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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마지막회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너무 늦은 깨달음…참된 인간 되자마자 형장 이슬로

  •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국문학 junbg@kaist.ac.kr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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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현은 한 차례 절도죄로 복역한 적이 있었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심성이 사악하지는 않았다. 스무 살에 장가든 이후로는 아내 사랑이 끔찍했다. 부부 금실이 좋다 보니 5년 만에 세 아이를 얻었다. 고물을 모아 번 돈으로는 아내와 세 아들, 다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정기현은 가난하나마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갔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바르게 살겠다는 결심은 지독한 가난 앞에 여지없이 허물어졌다.

1929년이 시작되면서 경기가 눈에 띄게 침체되더니 여름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하루 종일 평양 거리를 헤매고 다녀봐야 헌 신문지 한 장 발견하기도 어려웠다. 고물 수집이 신통치 않자 다섯 식구가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울자 정기현은 하는 수 없이 또다시 남의 물건에 손을 댔다. 철도국 관사에서 외투 한 벌을 훔쳤고, 본정에서 자전거 한 대를 훔쳐 전당포에 맡기고 돈을 마련했다.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범죄였다. 일련의 좀도둑 행각이 완전범죄라 생각했는데 며칠 전 동료 넝마주이가 ‘양인성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곧 주재소에 신고할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남겨두고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협박을 해서라도 소문을 차단하기 위해 술자리에 단도를 품고 갔는데, 술김에 그만 양인성을 찔러 죽이고 말았다. 정기현은 사건이 잊힐 때까지 숨어 지내기로 결심하고 석천산을 넘어 고향인 평안남도 강서군을 향해 밤을 새워 내달렸다.

날이 새자 양인성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온몸에 10여 군데 자상을 입었고, 주위에는 막걸리 술병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연락을 듣고 사건 현장으로 달려온 양인성의 가족들은 어제 저녁 넝마주이 정기현과 술 마신다고 나갔다가 이처럼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오열했다. 누가 보더라도 정기현과 양인성이 술을 마시고 다투다 일어난 살인 사건이었다. 평양경찰서에서는 사법계 형사 두세 명을 파견해 도주한 정기현의 뒤를 쫓았다.

밤새 내달린 정기현은 이튿날 오후 평양에서 30km 남짓 떨어진 강서군 선태성역 부근을 지났다. 강서군 보림면주재소 히로오카(廣岡) 순사는 대화리 청년회에서 주최하는 강연회를 감시하기 위해 참석했다가 주재소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반대편에서 깡마른 사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왔다. 사내는 오른손에 흰 헝겊을 두르고 있었다. 히로오카 순사는 수상쩍은 사내를 향해 외쳤다.



“이봐, 잠깐 서! 대낮에 어딜 그렇게 뛰어가는 게냐?”

“아, 저 말씀이십니까. 그냥 볼일이 있어서 좀.”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유창한 일본어로 말했다.

“이건 뭐냐?”

순사가 정기현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이거 이게 왜 여기 묻었지? 글쎄,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하, 이상하네.”

“아무래도 수상해. 일단 파출소로 가지.”

정기현은 눈앞이 캄캄했지만 초조한 표정을 짓지 않고 순순히 순사를 따라나섰다. 수갑을 채우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난밤 평양 교구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파출소에 도착해 본격적인 신원조사가 시작되면 범행 사실이 알려질 것이 분명했다. 파출소를 향해 걸어가면서 정기현은 무슨 수를 쓰든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순사 어른, 참외가 탐스럽게 익었는데 저거 몇 개 사 먹고 갑시다.”

히로오카 순사도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어서 그러자고 동의했다. 정기현은 참외밭에서 일하던 농부를 불러 어젯밤 양인성에게 술 사주고 남은 동전 몇 개를 쥐어주곤 참외와 과도를 부탁했다.

“순사 어른, 이래 뵈도 제가 참외 깎는 것 하나는 일품입니다.”

정기현 체포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9년 8월26일자 기사.

살인마 정기현의 연쇄 살인극

정기현 체포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29년 8월26일자 기사.

참외밭 주인이 참외와 과도를 건네주자 정기현은 헝겊을 두른 오른손을 움직여 참외를 깎았다. 두 사람은 잘 익은 참외를 나눠 먹고 다시 파출소를 향해 길을 나섰다. 인적 없는 길에 접어들자 정기현이 걸으면서 순사 곁으로 바짝 붙었다.

“더운데 왜 자꾸 붙어? 저리 떨어져!”

순사가 정기현을 밀치려는 순간 왼쪽 가슴에 차가운 금속이 파고들었다. 참외를 깎을 때 썼던 과도였다. 과도는 히로오카 순사의 심장에 정확히 박혔다. 사내가 헝겊으로 감싼 손으로 과도를 들고 히로오카 순사를 무자비하게 찔러댔다. 히로오카 순사는 비명을 지르며 저항하다가 숨이 멎었다. 사내는 시체를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다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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