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전에 원칙의 문제를 얘기하고 싶어요. 선량한 사람이든 범법자든 모든 국민이 ‘언제든 감청될 수 있는 상태’에서 사적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유국가가 아닙니다. 휴대전화망에 감청장치를 두는 건 마치 국가가 개개인의 안방에 카메라를 설치해 엿듣는 것과 같아요. 국민은 위축될 것이고 사적 행위가 제한될 겁니다. 전 국민을 잠재적 혐의자로 놓고 간섭 대상으로 삼겠다는 법은 잘못된 겁니다.”
안 위원장은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과 제8대 한국헌법학회 회장을 역임한 법학자다. 우파에도, 좌파에도 치우치지 않았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러나 그는 통신비밀보호법 개정만큼은 완강하게 반대한다. 그는 인권위 의견 표명을 통해 통신사실 확인자료에 위치정보를 추가하는 부분,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 거부시 처벌하는 부분 등에 대해서도 인권침해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유타 림바흐(74) 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소장은 “2001년 9·11 테러 뒤 제정된 독일의 ‘데이터보호법’이 위헌판결이 났다”며 “감청을 가능하게 하고 일정기간 통화기록도 남기는 법이었지만 자유를 침해한다고 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시(戰時) 상황이라면 모를까”
▼ 현재 추진 중인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도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나요?
“저는 당연히 그렇다고 봐요. 그 법은 개인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와 ‘사생활의 자유’를 명백히 침해하지 않습니까?”
▼ 국익을 추구하는 국정원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국정원 측 논리도 나름의 타당성은 있어요. 질서 유지나 나라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충정은 이해합니다. 전체 국민의 안녕을 위해 위험한 소수를 지켜봐야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만해요. 그러나 방법이 잘못됐어요. 현재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기 어려워요.”
▼ 절충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세부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이기도 하고요.”
▼ 현행 법률만으로도 효율적인 수사가 가능하다고 봅니까?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전시(戰時) 상황이라면 모를까, 전시를 미리 염두에 두고 시행하는 건….”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 의해서도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행위와 내란, 외환, 폭발물에 관한 죄 등의 경우 법원의 허가 없이 감청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돼 있다”고 말했다.
▼ 2005년 검찰수사 결과 국정원이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후 차라리 합법화하자는 취지에 공감하는 여론도 있는데요.
“기관에 대한 평가는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고요. 정보원들은 음지에서 일하기 때문에 활동하는 데 애로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현대 장비에 의존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겁니다. 감청 권한을 갖고 싶어할 거예요. 일하고자 하는 의욕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이런 것에 제동을 걸고 조정하는 것도 민간 정부가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 국정원이 추진하는 법안을 실제로 운영하는 나라가 있습니까?
“그건 조사를 안 해봐서 잘 모르겠지만….”
▼ 미국도 휴대전화를 감청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미국은 특별한 경험을 가졌죠. 9·11 이후 테러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런 부분이 강화된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평소 영장과 같은 다른 시스템이 잘 컨트롤되고 있어 감청이 남용되는 경우는 드물 겁니다. 우리가 미국을 모델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정치인·관료·기업인·언론인…
2005년 국정원 도청사건 수사 결과 도청 대상은 정치인, 관료, 기업인, 언론인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국정원, 검찰, 경찰 등 수사기관에 휴대전화 감청 권한을 부여한 뒤엔 일반 국민의 경우 명백한 범죄혐의자로 지목되지 않은 이상 쉽게 감청대상에 오르지는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들 4개 직업군에 대해선 감청이 빈번히 일어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 지난 정권에서 주 도청대상이 되어온 정치인, 관료, 기업인, 언론인의 경우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이후 사생활이나 직업 활동의 침해에 대한 우려가 더 큰 편이라는 시각도 있는데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가정해서 말할 수는 없으니까. 한번 그랬던 적이 있으니 되풀이될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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