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urice McTigue<br>● 1940년생<br>● 뉴질랜드 고용부 장관, 공기업부 장관, 철도청 장관, 노동부 장관, 이민부 장관 역임<br>● 現 미 조지메이슨대 특임방문교수
그러나 선거 기간의 호언장담은 어디로 갔는지 불안하다. 공기업 민영화는 선진화로 이름을 바꿔 달고 거의 안 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변해가고 있다. 전기나 수도, 가스 등 정말 중요하고, 민영화가 꼭 필요한 산업들에 대해 대통령 자신이 민영화를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민영화를 하겠다고 발표한 부분은 숫자도 몇 되지 않는 데다 안 해도 그만일 정도로 작은 부분들뿐이다.
이처럼 작은 반대에도 물러서는 식이라면 규제를 푸는 일 역시 얼마나 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벌써부터 수도권 규제의 폐지는 물 건너간 것 같고, 다른 규제도 논란이 큰 것은 풀릴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과연 한국이 개혁을 완수하고 제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생각이 복잡하던 차에 문득 뉴질랜드의 맥티그 장관이 생각났다.
그를 만난 건 우연이었다. 7월초 세계재산권협회 주최로 열린 학술대회 만찬장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옆 자리에서 두 금발의 신사가 농민에 관해 나누는 대화가 내 귀에 빨려 들어왔다.
“농민도 스스로 책임지게 하면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합니다. 정부가 보조금을 주면 보조금에 적응하느라 창의력을 잃고 정부 돈 받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농민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변화의 장관(minister of change)’
도대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내 소개를 하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알고 보니 그 노신사가 ‘변화의 장관(minister of change)’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뉴질랜드의 모리스 맥티그(Maurice McTigue)씨였다.
그는 198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다섯 개 부처 장관을 거치면서 가는 곳마다 파격적인 개혁을 성공시킨 인물이다. 재정부 부장관일 때는 예산을 줄이는 일을 맡았고, 공기업부 장관일 때는 철도·전기·통신·국유림 할 것 없이 대대적인 민영화에 나섰으며, 노동부 장관일 때는 노조가 아니라 개인이 노동계약의 주체가 되는 고용계약법을 관철시켰다. 맥티그는 이명박 정부가 원래 공약으로 내세웠던 작은 정부와 민영화, 규제개혁을 교과서대로 성공시킨 사람이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맥티그씨는 영국 버킹엄 궁에서 엘리자베스2세 여왕으로부터 QSO(Queen´s Service Order)라는 작위를 받는다. 뉴질랜드 공무원으로서는 최고 영예라고 한다.
맥티그씨가 개혁정책을 가혹하리만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사람들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자유와 책임을 주면 그 능력이 살아난다. 그러나 의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각자가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는 지원도 하지 말고 규제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정부는 그저 심판자 역할만 하면 된다는 것이 맥티그 전 장관의 철학이었고, 그 철학이 뉴질랜드의 부흥을 가능하게 했다.
이명박 정부의 개혁 노력이 주춤거리고 있는 지금, 이 사람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인터뷰도 하고 내가 원장으로 있는 자유기업원의 행사에 연사로도 모실 겸 겸사겸사 그를 서울에 초청했다. 인터뷰는 그가 며칠 동안 묵었던 조선호텔 6층의 어느 방에서 이루어졌다. 그의 ‘대표작’인 민영화로 대화의 문을 열었다.
“민영화, 해보지도 않고 반대해서야”
▼ 김정호 : 한국에서는 민영화에 대한 논란이 심합니다. 뉴질랜드에서는 어땠습니까?
▼ 맥티그 : 뉴질랜드에서도 논란은 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공성이 떨어진다느니 가격이 오른다느니 하는 심한 논쟁이 있었지요. 그럼에도 민영화로 가격은 내리고 품질은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 김정호 : 정말 그런가요? 뉴질랜드는 전력사업을 민영화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정말 민영화 이후 가격은 낮아지고 품질은 좋아졌습니까?
▼ 맥티그 : 그렇습니다. 1987년 민영화 이후 4년이 지난 1991년에 도매 전기가격이 13%나 인하됐지요. 품질도 물론 좋아졌고요. 이익도 많이 나서 투자자들도 상당한 배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