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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군부대 강연은 돈 안 돼, 빚 때문에 간첩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에요”

  • 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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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자, 사탕 훔치다 교화소 복역

8월27일 수사당국이 발표한 원정화의 혐의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원정화는 특수부대 훈련을 받은 경력이 있으며 북한 보위부로부터 남한 침투 명령을 받고 조선족으로 위장해 국내로 잠입, 이후 한국의 경찰관과 결혼한 뒤 같은 해 11월 국정원에 탈북자로 위장 자수했다. 그는 정착지원금을 받은 후 자신의 거주지인 수원 인근 군부대에서 안보교육활동을 하면서 군 장교들을 접촉해 탈북자 명단과 군부대 시설을 촬영한 사진, 군사지도, 무기정보, 군 관련 서류 등을 입수해 중국에 있는 북한 보위국 간부에게 전달했다. 또한 장교들을 성로비로 포섭해 이들로부터 입수한 군사기밀을 e메일을 통해 북한에 빼돌렸다. 또한 중국에서 탈북자 100여 명과 한국인 사업가 7명을 납치했고,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거주지를 파악하거나 정보기관 요원 두 명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원정화의 혐의내용을 적은 공소장에는 그의 출신성분과 범죄사실을 이렇게 적고 있다.

‘1974년 함경북도 청진시 부령구역 고무산2동에서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원정화의 생부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으로 원정화가 태어나던 해에 남한 침투 도중 피살되었다. 남편이 죽고 2년 후, 어머니 최모(60)씨는 김모(63·구속)씨와 재혼해 남매 둘을 더 낳았다.



원정화는 돌격대와 특수부대에서 제대한 후 백화점에 취직했는데, 과자와 사탕 등을 훔치다 적발돼 1993년 6월부터 2년간 교화소에서 복역하다 김정일 특사로 풀려났다. 이어 청진에서 장사를 하다 1996년 12월쯤 친구와 함께 아연을 훔치다 단속반에 체포됐고, 친척의 도움으로 석방된 뒤 중국으로 도피해 2년 동안 친척집 등지를 전전했다. 이 과정에 조선족 남성과 결혼했지만 성격 차이로 결별했고 아이도 낙태했다.

이후 원정화는 중국에서 가짜 달러를 판매, 외화벌이 업무를 했다. 100달러 한 장에 중국돈 200위안(약 3만원)씩 받았다. 외화벌이를 위해 북한에 있는 가족과 연결됐다. 중국에 파견근무 중인 여동생이 하얼빈에 전달하기 위한 가짜 달러를 보위부 직원한테 받는 길에 동행하기도 했다.

2001년 9월 북한의 보위부로부터 “(남한에 가서) 미군 기지를 카메라로 찍어오고 남조선신문에 실리는 조국에 대한 사설을 모아 가져오라”는 지령을 받게 되었고, 조선족 여성으로 위장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입국했다. 당시 중국에서 동거한 한국인 사업가 조모씨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는데, 보위부 요원들은 “한국에 가서 교도관 생활을 했고 아이의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고 말하라”고 주의시키면서 자살용 독약 6알과 공작금 1만달러 등을 건넸다.’

점쟁이, “남쪽 가면 재운(財運) 터진다”

기자는 지난해 원정화와 만나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사로 쓰기로 결심했다. 그와 나눴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들끼리만 공유할 수 있는 사연이나 푸념이 많았기 때문. 그는 북한에서 절도 혐의로 교도소(교화소)에 두 차례 수감되었던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을 ‘전직 교도관’이라고 거짓 소개했지만 여자로서 살아온 이야기는 비교적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카페의 구석진 곳에서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마시면서 “(내가) 서방 복이 지지리도 없어서 팔자가 사나워진 년”이라고 한탄했다. 그가 털어놓은 사연은 여자들이 삼삼오오 앉아 수다로 풀어놓을 법한 평범한 팔자타령이었다.

여간첩 원정화  2007년 미공개 인터뷰

8월27일 수원지검에서 공개한 원정화 간첩행위 증거물들.

▼ 교도관 하면서 점쟁이한테 “탈북해도 되냐”고 물어봤어요?

“그렇게 물으면 큰일 나죠. 그냥 내가 ‘죽을 운이냐 살 운이냐’ ‘이동수(移動數)가 있냐’ 뭐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점쟁이는 저에게 ‘(이동수가) 있다’면서 ‘살 운’이라고 했어요. ‘남쪽에 가면 재운이 터져 돈을 벌고 행복해진다’라고 했어요. 북한 주민들은 음력으로 9일과 29일을 길일로 믿거든요. 제게 ‘운 좋은 해와 달’을 말해주었는데, 잘 기억해뒀어요.”

▼ 교도관 생활은 어떻게 하게 되었어요?

“저만큼 기구한 인생도 없을 거예요. 제가 살던 곳은 함경도 청진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시집을 두 번 갔어요. 우리 어머니도 저처럼 임신한 채로 버림받았어요.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평소 좋아했던 어떤 분과 재혼을 했습니다. 제 밑의 동생 둘은 새아버지의 자식이지요. 제가 공부에 뜻이 있었다면 대학에 들어가 출세를 했을 텐데, 전 공부를 싫어했습니다. 또 어머니 모르게 새아버지가 저를 자꾸 괴롭혔어요. 아버지가 제 입을 막으려고 교화소에 일하게 했어요. 북한의 교도소로는 정치범수용소와 교화소, 노동교양소가 있습니다. 교화소는 1년 이상 형을 받은 사람이 수감되는 곳인데, 제가 있던 19호 관리소는 수용자가 5000명가량 있었어요. 거기서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났어요. 수용자 직업도 다양해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거기서 북한에 대해 많이 배웠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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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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