했을 때 정기현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였다. 정명직의 집에서 허탕을 친 무장경찰 백여 명은 양곡면 일대 약 30리 주위를 포위하고 수색했다. 하지만 그날 오전 9시까지 정기현의 간곳은 오리무중이었다. 경찰이 헛물을 켜고 있을 때 정기현은 철통같은 경계망을 벗어나 평남선철도를 건너 그날 오후 5시경 진남포로부터 약 15리 떨어진 대동강변 천교리에 나타났다. 이에 놀란 경찰은 천교리 일대를 둘러싸고 협공을 개시했으나 8월 23일 날이 밝도록 정기현을 체포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평남선 일대 완연 전장’ ‘중외일보’ 1929년 8월 25일)

    경찰과 숨바꼭질을 벌이던 정기현은 최초의 살인을 저지른 지 닷새째 되던 8월 23일 또다시 용강군 양곡면에 나타났다. 그날 오후 2시, 정기현은 지니고 다니던 과도로 밭에서 풀을 베던 농부 오봉학을 위협해 옷을 바꿔 입고, 낫까지 빼앗아 달아났다.

    세 번째 살인

    8월23일 오후 5시, 용강경찰서 경무계 주임 스도(須藤) 경부보는 양곡면 남동리 일대에서 정기현을 수색했다. 범인 수색에 몰두하다 보니 다른 수색 대원들과 간격이 벌어졌다. 늦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산길을 헤매는데 등 뒤에서 난데없이 낫자루가 날아왔다.

    “으악!”

    스도 경부보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정기현이 비호처럼 달려들어 스도의 몸을 뒤졌다. 허리춤에 권총이 걸려 있었다. 정기현은 권총을 빼앗아 들고, 낫으로 일격을 당해 피를 철철 흘리며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스도를 겨눴다.

    탕. 탕.

    한 발은 스도의 복부를, 또 한 발은 음부를 관통했다. 스도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날 밤 8시 정기현은 두보리에서 중국인 이영을 권총으로 위협해 7원90전을 강탈한 후 또다시 자취를 감췄다. 닷새 동안 경관 두 명을 포함한 세 명을 살해한 잔인무도한 살인마가 날이 시퍼렇게 선 낫과 실탄 18발이 든 권총까지 손에 넣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평안남도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건장한 사내들은 살인마의 체포를 무능한 경찰에만 맡겨둘 수 없다며 앞 다투어 자경단에 자원했다.

    정기현이 세 번째 살인을 저질렀다는 급보를 들은 수사본부는 평안남도 경찰부 에토(衛藤) 보안과장의 총지휘 아래 50여 명의 무장경찰을 3개조로 나누어 정기현이 종적을 감춰버린 두보리 삼림을 포위했다. 어두운 밤이라 적극적 수색은 하지 않았으나 잇따라 달려온 지원 병력과 함께 물샐틈없이 포위 경계했다.

    정기현은 그와 같이 물샐틈없는 수백명 무장경관의 포위 경계망을 교묘히 돌파하고 금봉산 촌가에서 주인을 권총으로 협박하여 저녁밥을 지어 먹고 유유히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 새벽에 조반까지 지어먹은 후 남쪽 방면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8월24일 아침 수사본부에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범인은 날쌔게도 금봉산에서 30리가량 떨어진 용강군 대대면 덕동리에 나타났다고 한다. 아직 민가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거나 또 다른 사람을 살상했다는 보고는 없지만 덕동리는 진남포에서 불과 10여 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큰 촌락으로 살인마 정기현이 나타난 덕동리 일대는 인심이 흉흉하다. (‘무장 경관대 두보리 포위’ ‘동아일보’ 1929년 8월 25일자)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동아일보 1929년 10월17일자에는 정기현 사형판결 소식이 실렸다.

    8월24일 오전, 평안남도 경찰부를 비롯한 평양경찰서, 대동경찰서, 강서경찰서, 용강경찰서, 진남포경찰서 등 5개 경찰서 소속 전 경찰이 속속 덕동리로 모여들었다. 경관 1000여 명, 자경단 300여 명이 겹겹이 덕동리 일대를 에워쌌다. 범인은 독 안에 든 쥐와 마찬가지였지만 18발의 실탄이 든 권총을 들고 있으니 또 다른 유혈 사태는 각오해야만 했다.

