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7월9일 일본 도야코 윈저 호텔에서 열린 한·러 정상회담에서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환담하고 있다.
“러시아만큼은…” 충만한 자신감
이 대통령의 러시아 인맥도 만만치 않다. 그는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을 만나는 과정에서 현 칼미크 공화국의 키르산 일륨지노프 대통령을 사귀게 됐다. 일륨지노프 대통령은 러시아 정계와 교분이 깊다. 이 대통령은 또한 현대건설 회장 당시 연해주 개발과 관련해 극동의 실력자를 두루 만났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15일 미국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연해주를 한국의 식량기지로 만들겠다는 ‘연해주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국제곡물가가 치솟으면서 식량자원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는 상황에서 나온 이 구상은 사실 이 대통령의 러시아 경험에서 비롯됐다. 이 대통령은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경제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 구상의 출발점이 바로 연해주다. 연해주와 남북한을 포함한 동북아경제권의 활성화가 경제통일론의 핵심이다.
대선 직후 이재오 대통령당선인 러시아 특사도 이 대통령의 극동 중시 정책에 영감을 받아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난 뒤 곧장 서울로 오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들러 극동 지역에서의 남-북-러 경협 활성화를 러시아 측에 제안했다. 포스트 이명박을 꿈꾸는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도 연해주 지역에서 현대중공업의 대규모 농장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극동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가 한국의 중심 정치권에서 지금처럼 집중적으로 조명받은 적은 없었다.
‘신동아’ 보도와 모스크바 분위기
러시아 사정을 잘 안다고 생각하고, 많은 러시아 지인을 확보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대(對)러시아 외교에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2008년 들어 한·러 관계는 심상치 않다. 어떤 면에서 최근 러시아 정계의 반한(反韓)감정은 한·러 수교 이후 최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지난 6월을 전후해 러시아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정보수집 활동을 해온 한국 국정원 직원(외교관 신분) 4명을 잇따라 추방했다. 국제관계에서 외교관 추방은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낳을 수 있는 사안이다. 미국과 러시아 간에, 유럽 국가와 러시아 간에 외교관 추방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국 언론은 사건의 의미와 향후 파장에 대해 대서특필하고 집중적으로 사건을 조명한다. 그러나 이 사건의 경우 한국 언론이 흐지부지 흘려버려 국내에 그 심각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필자가 최근 모스크바를 방문해 러시아 측 주요 인사들과 접촉한 바에 따르면, 한국 외교관 추방사건은 ‘신동아’ 6월호에 보도된 바와 같이 한국의 국정원과 검찰이 물증도 없이 주한 러시아대사관 소속 참사관을 불법 학위 알선 혐의자로 연루시키고, 러시아 국립대학교 총장을 지명 수배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당시 혐의 대상이 됐던 외교관은 지금 러시아의 대(對)한국정책 실무를 총괄하는 러시아 외교부의 한국 과장으로 재임 중이다.
한국 검찰이 기소한 러시아 부정학위 발급사건의 경우 러시아 검찰은 ‘해당 학위는 러시아 관련법을 준수한 합법적 학위’라는 수사 결과를 한국 법원에 통보했으며, 이에 한국의 1,2심 법원은 검찰의 기소 내용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피고인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한국 검찰이 러시아 검찰의 수사결과 및 자국 법원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항소하자 러시아 정부는 이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의미에서 한국 외교관을 추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측으로서는 한국 검찰은 이명박 정부에 소속된 기관이며 이는 곧 이명박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대해 여전히 적대적 편견을 갖고 있고 모함하고 있으며, 이를 개선할 의지도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 외교가 일각에서는 “한·러 관계의 피로와 위기를 점증시키고 있다. 이는 러시아의 대 한국 정책에 ‘경직성’을 불러 직간접적으로 한국 측에 국익 손실을 안기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