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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 속 위기의 사랑’ ⑩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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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를 꿈꾼 ‘전화방 주부’의 상처

‘연애’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욕망의 그림자는 같은 시기에 개봉했던 ‘연애’라는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연애’의 주인공은 생활고 때문에 음란전화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부다. 빚꾸러기 남편에 빠듯한 살림살이, 그녀는 매일 음란전화를 받지만 사실상 그녀에게 이 전화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손을 바쁘게 놀리면서 입으로 내뱉는 신음에는 욕망 한 줄 실리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신음조차 일의 일부이고 생활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조금 다른 목소리가 전해 온다. 목소리는 그녀를 사람으로 대해주고 그녀의 마음을 들어주는 듯싶다. 어느덧 성큼 그는 여자의 삶 안에 주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는다. 그리고 드디어 가정주부인 그녀는 그를 만나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전환점을 마련해보고자 한다. 그녀에게도 욕망이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부분은 너무도 처참하다. 결혼의 답답함, 일상의 비루함을 벗어던질 화끈한 연애를 꿈꾸며 데이트에 나갔던 여자는 굴욕적인 스리-섬을 요구받는다. 그녀는 그 남자들에게 단지 음란전화로 만난 ‘탈 없는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탈, 욕망, 자극… 이런 말들을 원했지만 그녀의 일상에서 이 언어들은 낯선 외국어에 불과하다. 일탈에 대한 욕망은 그녀의 일상에 지워지지 않을 뜨거운 상처를 남겨놓는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크래쉬’

어쩌면 우리는 ‘애인’과 같은 일탈을 꿈꾸지만 일탈이 남긴 현실은 ‘연애’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수많은 ‘연애’가 치정극으로 끝나고 마는 것도 아마 현실의 비루함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주장하면서 남편과 애인을 모두 건사하려 하는 깜찍한 모반은 여기서 비롯될 것이다. 결혼은 열정의 무덤이며 욕망의 종착지다. 사람들은 욕망과 열정을 기반으로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계산과 계획으로 결정한다.

결혼의 무덤에 파인 욕망의 구멍

‘장미의 전쟁’

하지만 사람은 끝없이 생성되는 욕망에 의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계약이나 계산만으로 지탱할 수 없는 삶의 구멍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무덤 곁에 나름의 출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욕망이 숨 쉬고 드나들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애인’이라는 듯이 말이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부부싸움

그렇다면 결혼은 왜 이토록 지긋지긋한 것으로 환기되는 것일까? 간혹 우리는 왜 곁에 잠들어 있는 그 남자를 죽이고 싶어하고 내 아이를 낳아준 그녀를 혐오하는 것일까? 이혼 영화의 대명사가 된 ‘장미의 전쟁’은 다정했던 부부가 얼마나 서로 잔혹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낭만적 열애 끝에 결혼한 올리버와 바바라는 남부럽지 않은 부부로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이들 사이에 아들 조쉬, 딸 콜로린도 생기고 호화로운 자동차와 집도 장만한다. 그런데 경제적 물질적 안정을 이루자 사소한 일에서 의견충돌이 잦아진다. 대화는 줄어들고 자존심만 내세우는 둘 사이에 불신의 틈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 드디어 바바라가 이혼을 요구하고 집 소유권을 놓고 양보 없는 싸움을 시작한다.

집 소유권에서 시작된 바바라와 올리버의 싸움은 결국 육탄전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살육전으로 확대된다. 자존심을 건드리고 서로의 약점을 찌르던 말싸움은 결국 무엇이 원인이었는지도 모르게 그저 서로를 죽이고 싶어 안달인 ‘전쟁’이 되고 만다. 자신들이 정성스럽게 고른 샹들리에에 깔려 죽는 결말은 웃기면서도 처참하다.

한편 ‘미스터 앤 미시스 스미스’는 ‘장미의 전쟁’에서 보여주는 부부 간의 결렬을 훨씬 더 가볍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장미의 전쟁’이 블랙 코미디라면 ‘미스터 앤 미시스 스미스’는 부부관계를 비밀 스파이전에 비유한 밝은 코미디에 가깝다. 두 작품은 부부 사이엔 서로 말 못할 비밀이 있다는 것, 그리고 한번 돌아서면 부부 사이의 싸움은 전쟁을 방불케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안정’에 대한 권태

실상 많은 부부가 사소한 이유를 시작으로 목숨 건 전쟁을 한다. 증오와 애증, 그런 점에서 여기 이 부부를 주목할 만하다. 서로의 파멸을 향해 천천히 목을 조여 오는 부부, 서로를 천천히 고통스럽게 파괴하고 싶어하는 자들. 들라크루아의 그림 ‘사르다나팔의 죽음’의 사르다나팔 왕처럼 부부는 죽음의 카니발을 주재하며 광기의 정점에 앉아 있다. 그들은 서로를 파괴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는 도착적 공생 관계다.

장이머우의 작품 ‘황후화’는 금빛으로 물든 거대한 파멸의 드라마이자 파괴의 카니발이다. ‘황후화’에 등장하는 왕국은 한창 절정의 시기를 달리고 있다. 태평성대이기에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궁녀와 신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왕국의 하루는 지나간다. 이러한 모습은 셀 수 없이 많은 장신구를 머리에 꽂은 황후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태평성대일수록, 그러니까 바깥이 잠잠할수록 안에 대한 불만은 커지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왕과 왕비는 이 태평성대 속에서 서로를 어떻게 없애고 부숴버릴 것인지에 열중한다. 그것도 교묘히 모든 것을 서로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그리고 속는 척 연기를 한다.

남편은 아내, 황후에게 매일 독이 든 약을 조금씩 먹인다. 황후는 독약에 중독돼 조금씩 사지가 마비되며 죽어간다. 한편 황후는 남편인 왕을 없애기 위해 아들을 앞세워 반란을 꾀한다. 황제와 황후의 불편한 관계는 아주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민이던 황제는 황족인 아내를 얻어 지금의 지위를 갖게 된다. 황제와 황후의 관계는 정치적 동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황제는 버릴 수밖에 없었던 첫 여자에 대한 갈망을 간직한 채 아내를 멸시하면서도 정치적 위험인 옛 여인을 없애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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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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