    연쇄살인범을 목전에 두고 번번이 체포에 실패하자 경찰의 무능을 질타하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평안남도 경찰부 이시모토(石本) 경찰부장은 범인 체포가 더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초록이 무성한 시기요, 들과 밭에는 참외와 오이 그리고 각종 과실이 풍성한 계절이라 추격하는 경찰에게 쫓겨 사오일 밤낮을 인가로 들지 못하고 짐승처럼 쫓겨 다니는 범인에게는 둘도 없는 좋은 시절이어서 범인 체포는 더욱 곤란합니다. 오늘날까지 그가 달아난 경로를 쫓아 조사한 결과 한두 번 인가에 들렀으나 대부분은 산에서나 들에서 참외와 과실 등으로 생식을 한 것이 밝혀졌습니다. 어쨌든 금명간에는 꼭 잡게 되겠지요.” (‘과실 풍성해 법인 체포 곤란’ ‘동아일보’ 1929년 8월 25일자)

    “나는 정기현이 아니다”

    8월24일 오전 10시30분, 경찰 2명을 포함해 도합 3명을 살해한 살인마가 관내에 잠입해 술렁이던 진남포경찰서에 전화벨이 울렸다.

    “진남포경찰서 상황실입니다.”

    “용강군 대대면 덕동주재소 야지마(矢島) 순사입니다. 정기현이 방금 진남포 제1 수원지(水源池)인 우산(牛山) 골짜기 용강군 대대면 산동리 임시군의 집에 나타나 주인을 권총으로 협박해 밥을 짓고 술을 사오라 해 유유히 밥과 술을 먹고 마시고 있다고 그 동네 구장의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진남포경찰서 오키(沖) 서장은 전 대원을 긴급 소집해 2개 조로 나눠 자신이 직접 제1조를 지휘하고 황치수 사법주임에게 제2조를 지휘토록 하고 시내의 승합차는 물론 화물차까지 징발해 잡아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야지마 순사는 경찰서의 지원 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주재소에서 기다리다간 정기현을 또다시 놓칠 것 같아 그가 도주한 우산으로 무작정 쫓아갔다. 하지만 산길을 몇 시간씩 헤매도 정기현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오후 2시 야지마 순사가 우산 산허리에서 헤매고 있을 때, 멀리서 깡마른 사내가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정기현의 행방을 알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사내를 소리쳐 불렀다.

    “이봐요, 말 좀 물읍시다.”

    사내는 힐끔 돌아보더니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글쎄, 못 들은 척하지 말고 거기 좀 서 봐요.”

    야지마가 거듭 부르자 사내는 잽싸게 수풀 사이로 몸을 감췄다.

    탕. 탕.

    사내가 사라진 수풀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깡마른 사내가 자신이 애타게 찾아 헤매던 바로 그 정기현이었다. 야지마 순사는 요행히 총알을 맞지는 않았다. 산 아래서 대오를 정비하던 수사대는 총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일제히 내달렸다. 때마침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흩뿌렸다.

    정기현은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젖 먹던 힘을 다해 해발 1700m 우산 정상을 향해 내달렸다. 산꼭대기 바위틈에 몸을 숨겼을 때 수사대가 바로 아래까지 추격했다. 하늘로 날아가지 않는 이상 더는 도망칠 수 없는, 말 그대로 독 안에 든 쥐였다. 수사대가 투항을 권유했다.

    “정기현! 정기현!”

    “정기현이 누구냐! 사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정기현의 2심 공판이 열린 평양복심법원.

    람을 잘못 봤다. 나는 정기현이 아니다.”

    정기현은 자신이 경찰이 찾고 있는 살인마 정기현이 아니라고 외치며 손을 들어 좌우로 가로저었다. 경찰은 헝겊으로 감싼 사내의 오른손을 보고 그가 정기현임을 확신했다. 정기현은 뒤늦게 헝겊을 풀고 다시 손을 가로저었다.

    “나는 정기현이 아니다. 다가오지 마라. 누구든 다가오면 쏜다.”

    탕.

    정기현은 경고의 의미로 권총을 들어 공포를 쏘았다.

    “정기현이 아니라면서 권총은 어디서 났나? 너, 바보냐? 정기현, 너는 더 이상 도망갈 구멍이 없다. 10분간 시간을 주겠다. 그때까지 투항하지 않으면 사살하겠다. 알아들었나?”

    10분이 지나도 정기현은 투항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조치원경찰서 황치수 사법주임은 사격 명령을 내렸다. 정기현이 숨어 있는 바위를 향해 총탄이 빗발쳤다.

    “목숨만 살려달라.”

    사격이 멈추자 정기현은 다시 손을 가로저으며 목숨을 구걸했다.

    “그래 내가 정기현이다. 항복하겠다. 목숨만 살려다오.”

    정기현은 권총을 경찰을 향해 내던지고 손을 들고 숨어 있던 바위틈에서 나왔다. 이로써 엿새 동안 민간인 한 명, 경관 두 명의 희생자를 낸 희대의 연쇄 살인극은 종지부를 찍었다.

    “참다운 인간이 되어 죽겠나이다”

    진남포경찰서에 수감돼 신문을 받은 정기현은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백하면서 ‘하루바삐 사형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이왕에 죽을 것이라면 죽음을 기다리는 고통이라도 줄여달라는 것이었다. 술김에 사람을 죽인 후 도망쳐서 살아보려고 경찰만 만나면 죽이고 달아나다 보니 사람을 셋씩이나 죽이게 되었노라고 범행 동기를 설명했다. 유치장 밥이 조밥이라며 “며칠 후 죽을 놈을 이렇게 대접하느냐 쌀밥을 달라”고 떼를 썼고, “담배가 피우고 싶어 못 견디겠으니 담배를 달라”고 밤낮으로 소리를 질렀다. 유치장 수감자에게는 담배를 주지 않는 게 원칙이었지만, 며칠이고 거듭 성화를 부리니 경찰도 하는 수 없이 마코 담배를 건넸다.

    “죽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그런 맛없는 담배를 주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해태 담배를 달라.”

    정기현은 며칠 동안 농성해 순사들도 피우지 못하는 값비싼 해태 한 갑을 선사받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보였던 정기현은 뜻밖에도 예심법정에서 탈주를 시도했다.

    지난 9월19일 오후 2시30분 평양지방법원 예심정에서 아라마키(荒卷) 예심판사가 살인마 정기현을 심문했다. 범행 일체를 순순히 자백하던 정기현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요구했다. 아라마키 예심판사는 아무 의심 없이 곁에 있던 후지와라(藤原) 간수에게 화장실에 데려다주라고 명령했다. 정기현은 화장실에서 돌아오던 길에 법정 복도에서 갑자기 손에 채운 수갑을 풀고 간수의 칼을 빼앗으려고 칼까지 쥐었지만 간수는 죽을힘을 다해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대 소동을 일으켰다. 이것을 본 다른 간수가 협력해 겨우 다시 포박해 정기현의 탈주극은 실패로 돌아갔다. 아라마키 예심판사는 심문을 중지하고 정기현을 곧장 형무소로 돌려보냈다. (‘정기현 돌연 탈주를 기도’ ‘동아일보’ 1929년 9월 21일자)

    죽음을 각오한 듯 보였지만, 사실은 어떻게든 살고 싶었던 것이었다. 한바탕 탈주 소동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혐의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고 정기현도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에 예심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9월28일 후지와라 예심판사는 정기현이 체포된 지 불과 한 달 만에 예심을 종결하고 살인, 살인미수, 절도 및 강도 혐의를 인정해 공판에 회부했다.

    10월8일 오전 11시30분, 평양지방법원에서 사이토(齋藤) 재판장 주재로 개정한 공판에는 200여 명에 달하는 방청객이 쇄도해 법정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정기현이 예심정에서 간수의 칼을 빼앗아 탈주를 기도한 적이 있기 때문에 칼도 차지 못한 간수 10명, 순사 4명이 3겹으로 둘러싸서 정기현을 법정으로 호송했다. 공판정에서도 정기현은 범행 일체를 시인했다. 후쿠다(福田) 검사는 정기현에게 사형을 구형하고 살인범을 숨겨준 정명직에게는 징역 10개월을 구형했다. 일주일 후 개정한 선고 공판에서 사이토 재판장은 검사의 구형대로 정기현에게 사형을, 정명직에게 징역 10개월을 선고했다. 판결이 끝나자 정기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아내 김치봉을 찾으며 “나는 죽을 것을 각오했으니 남은 자식들이나 잘 길러달라”고 부탁하고 엄중한 경계하에 퇴정했다.

    11월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나카시마(永島) 재판장 주재로 개정한 2심 공판에서 정기현은 범죄 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재판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전봉관

    1971년 부산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동 대학 석·박사(국문학)

    서울대, 아주대, 한신대, 한성대, 덕성여대에서 강의

    現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 과학부 교수

    저서 및 논문 : ‘1930년대 한국 도시적 서정시 연구’ ‘황금광시대’ ‘경성기담’ ‘럭키 경성’ 등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했습니다만 죽는 이때 악한 이 마음으로 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얼마 전부터 마음을 고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정월까지만 죽이지 않으면 참다운 인간이 되어 죽겠나이다.”

    마지막 소원대로 정기현의 형(刑)은 1930년 2월에야 경성고등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정기현은 한순간의 판단착오로 무고한 세 사람을 죽였지만, 죽음에 임박한 순간 가족과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참다운 인간으로 거듭났다. 그러나 너무 늦게 깨닫는 바람에 참다운 인간이 되자마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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